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박율은 한숨을 팍 내쉬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선 얼굴 절반을 뒤덮는 커다란 선글라스에 새카만 마스크를 쓰고 모자는 또 벙거지로, 안면에 작은 빈틈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분장을 하고 따라오는 서희가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신경 쓰이는지 고개를 한시도 가만히 냅두지 못한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미어캣 한 마리가 허리를 길게 뻗어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의 품 안엔 데판이 있었다.
“...둘 다 뭐해요?”
“신경꺼.”
“아니, 그럼 신경 쓰이게 하질 말던가.”
“넌 모를 거야. 셀럽의 삶을.”
“아, 예. 뭐 그러시겠죠. 어우, 피곤해.”
박율을 혀를 끌끌 차며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아주 골치가 아프다, 정말.
서희나 데판이나 둘 다 정상이 아닌 듯하다.
“두 사람도 저 사람 알아요?”
“그럼요. 티비에서 많이 봤어요.”
한지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석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 사람 저러고 다니는 건 알아요?”
“...”
박석훈은 흘깃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보지 못했다고 눈을 질끈 감은 듯했다.
박율은 애써 무시하며 가려고 했지만, 자꾸만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한숨을 팍 내쉬며 서희를 보았다.
“계속 그러고 올거에요?”
“뭐가?”
“지금 누가 봐도 그쪽 되게 수상한 거 알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만.”
“...에휴.”
박율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스타병 말기이긴 했다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가 문제인걸까.
“그나저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에요?”
조용히 박율을 쫓아가던 한지원이 문득 물었다.
“아직 내가 말 안했던가?”
“매번 그랬죠.”
박율의 답에 박석훈은 새삼 뭘 그러냐는 듯 답했다.
“이 방향 익숙하지 않아요?”
“네...?”
“다른 건 아니고, 석훈 씨도 만난 적 있는 사람 데리러 가요.”
“누구...”
달싹거리는 입을 내밀던 박석훈은 문득 누군가 떠올랐는 지 인상을 팍 쓰며 박율을 보았다.
“설마...”
“예, 그 사람 맞아요.”
철혈의 대장장이, 소장석.
이전에 박석훈이 멋도 모르고 찾으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던 그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일그러진 박석훈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는 소장석이라는 사람을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요...? 또 인두로 지지고 뭐 그러는 거 아니에요...?”
“인두로 지져요...?”
박석훈의 말에 한지원은 경악스러운 듯 인상을 구겼다.
“진짜 그때만 생각하면...”
“오늘은 그럴 일 없어요.”
박율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어느 공터 앞에 멈춰 섰다.
“여기는...”
“자,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일은 전부 우연이에요. 우연.”
이제부터 네 사람은 우연히 소장석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연히 말이다.
* * *
“할아버지!”
골방에 틀어박혀 달군 쇠에 망치질을 하던 소장석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닫혀있던 나무문이 점차 아구를 벌리기 시작했다.
아구가 전부 벌어지자 보이는 작은 아이.
아이는 까치발을 든 채 겨우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에헤이...! 들어오지 말라니까!”
아이를 본 소장석은 버럭 소리쳤다.
힘겹게 문을 열고 작업실에 발을 들인 아이는 버럭 외치는 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그리곤 흠칫 멈춰서 당장에라도 울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치만 심심하단 말이에요...”
아이는 터질듯한 울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말을 내뱉었다.
아이를 보고 있던 소장석은 한숨을 팍 내뱉으며 쇠망치를 내려놓고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앞까지 다가온 소장석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아이는 서러움에 달싹거리는 입을 가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울지 않겠다는 의지가 단연해보였다.
소장석은 쇠질로 울퉁불퉁해진 손을 아이의 볼에 가져갔다.
“...할아버지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
소장석은 세상 따스한 얼굴로 아이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소장석은 아이를 품에 안아주며 달래주었다.
“어이구, 우리 아기...”
소장석은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아이의 눈물을 닦았다.
그제야 울음을 그친 아이는 여전히도 뾰루퉁한 얼굴로 소장석을 보고 있었다.
불에 달궈진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소장석의 얼굴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가 번져있었다.
“할아버지가 말했잖아. 여기는 우리 하늘이가 놀기에는 너무 위험해서 들어오면 안 된다고.”
“네...”
“특히 우리 하늘이는 몸이 약해서...”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약한 하늘이에게 소장석의 작업실은 화생방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잠깐 소장석의 작업방에 있었다는 이유로 온몸에 수포가 오르고, 며칠간 침대에 누워 회복을 해야 할 정도로 약한 몸을 가진 아이였다.
그렇기에 소장석은 화를 내면서라도 아이를 내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해서 집에서만 생활하는 아이에게 거의 유일한 낙이었던 창문을 보는 일도 하늘을 장악한 검은 것들로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거실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할아버지가 갈게. 알겠지?”
“진짜에요...?”
“그럼.”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소장석의 말에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풀렸다.
아이는 만개한 웃음꽃을 얼굴에 장식한 채 작업실을 나갔다.
소장석은 아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에휴...”
애미, 애비를 사고로 잃고 그의 품에서 크고 있는 아이가 안쓰럽기만 했다.
소장석은 무거운 한숨을 팍 내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 * *
작업실을 나온 하늘이는 터덜터덜 거실의 소파로 걸어가 몸을 뉘었다.
옆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티비를 틀지만, 역시나 매번 똑같은 얘기뿐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게 어쩌구 저쩌구.
리모컨으로 다른 번호를 눌러도 똑같은 이야기뿐이었다.
하늘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도 방영을 끝낸 탓에 이젠 정말로 볼 게 없었다.
하늘이는 삐쭉 입술을 내민 채 리모컨을 던져두고는 그대로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재미없어...”
소파에서 발을 구르고 발버둥을 쳐봐도 심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야옹.”
그런 하늘이의 고개를 들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하늘이는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창문에 보이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는 도도한 자세로 하늘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늘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안녕...?”
하지만 고양이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창문에서 뛰어내려갔다.
“어디가...!”
하늘이는 사라진 고양이를 쫓으려 창문으로 뛰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검은 고양이.
그것은 하늘이에게 따라오라는 것마냥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따라오라고?”
하늘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 나가면 안 되는데...”
하늘이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초조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고양이는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발을 옮겼다.
“고양아! 어디가...!”
하늘이는 사라지는 고양이를 쫓아 발을 굴렀다.
그리고 찾은 고양이는 하늘이의 집 정문 앞에서 도리를 튼 채 앉아있었다.
하늘이는 당장에라도 나갈 듯 문을 벌컥 열었지만, 선뜻 발을 내밀진 못했다.
‘밖은 위험하니까 혼자선 절대 나가면 안 돼.’
할아버지가 항상 하늘이에게 말했던 그 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늘이는 어떻게든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 문에 몸을 걸치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고양이를 유혹했다.
“이리와...”
하지만 고양이는 아이의 손을 무시할 뿐이었다.
잠시 아이를 뚫어져라보던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이의 외침에도 고양이가 흘깃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는 마치 얼른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따라오라고? 안돼... 할아버지가 나가지 말랬단 말이야... 나가면 혼날 거야.”
하늘이는 땅을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도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양이는 점점 아이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가지마...!”
문에 걸친 채 고양이를 보던 하늘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양말을 가져와 신었다.
“그래, 잠깐만 나갔다 오는 거야...”
고양이는 어느새 아이의 시야 끝에 걸친 채 아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는 고양이가 기다려준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문밖으로의 모험을 준비했다.
마치 가시밭길 위를 걷는 듯 아이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을 땅에 안착시켰다.
아이는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한발자국 씩 발을 옮겼다.
그리고 집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
저어기 끝에 고양이가 보인다.
“안녕?”
하늘이는 아주 조심스레 고양이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새침하게 돌아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가?”
하늘이는 짧은 다리로 고양이를 쫓았다.
고양이는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아이가 쫓을 수 있을 속도로 적당히 느리게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같이 가!”
짧은 두 다리로 쫄래쫄래 고양이를 쫓던 하늘이는 겨우 고양이가 자리에 멈춰서자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몸이 허약한 탓에 조금만 뛰어도 숨이 거칠어지다보니 아이의 몸은 어느새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아이구, 귀여운 아이가 우연히 우리 고양이를 발견해서 우연히 우리 고양이를 쫓아왔나보네?”
하늘이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뒤로 딱봐도 이쁘다는 말이 나올법한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 * *
“아이고 허리야...”
쇠질을 끝낸 소장석은 굽은 허리를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비틀.
갑작스레 치솟는 현기증에 소장석은 넘어질 뻔 했지만, 겨우 벽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이제 이 일도 그만할 때가 된 듯했다.
온종일 화기에 쬐다보니 이젠 잠깐만이라도 굳은 몸을 움직이면 머리가 핑 도는 게 이러다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안 되지...”
그렇다면 하늘이는 누가 보살핀단 말인가.
안 그래도 부모도 없이 할애비 손에서만 크는 아인데, 혹시라도 그가 잘못된다면 하늘이는 말 그대로 고아가 된다.
“후...”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 쇠질은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았다.
이젠 하늘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데 투자할 때였다.
소장석은 나머지 도구들을 정리하곤 작업실을 나섰다.
“하늘아~”
작업실을 빠져나온 소장석은 가장 먼저 하늘이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나...?”
너무나 고요했다.
마치 이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그의 머리 속을 가득채웠다.
“하늘아...?”
소장석은 하늘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릴 때면 항상 누워있던 소파에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이가 자는 방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장석은 목이 터져라 아이를 불렀다.
“어디 갔어...!”
불길한 생각이 점차 그의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소장석은 집안을 뒤졌다.
아이가 있을 만한 공간부터 아이가 들어갈 수 있을 모든 공간을.
“하...하늘아...”
그러다 문득 보인 서랍장.
하늘이의 양말이 빼곡이 들어찬 서랍장에 양말이 하나 빠져있었다.
“...!!!”
소장석은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의 신발마저 사라졌다.
하늘이가 혼자 집을 나갔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