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박율은 날아온 실가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실에 몸을 맡긴 채 박율의 손에서 앗아간 세계수의 잎사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게 둘 순 없지.”
그리고는 보란 듯이 잎사귀를 분쇄했다.
“너무 빠른데...”
벌써 악사회가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생각보다 이르다.
대충 군단장들을 전부 해치울 때쯤 악사회 놈들이 나타날 줄 알았건만.
박율은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딜.”
고양이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재빨리 실가닥을 던졌다.
차악!
이번에도 박율은 손쓸 틈도 없이 손에 쥔 무언가를 빼앗겼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본 고양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저건 자기 물건을 빼앗긴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 기분 나쁜 얼굴이랄까.
“...?”
고양이는 그에게서 빼앗은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둥그스름한 게 익숙한...
이게 폭탄이었나?
“아... 씨...”
펑!!!
“똑같이 당하겠냐. 멍청하긴.”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재빨리 주머니에서 세계수의 잎사귀를 꺼내 입에 집어넣었다.
이내 시야가 아득해지며 고무줄이 늘어났다 줄어들 듯 모든 것들이 형태를 잃었다가 원형을 되찾았다.
“큭...”
역시 반동은 고통스러웠다.
끓어오르는 구역질에 속을 게워내고, 온몸을 울리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잎사귀가 크지 않은 덕에 반동이 그리 강하진 않았다.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박율은 고개를 들어 전황을 파악했다.
대충 상황은 칼림을 죽인 직후인 듯했다.
반으로 동강 난 칼림의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고, 칼림은 원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박율은 일단 망치를 들어 칼림의 머리를 터트렸다.
다음은 이명석이었다.
이번에도 아마 같은 수를 쓰겠지.
박율은 흘깃 안드라스를 보았다.
여전히 늑대의 위에 군림해 있는 그는 칼림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예상치 못한 박율의 선방에 불쾌한 것뿐이었다.
그의 손이 움직인다.
역시나 이명석을 향했다.
“유...율 씨...!”
저 멀리에서 이명석이 소리쳤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벌벌 떨며 무언가에 저항하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꾸물거릴 시간은 없다.
[신속]
권능과 함께 박율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발끝과 손끝에서부터 흑에 야금야금 먹히고 있는 이명석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몸이...마음대로...!”
기절시켜야 할까?
아니다.
마음대로 몸을 조종할 수 있는 듯한 상대에게 그 대상을 기절시키는 것은 완벽한 꼭두각시를 주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다면 움직임을 봉쇄한다.
박율은 재빨리 놋쇠촛대를 꺼냈다.
그리고는 불을 붙인다.
이번엔 덫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이명석의 심장에 촛대를 그대로 내려찍었다.
콰직!
이명석의 가슴에 박힌 촛대에서부터 차오르는 촛농은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놋쇠촛대는 그의 전신을 하나의 촛농으로 뒤덮은 뒤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놋쇠촛대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대상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
대상을 제압하고 난 뒤에는 초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다시 쓸 수 없다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
박율의 뒤로 따끔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 눈길을 보내는 이가 안드라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한 거에요...!?”
박율의 갑작스런 행동에 김진목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역시 이명석 때문일까.
안드라스의 개입이 생각보다 너무 빨라졌다.
박율은 고개를 돌려 허공의 악마를 보았다.
다행히 당장 전투에 끼어들겠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저 표정은 아무리봐도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흠...]
박율을 응시하던 안드라스는 입가를 씰룩이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이것조차 예상을 했다니.]
그리고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달싹거렸다.
저 즐거운 투는 어떤 의미일까.
좋은 징조는 아닌 거 같긴 한데.
“어이!!!”
때마침 저 멀리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뚱이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함정에서 용케도 탈출했나봐.”
“저 이씨...”
장화연은 당장에라도 박율을 찢어 죽이겠다는 결연한 얼굴이 돋보였다.
“오랜만이다?”
“그리 반갑진 않은데...”
“내가 말했지? 다음에 만나면 죽인다고.”
“그 말도 몇 번 들은 거 같은데.”
“그 입부터 찢어줄게.”
차악!
순간 장화연의 너머에서 얇은 실조각이 날아왔다.
박율은 재빨리 망치를 꺼내 들어 실가닥을 내려쳤다.
“...!”
“아깝다.”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가 말했다.
“야, 저놈 내꺼라고.”
“누구 맘대로?”
고양이와 장화연이 박율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백봉기의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장화연은 검은 자국으로 번진 양손을 맞부딪히며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고양이 역시 그에게 커다란 앙금이 있는지 새침한 얼굴로 박율을 노려보았다.
“나도 있어.”
개구리까지 가세했다.
뱀과 곰, 그리고 까마귀를 비롯한 나머지 악사회의 일원들도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거 참 인기가 너무 많아도 문제라니까.”
이런 인기는 그닥 좋지 않는데 말이지.
악사회의 전원이 박율을 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타이밍이 조금 어긋나긴 했다만, 칼림을 죽이는 데 성공했으니 그래도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쩌적!
순간 그의 뒤에서 두터운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촛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해야 할 이명석이 촛농을 조금씩 부수며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래도 그의 의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는 어떻게든 저항하려 이를 꽉 깨문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제어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웬만해선 저 촛농을 부수는 일이 가능하진 않다.
특히나 촛농에 갇힌 이라면 더더욱.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박율은 흘깃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안드라스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전투에 끼어들겠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얼굴로 박율의 반응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렇지. 저런 놈이었지.”
안드라스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든 무조건 재미만을 쫓는 녀석이었다.
그런 그에게 박율은 너무나 만족스러운 유흥거리겠지.
그가 상정한 상황들에 계속해서 변수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인간계를 침공한 이유 역시 심심해서라고 밝힌 녀석이었으니 설명이 필요 없는 악마였다.
쩌적!
이명석을 붙잡은 촛농은 벌써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진다.
안드라스는 아마 그런 상황을 기대하고 무리를 해서까지 개입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안드라스라한들 촛농을 완전히 부순다는 건 그만큼 인간계에 완전한 적응 이전에 힘을 쓴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순전히 재미를 위해 부담을 안고 적응을 늦추고 있단 소리였다.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박율은 고개를 돌려 이명석을 보았다.
부들거리는 온몸이 이제 촛농을 완전히 부순 수였다.
그렇다면 저 통제를 끊는 수밖에.
박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에서 다가오는 악사회를 보았다.
그리고는 손바닥 문양이 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리]
박율은 문양이 완성되는 순간 주먹을 쥐었다.
하얗게 불타오르는 열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함께 곁에 있던 김진목과 차영훈, 그리고 박석훈의 몸까지도 하얀 불꽃으로 타올랐다.
물론 그림자로 연결된 데판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거 뭐야...?”
저 멀리 걸어오던 악사회 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새하얀 불꽃으로 가득한 평야.
먼저 고개를 든 박율은 나침반을 꺼냈다.
“사정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됐는데, 계획은 그대로 속행하시면 됩니다.”
안드라스의 군단장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박율과 그의 일행의 부재가 걱정되기는 한다만,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것이라 믿는다.
박율은 나침반을 내렸다.
그가 만든 결계에 갇힌 이들의 눈이 하나둘 뜨이고 있었다.
눈을 뜬 일행과 악사회의 놈들이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슨 상황이 펼쳐진 것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지. 다들.”
박율이 말했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그의 인사에 악사회의 일원들은 인상을 팍 구겼다.
“또 저놈이군.”
뱀은 이젠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네가 뒤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장화연이 말했다.
그녀는 검은 자국으로 뒤덮인 두 주먹을 맞부딪히며 이를 빠득 갈았다.
“보고 싶었다.”
장화연은 걸죽한 욕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나는 미친 여자는 안 좋아해서.”
“언제까지 그 주둥이를 놀릴 수 있나 보자고.”
장화연이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척.
악사회 중심에 있던 까마귀가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제지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 녀석은 내가 맡지.”
“뭐? 야!!!”
그의 발언에 상당한 반발이 일었지만, 까마귀는 아랑곳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발을 굴러 검을 들이미는 동시에 악사회 전원이 흠칫 움직였다.
캉!!!
까마귀의 검이 박율의 망치와 맞닿는 순간, 더 이상 다른 악사회의 움직임은 없었다.
상대방과 정면 대결을 할 시 참견은 하지 않는다는 악사회의 규칙이었다.
“아오!!!”
저 멀리에서 장화연이 내뱉는 짜증이 느껴졌다.
먼저 선수를 친 까마귀 덕에 박율을 죽일 기회를 놓쳤으니까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시선은 나머지 일행들을 향했다.
* * *
[척후]
캉!!!
박율은 날아드는 일본도를 막았다.
까마귀는 쉴 틈 없이 검을 날렸다.
“큭...!”
말 그대로 틈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한눈을 파면 그 틈을 타 까마귀의 일본도가 목숨을 위협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빠른 일격들이었지만,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까마귀였다면 상처를 내어주고 그만한 공격을 해야 했다면, 이번엔 아니었다.
공격과 공격 사이, 아주 작은 허점이 눈에 들어왔다.
박율은 까마귀의 일본도가 망치와 부딪히고 잠시 멈칫하는 찰나, 몸을 깊숙이 낮춰 코어를 단검으로, 까마귀의 복부를 베었다.
차악!
“큭...”
박율의 공격에 까마귀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배에 새겨진 자상에 신음을 흘리면서 말이다.
박율은 재빨리 까마귀에게 달려들었다.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다.
아니, 죽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