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캉!!!
박율의 검이 까마귀를 압도했다.
쇳소리가 울릴 때마다 까마귀의 발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큭...”
그의 움직임에 작은 허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마치 몸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찬 듯 그의 움직임이 무겁다는 게 느껴졌다.
캉!!!
짧은 시간 박율이 성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성장보다는 까마귀의 부진 쪽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박율이 까마귀를 압도할 실력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친 가능성 하나.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스페인에서 문제가 생겼나봐.”
“...”
그의 말에 까마귀의 움직임이 흠칫 제동이 걸렸다.
박율은 기세를 몰아 더욱 악착같이 검과 망치를 휘둘렀다.
혹시나해서 내뱉었던 말에 찔리기라도 한 듯 까마귀는 검을 휘두르는 간극의 밀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박율이 우세했다.
까마귀는 발버둥치고 있었다.
차악!
까마귀가 방어 이후 짧은 간극이 생긴 틈을 타 박율의 검이 까마귀의 어깨를 베었다.
검날을 타고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까마귀는 또 다시 박율과 거리를 벌렸다.
“진짜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박율이 본 까마귀는 붕괴하는 건물에 깔리는 모습이었으니까.
그곳에서 무사히 탈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지금 까마귀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박율은 다시 까마귀를 살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쉴 틈을 주어선 안 된다.
박율은 그가 짧은 시간이라도 휴식을 갖지 못하도록 곧바로 발을 굴렀다.
캉!!!
“죽고 싶어서 온 거냐?”
“...”
까마귀는 말이 없었다.
대답 대신 검을 박율의 목에 겨눌 뿐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갈망하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검을 휘두를 뿐이다.
차악!
또 다시 박율의 검이 까마귀의 몸에 자상을 남겼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까마귀의 몸은 피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편치 못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너 뭐냐?”
한창 까마귀를 공격하던 박율이 문득 물었다.
너무나 이상했다.
그가 아는 까마귀라면 이럴 리가 없다.
몸에 문제가 생겨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더라도 그 전투 감각은 사라지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검을 나누면 나눌수록 느껴지는 것은 까마귀의 움직임에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죽기 위해 몸을 던진다는 느낌이 강했다.
“잔말 말고 덤벼라.”
까마귀는 일본도를 높이 들며 답했다.
그리고는 그림자를 타고 박율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캉!!!
박율의 심장을 향해 쇄도하던 검날이 망치에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까마귀는 박율의 반격이 채 들어오기 전에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박율의 뒤를 노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박율의 망치에 막힐 뿐이었다.
박율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까마귀의 형상이 그림자로 허공에 흩날리긴 했지만, 검 끝에 묵직한 감촉은 남아있었다.
저 멀리서 다시 나타나는 까마귀는 역시나 가슴 쪽에 생겨난 상처를 쥐고 있던 채였다.
그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이제는 척후를 쓰지 않아도 보일 정도였다.
“...”
이제 한방이면 까마귀를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랄까.
피투성이의 까마귀를 눈 앞에 두고서 박율은 눈동자를 굴렸다.
뭐가 문제인 걸까.
확실한 것 하나는 가면 너머 까마귀의 눈빛은 건재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박율이 불리해야 할 것만 같은 너무나 선명한 눈빛이었다.
“계속 보고만 있을 건가?”
까마귀가 말했다.
그는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달려온다.
그의 움직임에 커다란 빈틈이 보였다.
하지만 맞서지 않으면 박율이 위험할 법한 움직임이었다.
목숨을 대가로 목숨을 노린다.
다른 이가 본다면 필히 미쳤으리라 외쳤을 터.
박율은 달려오는 까마귀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까마귀가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저 공격을 받는다면 박율이 위험하다.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이 아니라면, 까마귀를 죽일 수 있을 기회를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심장을 쿡쿡 찌르는 불편한 기시감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달려오는 까마귀를 향해.
그의 공격을 받아준다.
까마귀의 신형이 박율과 겹치는 순간, 박율은 검으로 까마귀의 일본도를 흘렸다.
검등을 타고 갈피를 잃는 일본도를 내려치고는, 박율은 망치를 위로 휘둘렀다.
콰직!
망치가 닿은 부위에서 핏물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검을 치켜세워 크게 베어낸다.
차악!
까마귀의 몸뚱이에서 비산하는 핏물과 함께 까마귀의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박율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언제든 후속타를 막을 준비를 했다.
“...”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까마귀의 몸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의 의지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박율은 한참을 자리에 굳어 까마귀를 보았다.
그는 죽었다.
길었던 여정의 끝에서 까마귀의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불편했다.
그 찝찝한 무언가가 무엇일지는 까마귀 말고는 알 수 없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까마귀를 보던 박율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무기를 거두었다.
“도대체 뭐냐, 너?”
죽은 이는 답이 없었다.
그저 꿈틀, 죽음에 저항하는 움직임만 보일 뿐이었다.
“...”
추욱 늘어지는 까마귀를 보며 박율은 알 수 없는 허탈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악사회의 다른 일원들과 싸우는 이들이 보였다.
박율은 심장을 쿡쿡 찌르는 기시감을 뒤로한 채 일행들을 돕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의 일행은 각자 하나의 상대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껏 굴려온 덕에 나름 경험치가 쌓였는지 어찌저찌 적당히 상대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
육중한 덩치를 뽐내며 곰과 힘대결을 하고 있는 데판을 제외하곤 죄다 한끗 차이로 밀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 중 이명석이 특히나 그랬다.
안드라스의 힘을 적당히 잘 활용하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정면에서 파고드는 뱀을 이기긴 무리처럼 보였다.
* * *
이명석은 뱀과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큭...”
징그러운 뱀 한 마리가 그의 팔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명석은 신음을 흘리며 뱀을 잡아 뜯었다.
흑으로 온몸이 점철된 덕에 치명상은 막았다지만, 아직 전투경험이 부족한 그에게 수십 마리의 뱀을 막는 동시에 파고드는 뱀가면을 상대하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이런 놈이 우리랑 같이 할 뻔했다니.”
뱀은 몸을 흐느적대며 살기를 흘렸다.
이명석은 다시 자세를 잡고 마기를 검의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뱀을 향해 달린다.
멀리서 뱀을 던지고 공격을 해대는 뱀을 상대로 근접전 말고는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다다다!
정면에서 또 다시 뱀의 소매를 타고 뱀 떼가 나타난다.
이명석은 정면의 뱀들을 베어가르며 후속타를 피하려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뱀에 근접했을 때.
검을 깊이 찌른다.
“...!!!”
하지만 이명석의 검이 뱀의 가슴팍을 찌른 순간, 검 끝은 허공을 맴돌았다.
뱀의 가슴팍이 수십마리의 뱀으로 변해 일순간 형태를 잃었다.
뱀의 눈은 이명석을 향하고 있었다.
“잡았다.”
그녀의 입이 벌어진다.
마치 공포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입이 양쪽으로 찢어졌다.
이명석은 찰나 느낀 위협에 뒤로 물러서려 하지만, 뱀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하!!!”
뱀의 입에서 뿌연 안개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
쾅!!!
이명석의 몸뚱이를 집어 삼킬 듯 벌어진 뱀의 입이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뱀이 이명석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호흡을 진정시키고 있는 박율이 있었다.
“저거 위험해요.”
박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뱀이 뱉은 뿌연 안개가 뒤덮은 땅바닥은 어느새 돌로 바뀌어 있었다.
“가...감사합니다...”
“빨리 끝냅시다.”
박율은 짧은 인사를 뒤로 날아간 뱀을 보았다.
그녀 역시 그와 마음이 동한 듯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기다란 혀를 내민 채 말이다.
“죽고 싶나 보구나.”
뱀은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리곤 곧바로 발을 굴렀다.
그녀의 온몸에서 꿈틀거리는 뱀들이 박율과 이명석을 향해 아구를 벌렸다.
마치 쏟아지는 폭풍우를 마주하듯 뱀들은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차악!
박율과 이명석이 휘두르는 검에 날아드는 뱀들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뱀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숫자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쏟아지는 뱀들 떼에 두 사람은 뱀들을 피해 발을 굴렀다.
하지만 뱀 가면을 쓴 여자는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이명석이 발을 구르는 방향에 서 있었다.
뱀은 이명석을 향해 뱀 떼를 날렸다.
이명석은 날아드는 뱀들을 베어 가르지만, 수십 마리의 뱀을 한 번에 잡을 순 없었다.
콰직!
날아든 뱀 하나가 그의 팔을 물어뜯었다.
“큭...!”
주춤, 뱀에 물린 이명석이 잠시 중심을 잃은 사이, 뱀이 달려들었다.
마치 그를 집어삼킬 듯 아구를 벌린 뱀은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이명석은 반사적으로 연기를 막기 위해 손을 들어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마기검이 돌처럼 굳었다.
그리고 안개가 이명석마저 집어삼키려 할 때.
콰직!
반대편에서 날아온 망치가 뱀의 머리를 날렸다.
“이게 감히...”
머리를 얻어맞은 뱀은 이를 빠득 갈며 박율을 보았다.
그는 뭘 보냐는 듯 그녀를 도발했다.
그의 행동에 뱀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그리고는 살기를 방출하더니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몸을 감싼 투명한 막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며 이내 그녀의 모습이 커다란 구렁이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까지 변하고 싶진 않았는데,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내 그녀의 몸뚱이는 사람을 벗어나 완전한 뱀의 모습으로 변했다.
백년 묵은 구렁이.
뱀이 제 모습을 버리고 온전히 마기에 잠식되었을 때의 모습.
박율이 기다리던 모습이었다.
구렁이가 달려든다.
박율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려드는 뱀을 향해 발을 굴렀다.
“율 씨!!!”
이명석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뱀에게 먹힌 이후였다.
“...!!!”
“나를 이 모습으로 변하게 만든 네 스스로를 원망해라.”
박율을 집어삼킨 뱀은 온몸을 꿈틀거리며 그의 몸을 소화기관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뱀의 시선이 이명석을 향했다.
흠칫.
이명석은 공포에 절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젠 네 차례다.”
뱀이 다시 커다란 아구를 벌리며 이명석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콰직!
“...?”
푸왁!
돌연 뱀이 피를 토해냈다.
“이...이게...”
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하지만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좀벌레가 내장을 파먹듯 뱀의 몸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울려퍼졌다.
“안돼...”
고통에 발악하던 뱀이 나지막히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