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툭.
백봉기는 사람 모양의 항아리에 피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핏방울은 바닥에 부딪히더니 수증기처럼 기화하여 항아리 바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백봉기의 시선은 옆으로 향했다.
여전히 잠긴 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작은 아이.
백봉기는 기우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조금 따끔할거야.”
백봉기는 아이의 손을 가져오더니 뼛조각을 하나 꺼내 아주 약하게 손가락을 찔렀다.
그러자 또르르 하고 손가락에서 작은 핏방울이 생겨났다.
검은 안개는 섬뜩한 미소를 지은 채 백봉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후...”
백봉기는 아이의 손가락을 천천히 사람 모양의 항아리로 가져갔다.
[이제 네가 그렇게 소망하던 것이 이뤄질 때가 온 거야.]
검은 안개는 말했다.
멈칫.
하지만 백봉기는 아이의 손은 항아리에 채 가져가기 전에 멈춰섰다.
[왜 멈추는 거지?]
“...”
[아이를 살리기 싫은 건가?]
“정말...”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행하려는 이 일 무엇인지.
그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될 금기의 무언가라는 것을, 그리고 이 일이 일으키게 될 그 무언가 역시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까지와서 멈출 순 없었다.
[여기까지와서 번복을 할 생각인가?]
검은 안개는 말했다.
하지만 그는 백봉기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비소를 머금은 목소리였다.
[알고 있겠지만, 이대로 멈춘다면 아이는 죽는다.]
“...”
[이미 아이의 몸에 들어찬 마기는 저 작은 체구로 버틸 수 있을 수준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말이지.]
검은 안개의 목소리는 사뭇 웃음을 참는 듯 억누른 듯했다.
백봉기의 주먹이 떨렸다.
그리고 처음 목소리를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과연 정답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정답이었을까.
아니라면 다른 기회를 위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정답이 무엇이든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미 그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검은 안개가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염원을 떠올려봐.]
“내 염원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과연 이 행동이 기우를 살릴 수 있을지, 만약 살아났다면 그가 아는 기우가 될지, 모든 것이 장담할 수 없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까지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백봉기는 착잡한 눈으로 기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드라운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아른거렸다.
백봉기는 아이의 볼에 손을 가져가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를 쓰다듬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기우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거다.”
그리고 그는 아이의 손을 항아리에 가져갔다.
아이의 검지를 타고 핏방울이 굴러내려간다.
절박하게 매달린 핏방울이 결국 손가락에서 떨어진다.
아이의 핏방울이 중력의 힘을 받아 추락한다.
하염없이 추락하는 핏방울은 항아리 바닥에 깔린 안개에 스며들어 사라진다.
그리고 안개의 수위는 점차 차올라 항아리를 가득 채웠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
검은 안개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터벅터벅 걸어가 항아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안개는 항아리 속 안개와 같은 형태로 항아리에 물처럼 고였다.
백봉기는 항아리를 들었다.
이제 이것을 아이에게 먹이면 된다.
백봉기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기우야...”
터벅.
기우를 향해 한 걸음 내딛자 항아리의 안개가 조금 흘러넘쳤다.
검은 안개의 목소리가 들린다.
얼른 일을 마무리하라는 종용이 느껴졌다.
손이 떨린다.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일이었다.
“이제 만날 수 있어...”
만날 수 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백봉기는 항아리의 안개를 기우의 입 쪽으로 기울였다.
항아리에서 흘러나온 안개는 아이의 입가에 떨어졌다.
그리고 항아리의 안개가 모두 아이에게로 스며들었다.
“기...우야...”
심장이 말을 듣질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온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백봉기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이는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꿈틀.
“...!!!”
백봉기는 아이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 항아리를 내팽겨치고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우야...!”
아이의 메마른 입이 벌어진다.
백봉기의 목젖이 일렁거렸다.
아이의 눈꺼풀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아빠...?”
아이가 말했다.
조그맣게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여년 만에 듣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간드러웠다.
백봉기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백봉기는 하염없이 떨리는 손으로 기우의 볼을 매만졌다.
기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봉기의 얼굴을 보았다.
“아빠 울어?”
“아니, 안 울어... 아빠 안 울어...”
백봉기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아이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담겨있는 것만 같은 아이의 선명한 동공에 백봉기의 눈에서 뜨거운 감정이 흘러내렸다.
슬픔이 눈물이 되어, 분노가 눈물에 저며 들고, 즐거움이 아이의 두 눈을 따라 기쁨이 되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봉기를 보고 있었지만, 그 얼굴마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잘 잤어...?”
백봉기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 나 꿈꿨다?”
“꿈...?”
“응! 아빠랑 같이 바다에 놀러 가는 꿈이었어. 근데 엄청 무거워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
“그랬어...?”
“그래도 아빠랑 같이 바다 볼 수 있어서 좋았어!”
기우는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마저 백봉기에게는 아픔이었다.
아이의 볼을 매만지던 백봉기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빠가 미안해... 너무... 너무...”
“아빠 울지마.”
“이제는 아프지 않게...”
그 순간이었다.
아이의 몸에서 마기가 폭발할 듯 차오른 건 말이다.
“기...기우야...?”
아이는 발작이나 하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기우야...!!!”
백봉기는 어떻게든 아이를 진정시키려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아이의 발작은 더욱 거세졌다.
마치 마기는 아이의 몸을 터트릴 듯 치솟았다.
“안돼...!!! 제발!!!”
백봉기는 아이를 잡고는 폭주하는 마기를 흡수했다.
그것 말고는 아이를 살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크흑...”
마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마기마저 흡수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백봉기는 버텼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그만...!!!”
온몸이 폭발할 듯 찌릿한 고통이 울려 퍼졌다.
아이의 붙잡은 팔뚝에 도드라진 핏대가 터진 듯 팔목이 붉게 물들었다.
백봉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마기를 흡수했다.
그리고 겨우 아이의 마기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허...허억...”
눈앞이 아득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땀방울이 온몸을 적신 상태였다.
다행히 기우 역시 진정을 되찾고 편안한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기우야...”
백봉기는 숨을 고르며 기우를 흔들었다.
그러다 번쩍.
아이의 눈이 뜨였다.
* * *
고통이 느껴지기도 전에 박율은 바닥을 뒹굴었다.
“크헉...!!!”
바닥에 처박히고 나서야 박율은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권능을 쓸 타이밍조차 잡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만신창이가 된 맨몸으로 저런 공격까지 받으니 정말 죽겠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박율은 힘겹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서 까마귀는 여전히 상충하는 마기에 온몸을 비틀며 서 있었다.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온몸을 꺾어댔다.
그리고 사라졌다.
쾅!!!
소리가 난 곳은 박석훈이 날아간 땅바닥 언저리였다.
그리고 쾅!!!
데판 역시 눈 깜짝할 사이 바닥을 뒹굴었다.
손 쓸 틈이 없다.
“그만.”
까마귀는 말했다.
이번엔 까마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의 살기 어린 시선이 박율을 향했다.
“마음에 드는데.”
또 다시 달려든다.
박율은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기 직전 재빨리 권능을 개방했다.
[실타래]
[경화]
그리고 타격을 기다렸다.
막을 방법은 없었다.
위력을 상쇄시키는 것만이 오로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쾅!!!
역시나 이번에도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그의 몸뚱이가 날아갔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척후로도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가능한 최선의 방어를 펼쳤음에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은 여전했다.
“하아...하아...”
숨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허나 박율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달려온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도 유일하게 다행인 점을 하나 꼽자면, 까마귀와 안드라스의 마기가 끊임없이 상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벌써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율은 코어에 몸을 맡기고 다시 일어났다.
온몸을 꺾어대는 까마귀를 보면 저쪽이 좀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사실상 좀비는 박율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 상태라면 끽해야 두 번 정도.
그 이상은 정말 죽음이다.
박율은 눈동자를 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까마귀의 상태로 보아 계속 저렇게 폭주를 한다면 가만히 놔두어도 알아서 사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가 없다.
“씨...”
방법이 있기나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가능성이었던 세계수의 잎사귀마저 전부 소모한 상태였다.
게다가 박석훈과 데판 역시 임계점에 다다른 듯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박율의 시선은 다시 까마귀를 향했다.
그는 여전히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만.”
“닥쳐.”
“이대로면 우리는 죽는다.”
“상관없어. 이렇게 짜릿한데.”
까마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두 개의 목소리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날뛰고 있었다.
마기는 더욱 증폭되었고, 안드라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격앙되었다.
폭주하는 마기에 이성을 잃은 듯한 모양이었다.
“미친것들...”
여태껏 본 광경중에 가장 기괴한 무언가였다.
“씨...”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
그러다 번뜩 박율의 뇌리에 하나의 가능성이 스쳐지나갔다.
지금 까마귀와 안드라스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상충하는 두 마기 때문이었다.
박율의 시선이 그의 왼쪽 팔을 향했다.
그의 왼팔엔 온갖 악마들에게서 흡수한 마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시선은 까마귀를 향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다른 마기를 주입한다면?
세 개의 마기가 상충을 할 테고, 그것은 곧 자멸로 이어지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이었다.
최악의 수로 그의 마기로 인해 까마귀가 더욱 강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더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놔둔다면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모든 이들의 죽음.
허나 하나의 가능성엔 죽음이 없었다.
박율은 무거운 날숨을 뱉었다.
“그래, 끝까지 인생은 도박이지.”
피날레를 장식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