110화
『이대로 그냥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거에요!?』
마르가리타는 말했다.
그녀는 잔뜩 성난 얼굴로 아득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온갖 빛들이 범람하는 왕좌에 앉아 권태로운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수록 마르가리타의 속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죽게 놔두라는 겁니까?』
『...』
마르가리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그녀의 분노를 짐작케했다.
이대로면 박율이 죽게 된다.
하지만 저 아득한 존재는 너무나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알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드디어 아득한 존재는 입을 열었지만, 이 대답은 너무나 무심했다.
마르가리타는 이를 꽉 깨물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다시 삼켰다.
『...도대체 인과율이란 게 뭐길래 이러는 겁니까.』
그놈의 인과율.
빌어먹을 인과율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인과율을 여러 번 비틀어 박율을 도와준 전적이 있기에 이미 그녀의 힘에 상당한 제약을 받은 상태였다.
『인과율은 절대적인 거야.』
아득한 존재가 내뱉었다.
그는 어쩌겠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르가리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분노 어린 숨을 내뱉었다.
『그게 어린아이들을 죽게 내버려 둔 이윱니까?』
마르가리타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인과율 때문에 잃어버린 아이들을, 그리고 그저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던 그 순간들을 말이다.
천사라는 자리는 너무나 막중했다.
너무나 막중했기에 어느 경계에도 쉽사리 끼어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르가리타를 분노하게 만든 이유였다.
그런 그녀를 보던 아득한 존재는 귀를 후비며 입을 열었다.
『넌 우리가 왜 인과율의 제약을 받는지 알고 있냐?』
『뭐요?』
『우리는 세계의 구도자일 뿐 그 이상은 우리의 몫이 아니거든.』
『...예?』
아득한 존재는 자세를 고쳐 앉아 혀를 내둘렀다.
『흔히들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을 위하는 척은 하지만 언제나 세계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하는 존재야.』
하지만 여전히 마르가리타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그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허공에 작은 구를 만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작은 구는 투명했다.
그러다 툭.
작은 구에 물감이 떨어진 듯 새하얗고 검은색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윽고 구를 나누는 하나의 경계와 함께 절반으로 나뉘었다.
아득한 존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계는 두 개의 원념으로 이뤄져 있지. 흔히들 선과 악이라 부르는 그 무언가 말이야. 그 사이에서 우리는 경계를 담당한다고 볼 수 있지.』
허공을 부유하는 구체 속 두 가지 색은 어떻게든 영역을 넓히기 위해 주리를 틀고 있었다.
두 가지 색 사이 경계는 마치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듯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득한 존재의 말이 이어지며 구체의 색이 경계를 넘어 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약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구체 속 백색이 경계를 넘어 흑색을 침범했다.
백색은 흑색을 잡아먹을 듯 영역을 넓히지만, 이내 흑색의 완강한 저항에 두 개의 색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계를 기준으로 나뉘어 있던 두 개의 색은 더이상 경계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되었다.
아득한 존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턱으로 구체를 가리켰다.
흑색과 백색으로 어지러이 번진 구체.
『우리는 이것을 혼돈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그 끝은.』
두 개의 색은 계속해서 꿈틀거렸고, 결국은 저항을 견디지 못한 구체에 금이 벌어졌다.
그리고 펑.
아득한 존재는 고개를 떨구어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이것이 신이라는 존재가 구도자의 역할에 있어야 하는 이유야. 그 이상은 세계의 종말로 이어지거든.』
아득한 존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팍 내뱉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마르가리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은 뭡니까. 악마들이 인간계를 침공하고, 인간들이 죽어가는 이 상황은 도대체...!』
『과도기일뿐.』
그의 말과 함께 구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서진 구체는 다시 원래의 형태로 수복하더니 처음과 똑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이번에도 똑같이 구체는 경계를 기준으로 두 개의 색으로 나뉘었고, 이내 두 색의 충돌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엔 경계가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경계가 밀려나며 색의 영역이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구체는 완전한 흑색으로 물들었다.
『이게...』
『세계의 통합. 우리는 지금 그 과정을 거치는 중이고.』
아득한 존재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이상의 개입은 불가능해. 특히나 그 아이라면 더더욱.』
마르가리타는 말을 잃은 듯 입을 열지 못했다.
『네가 걱정하는 마음은 알아. 하지만 그것 역시 세계의 순리라서 말이야.』
아득한 존재는 그 말을 끝으로 구체를 다시 거두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마르가리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연다.
『...그럼 나 혼자만이라도 갈게요.』
마르가리타의 파격적인 한 마디에 아득한 존재가 흘깃 그녀를 보았다.
『진심이야?』
『나 혼자 뻘짓한다고 그 잘난 경계가 허물어지진 않을 거잖아요.』
『그렇지.』
『하... 제가 천사가 된 이유는 하나였어요. 불쌍한 어린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그런데 막상 천사라는 직급을 달아놓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저는 또 다시 어린 양들이 뒤져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네요.』
그녀의 말에 아득한 존재는 콧방귀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떠 다시 그녀를 보았다.
『지금 네게 걸린 제약이 얼마나 큰지는 알고 있나?』
『모르면 등신이죠. 더 이상 그릇을 만들지도 못하고, 이제는 마음대로 권능조차 나눠줄 수도 없는.』
『그럼 이번에 인과율을 비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겠네?』
『...』
마르가리타는 입을 꾹 닫았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에겐 너무나 많은 제약이 걸려있기에 이번에도 인과율을 비틀게 된다면 이번엔 진짜 그녀의 존재마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만이 인간계에 간섭이 가능했다.
운이 좋다면 힘을 잃는 것에서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르가리타는 욕지거리와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씨... 좀 도와달라고요.』
하지만 아득한 존재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인과율을 비틀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알지 못해.』
『...도대체 그럼 우리는 왜 존재하는 거에요?』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라고 해두지.』
아득한 존재는 다시 의자에 등을 붙였다.
방도가 없다는 대답을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발을 돌렸다.
아득한 존재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어디가?』
『뒤지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렸다.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군.』
아득한 존재는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 *
수십 번의 합이 이어졌다.
수십 번 넘게 바닥을 구르고, 수백 번 넘게 고통에 흐느꼈다.
그림자를 없애면 또 다른 그림자가 일어나 검을 겨누었고, 박율의 목숨을 탐했다.
하지만 박율은 그럼에도 일어났다.
“하아...”
정신이 혼미해지고, 머리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시야를 가린다.
온몸에 성치 못한 곳보다 성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또다시 까마귀가 달려든다.
이어 정신을 차릴세도 없이 공세가 이어졌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의 전략이 먹혀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율의 마기가 까마귀의 몸에 침투한 이후 까마귀는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무리를 해서까지 박율을 죽이겠다는 일념이 돋보였다.
마리오네트 마냥 삐걱대는 몸으로 살기를 잔뜩 내뿜으며 쉴새 없이 달려드는 것을 보면 그랬다.
지금 그의 상태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속도마저 현저히 느려지고 있었다.
차악!
까마귀의 검날이 박율의 등가죽을 베었다.
박율은 고통을 꾹 참은 채 허리를 비틀어 검을 휘두르지만, 그는 이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이번엔 측면이다.
박율은 또 다시 달려드는 까마귀의 검에 본능적으로 망치를 높이 들었다.
캉!!!
까마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죽음을 목도하는 이의 목소리였다.
박율은 비소가 담긴 얼굴로 숨을 내뱉었다.
“왜? 이제 쫄리냐?”
캉!!! 검과 검이 부딪힌다.
두 개의 검이 맞부딪히며 불씨가 생겨난다.
생겨난 불씨는 순식간에 생겨나지만, 그 사이 또 다른 불씨가 피어났다.
두 사람의 검은 서로의 목을 탐한다.
허나 둘 중 누구도 자신의 목을 내어주진 않는다.
점점 두 사람 사이 격전은 막상막하의 경지에까지 닿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앞에 박율의 집중력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도 있었지만, 까마귀의 상태가 악화되어 가는 것 역시 한몫했다.
캉!!!
“바퀴벌레 같은...”
까마귀는 검을 들이밀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래, 나 바퀴벌레 맞아.”
박율은 까마귀의 검을 튕겨내곤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망치는 허공을 맴돌았다.
하지만 망치의 끝에 묵직한 느낌과 함께 까마귀의 검은 피가 남아있었다.
까마귀는 또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후우...”
할 수 있다.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불가능은 아니었다.
박율은 손에 쥔 망치를 다시 잡았다.
또 다시 전투가 이어진다.
그들의 전투는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캉!!!
몇 번이나 까마귀로 검을 나누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검과 검을 나누며, 흘러들어오는 그의 감정들.
분명 처음엔 복수였다.
그 다음엔 슬픔, 절망, 애절함.
온갖 감정들이 한데 섞인 무언가였다.
헌데 지금의 그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괴물.
이제는 그것 말고 그를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을 나눌수록 죽음의 공포보다는 불쾌한 선명함이 검신의 진동을 타고 온몸으로 울려 퍼졌다.
“넌 도대체 뭐냐...?”
박율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살기로써 돌아왔다.
목적을 알 수 없는 그의 탐욕이 그의 시야를 가렸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인간성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든거냐...!”
캉!!!
망치가 까마귀의 검을 올려친다.
하지만 까마귀는 찰나의 공백도 없이 검을 그대로 내려쳤다.
캉!!!
쿵.
달려드는 마기를 막을 준비를 하던 때였다.
순간 박율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
그리고 일순간 박율의 신경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이 서 있는 땅과 멀리 떨어진 어느 구석.
낯선 마기가 땅바닥을 기어 오는 벌레마냥 그의 몸을 훑었다.
플라우로스.
또 다른 마왕이 지상에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