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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09화 (109/183)

109화

박율은 왼손 손바닥의 형을 바꾸었다.

그리고 마기에 집중한다.

화아!

그의 왼손에 응축되어 있던 마기가 불씨가 되어 피어나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마기를 머금은 검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을 타고 여태껏 쌓아왔던 수많은 마기들이 아구를 벌렸다.

마치 세상 모든 조미료가 한데 섞인 스프를 보는 것만 같았다.

까마귀와 안드라스의 마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쌓인 마기는 상충하는 두 마기 사이에 균열을 만들기엔 충분해 보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작은 균열이면 충분했다.

박율은 다시 고개를 들어 까마귀를 보았다.

그 사이 아까보다 마기가 안정된 듯 격한 움직임이 줄어든 상태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 불안정한 마기가 느껴지지만, 마기가 자리를 잡는 것도 순식간일 터.

까마귀가 완전히 마기에 적응하기 전에 끝내야 했다.

박율은 고개를 돌려 박석훈과 데판을 보았다.

그들 역시 한계에 봉착한 얼굴이었다.

폭포수마냥 쏟아지는 땀과 피에 흠뻑 젖어,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친 듯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다들 괜찮아요...?”

그들의 시선이 박율을 향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 마지막이에요.”

박율은 왼손의 마기를 응축시키며 말했다.

동시에 사정없이 이리저리 꺾이던 까마귀의 고개가 박율에게 고정되었다.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이 움직임을 멈춘 듯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까마귀가 움직인다.

그의 신형은 그림자를 타고 사라졌다.

“저놈한테 가까이 다가가야 해요.”

박율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뛰었다.

까마귀를 상대로 잠자코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를 따라 박석훈과 데판 역시 발을 굴렀다.

그간 까마귀와의 싸움을 겪으며 상대법을 체득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젠 저 두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박율은 마기에 집중했다.

마기는 마치 바닥을 기는 뱀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언제 달려들지도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아주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죽게 된다.

척후로도 쫓을 수 없는 속도이기에 박율은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모든 것은 감에 맡겨야 했다.

공격도 방어도 전부.

단탈리온의 시험을 통해 겪었던 그 순간들이 마치 지금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는 순간.

박율은 머리가 돌아가기도 전에 몸을 비틀었다.

달려드는 살기 때문이었다.

마치 먹이를 탐하는 범 하나가 그림자에 숨어 달려드는 것만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차악!

그리고 그의 감이 정확했다는 증명을 하기라도 하듯 그 방향을 따라 첨예한 일본도가 그를 스쳐지나갔다.

“큭...!”

어깨를 타고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뜨거운 핏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까마귀를 쫓으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저 멀리 보이는 데판과 박석훈도 같은 처지인 듯했다.

그 짧은 사이 그들 역시 까마귀의 검에 당한 듯 온몸에 상처가 자욱했다.

박율은 다시 마기에 집중했다.

두더지 잡기를 하는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두더지를 잡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는 기분이었다.

차악!

이번엔 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허벅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살가죽이 찢기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온몸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고통을 음미할 시간은 없었다.

뒤이어 느껴지는 살기.

후방이었다.

캉!!!

박율은 순식간에 손을 뒤로 재껴 살기를 막았다.

반격을 위해 검을 휘두르면 까마귀는 그림자 속에 들어간 이후였다.

그 이후로도 댓 번.

속절없이 당할 뿐이었다.

“...후.”

이대로 소모전으로 간다면 결국은 몰살이었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까마귀의 몸속에 마기를 집어넣으려 해도 닿지를 못하면 전부 물거품이지 않은가.

이 상황에 떠오르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너무나 확실해서 너무나 위험한 방법.

“...뒤지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죽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한참을 뛰어다니던 박율은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자리에 멈춰섰다.

[뭐하는 짓이냐!!!]

저 멀리에서 마치 죽음을 준비하듯 자리에 멈춘 박율을 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방법이 안 떠오르더라고요.”

그리고 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율의 시선은 그 마기를 향했다.

“진짜 끈질기다. 그치?”

“...”

“남산타워부터 진짜.”

까마귀, 아니 까마귀의 탈을 쓴 괴물은 말없이 일본도를 높이 들어 달려들었다.

역시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박율은 반사적으로 검을 높이 들었다.

캉!!!

어디서 어떻게 날아오는 지도 모를 공격을 막았다.

순전히 감각에 의존한 방어였다.

차악!

정면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으면 뒤에서 까마귀의 그림자가 첨예한 날을 들이밀었다.

찰나의 순간, 수십 번의 경합.

그 순간순간이 겹치는 동시에 박율의 몸뚱이엔 수십 개의 생채기가 벌어졌다.

허나 어떤 것도 치명적이진 않았다.

오직 본능만이 실낱같은 그의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후우...!”

날카로운 검신이 살가죽을 베어 가르고, 차가운 검날이 떨어지는 핏방울 마저 베어갈랐다.

고통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그저 버틸 뿐.

호흡을 내뱉는 순간마저도 목숨을 위협한다.

박율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참은 채 오로지 방어에 집중했다.

아직은 아니다.

까마귀의 표정은 섬뜩하리만큼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리도 나를 즐겁게 하는 구나!!!”

“빨리 끝낸다.”

“닥치거라. 이렇게 맛있는 만찬을 어찌 그냥 넘어가란 말이더냐?”

박율과 검을 나누는 도중에도 까마귀의 목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식은 까마귀의 것일지 몰라도, 움직임은 안드라스의 것이었다.

그의 움직임엔 점점 더 안드라스의 입김이 번져갔다.

격렬하게 흥분하며 환희를 즐기고 있었다.

까마귀의 몸에서 안드라스의 마기가 날뛰는 중이었다.

이 순간 그는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목숨을 태우고 있었다.

까마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

“더...더...더 나를 즐겁게 해보란 말이다!!!”

“멈춰라.”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까마귀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박율이 기다리는 기회는 더욱 빨리 다가온다.

“조금만...”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데판의 소리가 들려온다.

허나 그의 접근은 불가능했다.

까마귀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분신은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즐거운 순간에 다른 이가 끼어들어선 안되지.”

환락에 차오른 안드라스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황홀경에 젖으면 젖을수록 까마귀의 움직임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그 순간 데판의 마기를 넘어 박석훈이 달려들었다.

허나.

차악!

까마귀의 검은 박석훈의 가슴팍을 크게 베어냈다.

그리고 쾅!!!

까마귀의 나머지 주먹은 그를 바닥에 처박았다.

아주 잠시, 벌레의 날갯짓이 끝나는 그 찰나의 순간, 까마귀의 방심은 박율에게 있어 작은 기회를 만들어냈다.

박율은 그동안 참아왔던 날숨을 아주 천천히 뱉어내며 몸을 웅크려 까마귀의 하단을 노렸다.

그의 호흡을 타고 검날이 바람을 베어가른다.

검날에 맺힌 검붉은 핏방울, 그것은 까마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대로 까마귀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지금 박율의 상태로는 한 번의 치명타가 전부였다.

이제는 최악이자 최선의 선택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까마귀가 반사적으로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키는 순간, 박율은 까마귀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푹!

두꺼운 고기를 꿰뚫는 축축한 소리가 들려온 것 역시 같은 순간이었다.

박율은 제 복부를 꿰뚫은 일본도를 보았다.

“잡았다...”

박율의 손은 까마귀의 멱을 잡은 후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까마귀를 본다.

까마귀는 일순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을 보는 박율의 얼굴엔 섬뜩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제 몸을 희생해 까마귀에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 순간을 말이다.

[흡수]

박율의 왼손에 응축된 마기가 까마귀의 멱을 타고 그의 몸에 침투한다.

까마귀는 제 몸속에 침투하는 괴상한 고양감에 박율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광!!!

고작 손으로 내치는 것만으로 박율은 바닥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며 바닥을 튕겼다.

말 그대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두뇌의 전두엽부터 후두부까지를 장악을 했다.

“허...허억...허억...”

숨을 쉬는 것만으로 아찔한 고통이 스며들었다.

“무슨 짓을 한것이냐...”

저 멀리에서 안드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온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마른 뼈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커헉...!!!”

함께 고통에 젖은 기침을 내뱉기도 했다.

박율은 파도처럼 범람하는 고통 속에서 주먹을 꽉 쥔 채 까마귀를 보았다.

성공한걸까?

확실한 건 까마귀의 안에 자그마한 균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안정되었던 두 마기 사이에 또다시 폭풍이 일 듯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박율은 흘깃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곳에 부두술사 칼림의 사체가 떨어져 있었다.

까마귀의 마기가 요동치는 틈에 아직 흡수하지 못한 군단장의 마기를 흡수해야 했다.

기왕이면 칼림이 아닌 다른 군단장의 것을 흡수하고 싶었지만, 다른 이들은 너무 멀리 떨어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군단장들은 이후 플라우로스를 상대할 때 필요한 회복약들이었으나 지금은 찬물 뜨거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박율은 일단 칼림에게서 추출과 흡수를 시도했다.

복부에 크게 벌어진 상처는 수복되지 않았다만, 온몸에 비늘처럼 생겨난 상처들은 회복되었다.

그래도 군단장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간 쌓여온 피로들이 상당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후...”

박율은 호흡을 고르며 까마귀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충돌하는 마기에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까마귀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범람하는 마기에 스스로 자멸할 것은 자명했다.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마기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허나 그때까지 버틸 수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나마 칼림을 흡수한 덕에 상태가 회복되기는 했다만,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박율은 주머니에 있던 구슬에서 붕대를 꺼내 복부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크흑...!!!”

이런 끔찍한 고통은 남산타워 이후 오랜만이었다.

“후우...후우...”

할 수 있다.

까마귀는 고통이 내비치는 신음을 내뱉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을 박율에게 고정했다.

충돌하는 마기에 자멸하기 전에 박율을 끝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라진다.

쾅!!!

소리가 들려온 건 박율이 몸뚱이가 수어차례 바닥을 튕기고 난 뒤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까마귀의 검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차악!

얼마나 빠른지 박율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나서야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박율은 다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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