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꿀럭.
박율의 목을 움켜쥔 안드라스의 아구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큭...]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목도하는 죽음이라는 무언가.
그의 떨리는 두 손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두 눈이 그것을 발하고 있었다.
안드라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아주 잠시 혼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율 씨!!!”
저 멀리에서 그의 심장을 터트린 남자와 악마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안드라스는 염화를 일으켜 그들의 진로를 막았다.
“어딜 보냐...?”
박율이 말했다.
그리고는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인간을 얕본 악마의 최후다. 이 개자식아.”
박율의 두 손 위 문양이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개구리와 고양이의 문양이 두 손에 그려지고, 박율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생겨나는 작은 방울들.
박율은 재빨리 실가닥을 뽑아 고치를 만들 듯 제 몸에 실가닥을 에워쌌다.
그리고 펑!!!
방울 하나가 터지면 연달아 방울들이 폭발을 시작했다.
박율은 실가닥에 몸을 의지한채 충격에 날아갔다.
콰당탕!
[큭...!!!]
안드라스의 고통 섞인 신음이 들려왔다.
“하아...하아...”
박율은 제 몸을 감싼 실가닥을 뜯어 헤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 씨!!! 괜찮아요!?”
그를 본 박석훈과 데판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갔다.
박석훈은 비틀 넘어지려는 박율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요.”
하지만 박율은 괜찮다며 그들을 떼어놓을 뿐이었다.
[내가...]
안드라스는 고개를 숙여 떨리는 두 손을 보았다.
죽음의 향기가 콧잔등을 간지럽힌다.
수천 년을 살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공포, 그리고 절망.
이것은 즐거움과는 한층 다른 감정이었다.
안드라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박율을 보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넝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그가 두려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없을 공포가 느껴졌다.
[...이건 불가능하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다니.
마계대전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고작 일개 인간의 앞에서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평범하지 않았다.
타 마왕들마저 알지 못하는 심장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수천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
안드라스는 두 손을 내렸다.
그리고 제 몸을 감싼 마기를 폭발시켰다.
[...그래, 네 놈을 죽여야 이 더러운 느낌을 지울 수 있을 것 같군.]
죽이지 못할 리 없다.
저런 존재에게서 공포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찰나의 감정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불쾌한 감정을 자아내는 저 녀석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안드라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화아!
마기로 이루어진 마기가 안드라스의 다리를 대체했다.
빨리 끝내야 한다.
“이제 뒤질 거 같으니까 조금 무섭냐?”
박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안드라스는 이를 빠득 갈았다.
“막 떨리고 그러지?”
[닥치거라.]
“넌 뒤졌어.”
박율은 달렸다.
그리고 그를 따라 데판과 박석훈이 뒤따랐다.
그에 맞춰 안드라스 역시 달렸다.
그리고 쾅!!!
염화의 검과 박율의 망치가 맞부딪힌다.
박율의 망치가 안드라스를 이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허나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격의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율이 안드라스를 압도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캉!!!
두 개의 검이 맞부딪히며 하얀 불꽃에 바래진 염화가 흩날렸다.
안드라스는 남은 한 팔을 크게 휘둘러 박율을 반대편으로 날렸다.
콰광!
날아간 박율이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달려드는 데판과 박석훈.
안드라스는 발을 굴러 박석훈의 철퇴를 피하고, 거의 동시에 날아드는 데판의 주먹을 막았다.
차악!
염화의 검이 박석훈의 가슴팍에 커다란 자상을 남긴다.
그리고는 안드라스는 잡은 데판의 손을 그대로 던짐과 동시에 박석훈을 걷어찼다.
콰당탕!
마음같아서는 쓸데없이 거슬리는 두 놈을 염화에 불태워 죽이고 싶었지만, 심장이 죄다 터진 탓에 힘이 부족해 어느새 두 사람을 옭아매던 염화는 사그라진 뒤였다.
“후...”
그러는 사이에 박율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다시 일어난 채였다.
당장 피를 쏟아내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지만, 그는 악착같이 일어나 버텼다.
이 정도쯤이야 수십 번은 더 굴렀던 박율이었다.
수십 번이 뭐야, 수백 수천 번을 굴렀었다.
우스갯소리로 온몸이 도륙나지 않는 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냐는 그의 신념이었다.
[이 바퀴벌레 같은...!!!]
“아직도 재밌냐?”
박율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안드라스의 패기는 상당히 옅어진 상태였다.
[...닥치거라.]
달려든 안드라스의 검이 박율을 내려찍는다.
하지만 검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쾅!!!
박율의 망치가 그의 검을 막았다.
차악!
그리고 되려 박율의 검이 그의 복부를 베었다.
[큭...]
시큰했다.
복부를 가로로 베어놓은 감각은 말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검이 만든 자상에서 새하얀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 끝내자.”
[건방진...]
박율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안드라스 역시 그에 대응해 땅을 박찼다.
캉!!!
박율의 망치와 안드라스의 검이 또 한 번 부딪혔다.
황금빛 불꽃과 검은 염화가 반짝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궁금하지?”
[닥치거라!!!]
안드라스의 남은 손에서 염화가 타오른다.
이윽고 그 염화는 땅을 기어 박율의 발을 탐했다.
박율은 재빨리 땅을 박차고 그의 반대편으로 뛰었다.
그리고 코어를 휘두른다.
캉!
안드라스는 반사적으로 염화의 검을 반대로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이길 수 밖에 없는 상대였다.
수천 년을 살아온 안드라스의 전투감각과 연륜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불가능을 가능케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었다.
[너는 도대체...]
박율의 검이 안드라스의 눈을 향해 날아왔다.
안드라스는 고개를 비틀어 검을 피했다.
형편없다.
그것말고는 그의 실력을 평가하기에 적절한 말은 없었다.
쾅!!!
안드라스의 주먹이 박율을 후려친다.
날아간 박율은 서너차례 바닥을 튕기고는 다시 일어났다.
[죽지도 않는구나.]
“왜 쫄았냐?”
박율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안드라스의 턱이 분노에 잠겨 일렁거렸다.
그의 시선은 박율을 거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악마 하나와 남자를 지나쳤다.
도망칠 활로조차 없다.
[허...]
도망을 친다는 생각을 하다니.
안드라스는 자신의 상황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어떻게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궁금하지?”
박율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난 이미 너를 죽여본 적이 있거든.”
그리고 달려든다.
세 방향에서 달려드는 살기들.
안드라스는 가장 가까이에서 달려오는 악마 쪽으로 염화의 검을 휘둘렀다.
차악!
[커헉...!]
검을 지나간 자리에 남은 염화는 악마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쾅!!!
안드라스의 주먹은 악마의 허파를 직격하고 그를 날렸다.
그리고 박율.
그는 잠시 안드라스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안드라스의 하반신을 노렸다.
콰직!
그의 망치가 안드라스의 남아있던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찍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커다란 철퇴.
피하고 싶어도 박율의 일격으로 움직임이 제한된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콰과광!!!
날아든 철퇴는 안드라스를 분쇄라도 할 듯 쇄도했다.
[큭...!!!]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치명적이진 않았다.
안드라스는 강하게 주먹을 휘둘러 철퇴를 흘리고는 정면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박율의 복부에 염화의 검을 휘둘렀다.
차악!
“커헉...!!!”
검의 궤적을 따라 벌어지는 균열에서 검붉은 핏방울과 염화가 비산했다.
박율은 고통에 신음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것은 안드라스에게 다음 공격을 허락하게 만들었다.
콰앙!!!
안드라스의 주먹이 박율의 턱을 후려치자, 박율의 몸뚱이는 그대로 하늘 위로 떠올라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엔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박율은 가슴에서부터 온몸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염화에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다.
확실히 치명상이었다.
이제는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도 죽는다.
먼저 바닥에 처박혀 있던 악마 역시 이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거릴 뿐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철퇴를 든 남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마냥 무사하진 못했다.
온몸은 이미 만신창이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쳐 비틀거리고 있었다.
끝이었다.
나름 고전을 했다만, 이제 저들은 알아서 죽게 될 터였다.
안드라스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본 즐거움과 생전 처음 느껴본 공포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기시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안드라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폈다.
이제 그의 목숨을 위협할 존재는 남아있지 않았다.
[무어냐...]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어디선가 무언가 그의 목숨을 탐하고 있는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박율을 향했다.
[아직 죽지 않아서 그런 것이냐.]
저 존재가 아직 바퀴벌레마냥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인걸까.
하지만 마왕이라는 존재가 일개 인간에게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이곳엔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가 남아있다는 것인가.
[아니라면 네 존재만으로 나를 이렇게 만든다는 것이냐?]
그게 어느 쪽이든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안드라스는 박율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떻게든 이 불쾌감을 지우고 싶었다.
터벅.
박율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감정은 격앙되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터벅.
박율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역시나 그대로였다.
안드라스는 염화의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죽어라.]
그 순간이었다.
또 다른 마기가 접근하기 시작한 건.
아주 찰나의 순간, 안드라스의 시선이 마기를 쫓아 뒤로 움직였다.
“어딜 봐.”
박율이 말했다.
안드라스의 시선이 다시 박율에게로 닿기도 전에 박율은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쥔 무언가를 안드라스의 입에 집어넣었다.
쓴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동시에 정면에서 내게 손을 뻗고 있는 박율이 멀어졌다.
[...!?]
시야가 아득해지며, 세상이 길게 뻗었다가 축소하기를 반복했다.
두 눈을 뜨고 지켜보는 것만으로 온몸의 내장이 울컥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안드라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겨우 눈을 떴을 때.
그곳엔 세 방향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