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제 돌아갑시다.”
백봉기와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박율이 말했다.
아직 자리에 남아있던 박석훈과 김진목은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근데 저거 줘도 되는 거에요...?”
김진목은 저 멀리 늑대 가면이 가져간 항아리를 가리켰다.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네?”
“뭐 그런 게 있어요.”
“아니, 저거 때문에 이 난리를 쳐서 가져온 거 아니었어요?”
“그렇죠?”
“근데 왜... 매번 그런 것처럼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잠시 고민을 하던 김진목은 박율을 판단을 믿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살리는 방법이에요.”
박율은 답했다.
2번의 짧은 회귀.
확실하다 단정할 순 없다지만 그 시간 동안 알 수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던 누군가 하나는 죽는다.
단탈리온이 말한 낙화와 생화.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 혹은 죽음에 버금가는 대가를 뜻하는 것이리라.
박율은 그 사이에서 대가를 택한 것이었다.
“이제 갑시다. 불청객 나올 시간 다 됐으니까.”
쿠구궁!!!
세 사람의 옆에 있던 폐허가 된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쾅!!!
그리고 뒤이어 폭음이 이어졌다.
지진이 인 듯 흔들리던 건물이 폭파됨과 동시에 그 안에서 가시 속에 갇혀있던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악마는 살기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박율을 찾는 듯했다.
그리고 악마의 시선이 박율을 향하는 순간.
박율은 싱긋 미소를 보이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잘 있어.”
[저...!!!]
울그락불그락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던 악마는 근처에 있던 철근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박율을 향해 집어던진다.
쾅!!!
날아간 철근이 박율이 있었던 땅을 박살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이후였다.
* * *
“다들 고생하셨어요.”
하세원이 만든 통로를 건너온 박율이 말했다.
그곳엔 짧은 여정 간 지친 일행들이 땅바닥에 퍼질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스페인까지 와서 구경은커녕 일이나 잔뜩 시키고!”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침음을 뱉던 최지호가 앙탈을 부리듯 소리쳤다.
“그럼 지금이라도 구경할래요?”
“그래도 돼!?”
박율의 말에 최지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쾅!!!
동시에 저 멀리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소리들이었다.
“할 수 있으면? 뭐 죽을 각오는 하고 해야 할 거 같긴 한데.”
“저 이씨...”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던 최지호는 한숨을 팍 내쉬며 다시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의 옆에서 서희는 어디서 또 의자를 구해왔는지 다리를 꼬고 앉아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데판은 그새 그녀의 무릎 위에 도리를 트고 누워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아예 고양이로 살려고...?”
그는 박율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르렁 소리를 냈다.
“스페인의 쌈바를 보고 싶었는데...”
최지호의 말에 옆에 있던 서희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쌈바 누님들을...”
“쌈바는 브라질이고.”
“에펠탑이 얼마나 보고 싶던지...”
“그건 프랑스, 등신아.”
“피자의 원조를...”
“이탈리아.”
“소세지가...”
“독일.”
“거, 내가 표현하고 싶은대로 표현한다는 데!”
“등신.”
최지호는 찌릿 서희를 보았다.
그녀는 한심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팍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박율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근데 그쪽은 안 가요?”
“나?”
“할 일 많은 사람 아니에요?”
“많지.”
“분 단위로 계획 짜는 양반이 이렇게 하릴없이 있어도 되는 건가?”
“내가 분 단위로 계획을 짜는 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럴 거 같아서요.”
“...”
“뭐 광팬이라서 그렇다고 해두죠. 뭐.”
박율은 찌릿 노려보는 서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말만 하면 매섭게 달려드는 게 저 양반한테는 말 한마디 꺼내기가 참 무섭다니까.
“그리고 이 상황에 어딜 가?”
“...”
총소리만 안 들리지 여기는 전장이나 다름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게 다른 사람 같았으면 말이다.
하지만 박율의 눈앞에 저 양반에게는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서희는 원한다면 당장 다른 도시로 가거나 그것도 안 된다면 다른 나라로 가서 돌아갈 수도 있을 양반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신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또 달려들 것 같은 생각에 말하기를 접었다.
무슨 꿍꿍이 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박율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뭐. 그러시겠죠.”
비아냥대는 박율의 말에 서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박율은 애써 무시했다.
평소와는 다른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해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박석훈의 질문이었다.
박율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돌아가야죠.”
“어떻게요?”
“어떻게긴요.”
어차피 경매가 끝나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안도 마련했고 말이다.
“세원 씨, 내 몸에다 흔적 하나 남겨줘요.”
“네...?”
“얼른.”
박율은 양팔을 넓게 벌리고 하세원 앞에 섰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박율을 보았다.
“빨리.”
박율의 닦달에 하세원은 주변 눈치를 슬쩍 보더니 손을 높이 들어 활을 꺼냈다.
“...나 죽이려고요?”
“네...?”
“흔적을 남기라니까. 죽이진 말고.”
“아...!”
그제서야 하세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박율에게 다가가 작은 흔적을 하나 남겼다.
“자, 그럼 조금 있다가 봐요.”
[유리]
박율의 권능이 개방됨과 동시에 그의 형태가 하얀 불꽃에 먹혀 사라졌다.
* * *
새하얀 불꽃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점토인형을 꺼냈다.
점토인형에 가슴팍에는 박율에게 있는 것과 동일한 새카만 자국이 하나 있었다.
“반갑다야.”
남산타워를 함께했던 아주 고마운 성유물이었다.
그리고 이 성유물은 또 그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이었다.
지금은 물론 이후에도 역시.
박율은 점토인형 가슴 쪽에 꽂혀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리고 그 순간, 박율의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엔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천장에 누런 땟자국이 선연히 보이는 천장.
“...어우, 피곤해라.”
박율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산타워 때처럼 죽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리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아, 하나 불편한 점이라면.
“방광 터지겠네...!”
생리활동이었다.
박율은 방광이 대낮에 천장을 보며 자기소개를 하기 직전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후 화장실에서 나온 박율은 그제야 살겠다는 얼굴을 했다.
“후... 그럼 이제 다들 데려올까.”
[유리]
다시 박율의 권능이 개방되었다.
새하얀 불꽃이 발끝에서부터 그의 머리까지.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역시나 새하얀 불꽃으로 가득한 유리된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점토인형이 떨어져 있었다.
점토인형을 다시 집어든 박율은 권능을 해체했다.
새하얀 불꽃으로 만들어진 결계에 번개라도 떨어진 듯 새하얀 금이 군데군데 벌어지더니 이내 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행히 박율의 손엔 점토인형이 남아있었다.
솔직히 이게 될 수 있을까 확신하진 못했다.
이론상 가능은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이론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혹시라도 권능이 먼저 풀려 점토인형이 스페인에 떨어진다거나, 안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지만, 됐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박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집을 나섰다.
“워메...”
집을 나서자 보이는 하늘의 심연.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까지 만해도 군데군데 하늘을 잠식하고 있던 심연의 골짜기들이 어느새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빼곡히 채운 상태였다.
그 탓에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새벽인 것마냥 어두웠다.
“진짜 거의 다 왔구나...”
인천과 서울 등지를 전부 궤멸시켰던 악마사태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안드라스를 없애고 나면 그 이후로 바알의 군세가 한국을 침공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질 악마사태를 막을 수만 있다면 역사의 가장 큰 줄기를 바꿀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미 그는 수많은 역사를 개변시킨 인물이었다.
악마사태 역시 할 수 있으리라.
“후...”
박율은 무거운 마음을 한숨으로 짧게 내뱉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점토인형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세원 씨. 이제 통로 만들어요.”
스페인에 있을 이들을 모두 데려온다.
나침반에 말을 꺼내기 무섭게 점토인형이 있는 땅으로 새하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불꽃은 둥근 고리를 만들어 커다란 통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타나는 일행들.
“우와,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어요?”
가장 먼저 통로를 빠져나온 김진목이 물었다.
“내가 누구에요?”
“출발할 때 지각만 안 했으면 참 완벽했을 텐데.”
“크흠...”
뒤이어 나오는 일행들.
서희를 끝으로 모두 통로를 빠져나오자 하세원은 곧바로 통로를 지웠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이제 좀 쉬면서 컨디션 관리를 좀 해야 할거에요.”
박율은 고생의 의미로 짧은 박수와 함께 말했다.
“와...”
통로를 빠져나온 이세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더니 탄사를 내뱉었다.
고작 하루이틀 사이에 심연의 골짜기가 커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빈틈이 없을 정도로 하늘을 꽉 채우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의 품에 있던 킹콩은 하늘을 보며 경계라도 하듯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괜찮아. 괜찮아.”
이세진은 킹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기서 악마들이 나오는 거죠...?”
한지원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두려움과 초조함이 한데섞인 목소리였다.
“저거 때문에 지금까지 개고생한 거잖아요.”
말을 내뱉으면서 느껴지는 숨결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다들 이제 각자 돌아가서 좀 쉬어요. 다시 모일 때는 말 안해도 알 거니까.”
박율은 회의 잠긴 일행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말에 일행들은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한껏 초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길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박석훈과 한지원을 포함해서 말이다.
“석훈 씨. 지원 씨.”
박율의 부름에 두 사람이 흘깃 고개를 돌렸다.
“어디가요?”
“쉬라면 서요...?”
“두 사람은 아니에요.”
“예...?”
“따라오슈.”
박석훈은 힘들어 죽겠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팍 지었고, 한지원은 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작업할 시간이거든요.”
“아, 예 뭐... 에휴...”
박석훈은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그쪽은 왜 아직 남아있어요?”
박율은 아직도 새침한 얼굴로 데판을 쓰다듬던 서희를 보았다.
그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디로 가진 않았다.
여전히 데판을 품에 안은 채 박율을 보고 있었다.
“뭐요...?”
“말했잖아. 지켜본다고.”
“에?”
“안내해.”
“...”
저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