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번쩍.
창밖으로 세계를 밝히는 섬광이 터졌다.
함께 허공을 꿰찬 심연의 골짜기에서 악마들이 쏟아져나왔다.
병상의 아이를 보던 백봉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봉기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존재 역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온 모양이군.]
검은 안개의 무언가는 어느새 사람의 형체로, 백봉기의 옆으로 다가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목소리였지만, 백봉기는 개의치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
이 순간을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오로지 아이의 목소리를, 아이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길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다.
백봉기는 무거운 숨을 뱉으며 주먹을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제 거의 다 왔어.]
검고 희끄무리한 존재는 백봉기를 지나쳐 창가로 움직였다.
뚜렷한 형체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저 존재는 창 너머 아득한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 너머를 지켜보던 검은 안개의 형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예상대로군. 저 머저리 같은 것.]
“...”
[저 머저리는 이곳에 총력을 집중시켰어.]
검은 안개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우습다는 듯 비소를 한껏 품은 채였다.
[박율이라는 녀석 때문이겠지.]
백봉기는 박율이라는 말에 흠칫 고개를 떨었다.
터벅.
검은 안개는 발을 돌려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뤄줄 동아줄이지.]
검은 안개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겉으로 티는 안내지만 실실 웃는 모습이 듣는 것만으로 불쾌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백봉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뭐, 안드라스가 망나니 같은 놈이라 전황이 어찌 되든 재미만 있으면 좋아하는 놈이라서 말이야. 군단장들과 마인들을 여기에 집중시켰지 뭐야.]
”그거 말고.“
[아.]
백봉기의 물음에 검은 안개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반달 모양으로 입을 쩌억 벌려 섬뜩한 웃음을 보였다.
[네가 알 필요 없는 문제야.]
그리고는 사라졌다.
흠칫.
백봉기는 섬짓하게 다가오는 마기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안개가 어느새 기우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놓여있던 사람 형상의 항아리를 들었다.
[이제 시작하지. 네가 그리 원하던 소망을 이룰 시간이야.]
* * *
박율은 호흡을 고르며 힘을 조절했다.
철퇴 같은 크기로 변한 망치가 다시 원형을 되찾았다.
안드라스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
그의 몸에 숨겨진 세 개의 심장을 터트려야 한다.
단전에 하나, 왼쪽 다리에 하나, 그리고 가슴팍에 하나.
본래의 역사에서 그의 약점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자들이 희생되었는지 셀 수 조차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을 위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첫 번째 목표는 안드라스의 가장 큰 약점인 단전이었다.
마기의 중추가 되고 있을 심장을 먼저 노린다.
단전의 심장을 먼저 없앤다면 그의 위력을 절반은 없앨 수 있을 터였다.
[신속]
허공을 주파하는 박율의 몸은 눈으로 쫓을 수 없이 빨랐다.
하지만 안드라스의 시선은 여전히 박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를 온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듯 말이다.
”...!“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확실히 안드라스는 박율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도 거만한 자세로 그를 기다렸다.
어서 한 방 먹이라는 얼굴이었다.
역시 괜히 마왕이 아니라는 건가.
그와 박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얼른 즐겁게 만들라는 종용이 느껴졌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 없는 박율이었다.
허나 더 좋은 기회를 노려야 한다.
그가 지금 방심을 하고 있다지만, 더욱 방심할 틈을 말이다.
아무리 그가 방심을 한다 하더라도 단전의 심장에 일격을 날린다면 반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죽으려는 것과 다름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더 좋은 기회를 노려야 한다.
순식간에 달려간 박율이 안드라스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쾅!!!
익히 듣던 소리가 울리진 않았다.
나름 어느 정도 힘을 응축한 상태이기에 울리는 소리였다.
[흠...]
안드라스의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
박율이 내려친 망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심히 불쾌한 얼굴이었다.
[고작 이게 끝이냐? 불쾌해질 정도로 형편이 없는데.]
불쾌보다는 실망이 맞는 듯 싶었다.
기왕이면 완전히 그를 날려주기를 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박율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조금 더 그를 가소롭게 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뒤이어 데판과 박석훈 역시 날아들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럼 내 차롄가?]
안드라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벌어진 틈새가 닫히기도 전에 그는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일 만큼 빨리 움직였다.
마기를 쫓아 고개를 돌려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쾅!!! 허파를 가격하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이 온몸에 퍼지기도 전에 박율의 몸뚱이는 땅바닥에 처박혔다.
폐가 충격에 찌그러진 듯 숨이 턱하고 막혔다.
쾅!!!
뒤이어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
안드라스의 신형이 아주 잠깐 나타나는 동안 데판과 박석훈의 몸뚱이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작 찰나였다.
서 있던 이들이 넘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말이다.
그의 움직임은 어떤 수로도 읽을 수 없었다.
척후는 제 능력을 잃은 듯 안드라스를 보지 못했다.
다시 박율의 앞으로 나타난 안드라스는 잔뜩 불쾌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히더니 박율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큭...!“
[아까처럼 날 즐겁게 해보란 말이다.]
아주 살짝 목에 힘을 준 목소리였다.
허나 그 파동은 바다 위에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이 울려퍼졌다.
박율은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개수작을 부리려나본데.]
그의 손이 올라갔다.
[말했던 것 같다만, 나를 한 번 실망시켰으니.]
화아!!!
그의 손이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불꽃이 비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쓰러진 박석훈이었다.
그의 몸을 주박하고 있던 불꽃이 그를 삼키고 있었다.
”이게...!!!“
”...!“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안드라스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손을 거두었다.
박석훈과 연결된 불꽃은 다시 안드라스에게로 돌아왔지만, 박석훈에게 붙은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아악!!!“
박석훈의 비명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박율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망치는 허공을 부유할 뿐이었다.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제야 할 마음이 조금 들었는가?]
안드라스는 섬뜩한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박율은 계속해서 무기를 휘둘렀다.
그 무엇 하나 안드라스에게 닿지 않았지만 말이다.
안드라스는 아주 잠시 눈썹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변함없는 모습에 다시 실망한 듯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로 데판이 달려들었지만, 안드라스는 고작 손을 살짝 휘두르는 것으로 그를 반대편까지 날려 보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기를 수십 번.
그러면서도 그는 박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발악이라도 하란 말이다.]
안드라스는 비소를 품었다.
확실한 건 그는 당장에라도 박율과 그의 일행들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있었다.
순전히 재미 때문이었다.
저 표정을 말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 같다고나 할까.
하여튼 쓸데없이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양상에 안드라스는 또 다시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실망스러운...]
안드라스가 두 번째 불꽃을 피우려는 순간이었다.
아주 찰나 보인 빈틈으로 박율은 재빨리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콰직!
망치가 안드라스의 턱을 가격했다.
[...]
다행히 안드라스의 손에서 생겨나던 마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박율을 향했다.
불쾌와 호기심,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얼굴이었다.
새로운 것은 좋으나 감히 날 공격하다니 하는 말도 안되는 표정이랄까.
[나쁘지 않아.]
안드라스가 사라졌다.
[경화]
그리고 바람이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안드라스의 발이 박율을 걷어찼다.
쾅!!!
쿠당탕!
날아간 박율의 몸뚱이가 결계의 근처까지 날아갔다.
”큭...!!!“
말 그대로 죽을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고작 발길질 한 번에 이정도라니.
찰나의 순간, 경화를 쓰지 않았다면 죽었을 성 싶었다.
게다가 하마터면 결계에 닿을 뻔했다.
박율의 코 앞에 있는 결계는 지옥불이라는 염화였다.
닿으면 죽는다.
박율은 힘겹게 일어나 불길을 피했다.
[다시 나를 재밌게 해보거라.]
안드라스가 자세를 잡았다.
싸움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박율 역시 무거운 날숨과 함께 달려갈 준비를 했다.
그의 눈에 비춘 박율은 이제 하룻강아지에서 파충류 정도로 격하되었을 것이다.
눈빛이 사뭇 달라졌음이 느껴졌다.
이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젠 한방이 필요했다.
한방을 위해선 완벽한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박율은 청동거울을 꺼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비추어 분신을 만들어냈다.
만들어진 분신은 박율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호오.]
안드라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든 해보아라.]
[신속]
박율은 달려들었다.
함께 그와 똑같은 분신이 달려들었다.
두 명의 박율이 결계 안쪽을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안드라스의 시선은 두 박율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누가 박율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자신을 재밌게 만들 수 있느냐가 큰 관건이었다.
박율은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뛰어다니면서 안드라스를 보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한방을 만들어야 했다.
허나 아직 그의 힘은 충분치 않았다.
힘을 집중시키면 망치의 크기가 불어났고, 그 위력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박율은 그의 몸보다 곱절은 더 커진 망치를 압축시켰다.
압축시키고 또 압축시켰다.
망치의 크기는 계속해서 줄어들었지만, 그 힘의 위력은 더더욱 강해졌다.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 어깨가 뽑혀 나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직 부족했다.
마왕의 살갗을 꿰뚫기 위한 일격을 위해서 왼손의 마기마저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화마가 오른팔을 집어삼킨 듯 형용할 수 없는 화기가 느껴졌다.
생살을 태운다는 느낌이 무어라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확실한 건 오른팔의 세포 분자 하나하나 태우는 것만 같은 이 고통보다는 적을 터였다.
”큭...“
안드라스가 코앞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사뭇 달라졌다.
기껏 해야 하룻강아지가 칭얼대는 것 정도로 생각한 박율에게서 압도적인 격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오른팔에서 지금껏 마주하지 못했던 격이 느껴지고 있었다.
안드라스는 반사적으로 방어기제를 발동시켰다.
허나 이미 박율은 그의 정면에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피할 수 없다.
“그래, 재밌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