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검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칠흑이 깔린 하늘이 눈물을 흘리듯 그것은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독한 냄새와 함께, 천지를 뒤덮었다.
하늘을 본 이들은 말했다.
세상이 흑으로 물들고 있다고.
그리고 그 위로 거대한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돌덩이는 아니었다.
돌덩이만큼이나 거대한 무언가였다.
그 무언가가 떨어졌던 하늘의 구멍이 아구를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균열의 틈이 완전히 사라지자 가려진 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천정을 뒤덮던 심연이 하나 사라진 것만으로 세상을 밝히던 태양이 저 멀리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 흑으로 뒤덮인 세상에 한줄기 잿빛 석양이 떨어졌다.
내리쬐는 잿빛 석양을 맞으며 박율은 황금빛 활을 내렸다.
“시작이다.”
그리고 벌어진 심연에서 악마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쏟아지는 악마들과 마수들, 박율은 다시 황금빛 활을 높이 들었다.
“후...”
시위에 다시 망치를 걸어 힘을 집중한다.
망치를 감싸고 타오르는 불꽃이 점차 크기를 불려가며.
작은 손망치는 해머로, 그리고 철퇴로.
폭발할 듯 차오르는 힘에 박율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놓는다.
하늘을 장악한 악마들, 그 사이로 날아가는 화살은 검게 물들은 하늘에 한줄기 빛으로 세상을 밝혔다.
아주 작은 빛줄기였지만, 검은 하늘에는 그것조차 태양만큼이나 밝은 불꽃이 되어 주었다.
심연과 그 안에서 쏟아지는 악마들은 폭발하는 섬광에 휩쌓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호탄이 되어 지상의 사자들을 일깨웠다.
불기둥이 하늘을 태우고, 번개로 이루어진 창이 창공을 꿰뚫는다.
군대를 주둔시킨 인간들은 하늘을 향해 포격을 쏘아댔다.
검게 물든 하늘에 섬광이 쏟아진다.
* * *
“오빠...”
“...”
작은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내게 닿는다.
너무나 차다.
얼음장 같은 손과 손이 맞닿으며 소름 돋는 차가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아이는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미안해.”
“오빠...”
무력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차악!
아이의 등허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흩날린 피는 너무나 뜨거웠다.
피가 묻은 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뜨거웠다.
“다 오빠 때문이야.”
아이는 말한다.
날 향해 뻗은 고사리 같은 손에서 검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변명을 하고 싶었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무언가에 홀린 것이라고.
하지만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마치 물로 가득 찬 솜으로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턱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무력함에서 비롯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검게 변한 아이의 손은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을 따라 비릿한 피냄새가 울려 퍼진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야.”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 가래 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아니야...”
아이의 온몸이 녹아내린다.
마치 불에 그을린 초가 어그러지듯.
아이의 허물이 하나 벗겨지면, 어머니의 얼굴이,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차악!
아버지의 얼굴을 한 무언가의 가슴을 뚫고 나타나는 칼날.
첨예한 날과 함께 찢어지는 그들의 형상.
그 뒤에는 피를 뒤집어쓴 내가 서 있었다.
“네가 전부 죽인 거야.”
나는 말한다.
반달 모양을 그리며 올라간 입꼬리는 보는 것만으로 공포가 치밀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무언가 나의 몸을 옭아맨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피 묻은 손으로 내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불쌍한 어린 양을 본다는 듯 혀를 끌었다.
“불쌍한 것.”
“그만...”
나의 시야를 장악한 나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허물을 벗은 나의 몸에서 나온 것은 검은 무언가였다.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인 것도 아니었다.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은 악마였다.
“전부 네가 저지른 일이야.”
“아니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네 손을 봐.”
나는 떨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느새 나의 손마저 검게 물들어있었다.
“나에게 복수하고 싶어?”
그것은 말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리고 분노였다.
당장에라도 저 존재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이 없기에.
“나를 죽이고 싶겠지.”
그는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마.”
그의 이름은 바알.
까마귀는 눈을 떴다.
그는 상체를 일으킨 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달갑지 않은 꿈이었다.
5년 전 벌어졌던 일가족 살인사건.
그리고 그 살인을 벌인 남자.
까마귀의 두 손이 떨렸다.
주체할 수도 없을 만큼.
“그만...”
미칠 것만 같았다.
까마귀는 자리에 굳어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도시에 짙은 섬광이 터졌다.
까마귀는 고개를 들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는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고 일어나 칼을 집었다.
“하...”
그리고 까마귀는 가면을 집었다.
바알이라는 존재에게 다가가기 위한 첫 번째 계단을 밟을 시간이다.
* * *
하늘을 검게 물들인 심연에서 악마들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그리고 지상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기를 든 사자들이 있었다.
붉은 핏방울들이 흙바닥을 물들이고, 검은 핏방울들이 구름을 장식한다.
박율은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의 목표는 저 악마들이 아니었다.
전장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태성그룹의 앞, 길드 율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약속이라도 한 듯 본래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그리고 지금껏 난관을 헤쳐왔던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빛으로 물든 선홍빛 갑주를 착장한 박석훈부터 넓게 펼친 손으로 ‘손톱’으로 만든 활을 높이 들고 있는 하세원까지.
킹콩을 대동한 이세진이나 새침하게 서 있는 서희도 두말할 것 없었다.
전투에 약한 최지호나 소장석은 예상대로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사자들 사이 유일한 마인.
이명석이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와주셨네요.”
“당연하죠.”
이명석은 답했다.
그에게서 하늘을 뒤덮은 마기와 동일한 마기가 느껴졌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박율은 싱긋 미소로 답을 하곤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향했다.
“오랜만이네요. 다들.”
“시작부터 그렇게 힘써도 되는 거에요?”
차영훈이 물었다.
아마 방금 전 하늘에 쏘았던 두 개의 화살을 말하는 듯했다.
박율은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싸움은 기선제압이 제일 중요한 거에요.”
자주 쓸 수 있는 힘은 아니지만, 그의 공격을 시작으로 사자들이 우위를 갖게 된다면 두 번이라도 쏠 수 있었다.
박율은 이정도면 싼 값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봐도 악마들의 숫자가 줄어든 게 보일 정도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하늘을 꿰찬 악마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사자들을 보던 박석훈이 물었다.
박율은 따로 답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굳이 답을 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대상이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는 참이었으니까 말이다.
쿠구궁!!!
땅이 흔들린다.
상공을 차지한 심연들 중 가장 거대한 심연에서 기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심연 아래에 서 있는 것만으로 호흡이 턱하고 막히고, 시야가 아득해질 정도의 마기였다.
쩌적!!!
땅이 갈라지고.
쨍!!!
근방에 존재하는 모든 유리창이 깨지기 시작한다.
“...”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아니, 북쪽의 끝을 향했다.
구름이 갈라지고, 천지가 개벽하기 시작한다.
“우리 살아서...”
“혼자 플래그 세우지마요.”
박율은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히 내뱉는 김진목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아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전달되는 중이었다.
“나온다...”
이세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멀리 갈라진 균열 사이에서 거대한 악마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군단장들...”
박율은 저들을 알고 있었다.
토머와 같은 안드라스 군의 군단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군림하는 한 남자.
올빼미의 탈을 뒤집어 쓴 채 거대한 늑대 위에 앉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름은 안드라스.
오늘 박율과 그의 일행들이 죽여야 하는 존재였다.
“저것들이...”
누군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공포에 질려, 혹은 숨 막히는 마기에 내뱉은 말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상태만큼은 파악할 수 있었다.
아득한 존재를 눈 앞에 두고 토해내는 탄사 같은 것이었다.
악마들의 시선이 박율들을 향했다.
마치 흙바닥의 벌레는 본다는 듯 역겨움이 넘실거리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째려보는 것만으로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야.”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안드라스의 진언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숨이 턱하고 막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박율은 겨우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조절했다.
하지만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아닌 듯했다.
마치 호흡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 마냥 컥컥 거리는 소리를 뱉었다.
[정신 차려라.]
모두가 실신이라도 할 듯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려 할 때였다.
익숙한 악마의 소리가, 천지에 내려앉았다.
박율의 앞으로 데판의 커다란 몸뚱이가 하늘을 가렸다.
그의 소리에 잠시나마 정신을 잃은 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허...허억...”
박율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었다.
찌그러진 폐를 부풀리며 그들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네 놈이로군.]
데판은 안드라스의 신경질 넘치는 말을 가래침으로 가볍게 받아쳤다.
그의 대응에 안드라스는 불쾌하다는 듯 마기를 뿜어냈다.
[만나서 반갑느냐?]
[...!]
데판은 손을 들었다.
그냥 손을 든 것은 아니었다.
명백한 도발.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린 상태였다.
[이거나 처먹어라.]
데판이 말했다.
쿠구궁!!!
쏟아지는 마기에 지진이 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안드라스가 이를 빠득 갈며 있었다.
“잘 배웠어. 아주.”
박율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한동안 그와 함께 지내더니 어떻게하면 상대를 빡치게 할 수 있는 지 확실하게 배운 듯했다.
안드라스는 박율 일행을 향해 손가락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섯 구의 악마들이 움직인다.
“앞으로 한 시간 안에 전부 끝내야 해요. 저놈들이 인간계에 완전히 적응하기 전에 말이죠.”
박율은 망치를 높이 들었다.
앞으로 한 시간.
그들의 운명이 정해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