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 모든 악몽이 시작되던 때에 넌 죽어 있었어.”
“뭐...?”
순간 박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게 남아있던 모든 것을 놓아야 했을 때, 넌 죽어 있었어.”
박율은 남산타워 사태 이후를 떠올렸다.
그가 죽었었던 그 시기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절망에 모든 걸 포기해야 했을 때, 그 존재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박율은 다음 공격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을 수 없었다.
날아든 뼛조각은 박율의 어깨를 베었다.
“큭...!”
박율은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상흔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웠다.
벌어진 상처는 변명이라도 하듯 아구를 연신 벌리며 피를 쏟아냈다.
박율의 옷에 검붉은 얼룩이 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백봉기를 보았다.
역시 메마른 얼굴.
하지만 그 이면엔 얼어붙은 무언가가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을 얼린 그 무언가가 말이다.
“...내가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 넌 없었어. 너무 고통스러워 눈을 뜨는 것도 힘들 때,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 때도, 너는...”
“형...”
차악!
또 다시 그의 뼛조각이 박율을 베었다.
이번엔 복부였다.
가로로 길게 뻗은 상처가 벌어졌다.
고통을 토해낸다.
뿜어져 나오는 피가 설움을 울부짖었다.
신음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말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백봉기는 잠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움츠려든 박율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형...”
“...이건 나를 지키기 위한 거야.”
캉!!!
박율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뼛조각이었다.
박율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의 목은 바닥에 구르고 있었을 뻔했다.
허나 그의 공격은 진심이 아니었다.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그 망설임이 한 끌이라도 부족했다면 이미 그는 죽었다.
백봉기는 더욱 거세게 공격을 가해왔다.
마치 스스로를 부정하는 듯 거친 공격들이었다.
캉!!!
캉!!!
공격을 막는 두 팔에 저릿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그의 공격에 하나둘 감정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분노 섞인 검격이 날아왔고, 슬픔을 토해내는 해골의 공격이, 좌절과 절망에 휩쌓인 뼛조각이 박율의 목숨을 탐했다.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기우랑 함께 있으라고.”
캉!!!
막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공격은 그만큼이나 애처로웠다.
그렇기에 박율은 무력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이었다.
허나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나는...”
노력했어.
하지만 말을 내뱉을 수 없다.
“나는...!!!”
캉!!!
백봉기의 대답이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의 슬픔이 진동을 타고 박율에게 전해졌다.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기에 그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백봉기의 뼛조각이 박율의 복부를 꿰뚫었다.
푹!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순간 백봉기의 시선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분명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마치 쏟아지는 폭풍우를 제 몸으로 받는 커다란 나무처럼.
그는 피하지 않았다.
뱃가죽을 뚫은 뼛조각을 따라 검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박율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백봉기를 본다.
색이 바래진 그의 눈은 박율을 비추고 있었다.
박율은 뼛조각을 움켜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박율의 뱃가죽을 뚫은 뼛조각을 통해 그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슬픔, 좌절, 무력, 그리고 절망.
모든 감정들이 북받쳐 차오르고 있었다.
백봉기의 시선은 박율의 뱃가죽을 뚫은 뼛조각을 보고 있었다.
“...”
“형.”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한 발자국.
다가간다.
뼛조각을 쥔 백봉기는 힘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팔꿈치는 박율이 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지금...!”
“...내가 미안해.”
입에서 피가 역류한다.
박율은 끓어오르는 핏물을 토해냈다.
토해낸 피가 백봉기의 얼굴에 튀어 그의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피의 비릿한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백봉기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
박율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더는 물러서지 못하게 백봉기의 손을 잡았다.
한 걸음.
푹!
뼛조각이 박율의 등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고통스러웠다.
첨예한 날이 복부를 헤집는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그지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주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그대로 눈을 감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박율은 그 고통을 감내하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 뭐하는...!!!”
백봉기의 고개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내가 미안해. 전부.”
“...!!!”
한 발자국.
박율은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백봉기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뱃가죽을 파고드는 뼛조각의 날은 움직이는 만큼 더 복부를 헤집었다.
백봉기는 그런 그를 보며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박율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만...”
“형.”
“그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자리를 지켜야 할 장기들이 찢어지고 발겨지며 형태마저 뒤틀려지는 그 고통을.
박율은 백봉기에게 다가가기 위해 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턱.
백봉기의 등에서 차가운 벽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박율은 다가갔다.
백봉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터지려는 울분을, 참아왔던 고통을, 격통하는 슬픔을 하나둘 풀어내고 있었다.
“율아...”
“괜찮아.”
기우를 지키겠다는 일념하나로 단단해진 그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떨었다.
누구보다 넓어 보였던 그의 어깨는 누구보다 좁았다.
꼬이고 꼬인 실은 단단해진다.
풀려고 하면 할수록 실은 엉킨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실을 풀려고 한다.
백봉기는 실을 잡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풀 수 없는 그 실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박율은 그 실에 손을 얹었다.
엉키고 설킨 실뭉치는 너무나 단단했다.
마치 돌덩이를 손에 쥔 듯 차가웠으며.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단단했다.
백봉기는 떨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아니. 늦지 않았어.”
“...”
“말했잖아.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백봉기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그 벽에 끊임없이 작은 충격을 일으켰다.
“율아...”
“내가 어떻게든...”
뼛조각을 잡은 백봉기의 손이 떨어졌다.
그리고 백봉기의 눈꼬리를 타고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제발...나...좀...죽여줘...”
그리고 무너진 건물에서 굉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건물이 폭발했다.
그 안에서 악마가 나타났다.
[감히...나를...]
들끓는 분노를 표출하는 악마의 시선은 박율을 향했다.
박율은 그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다짐한다.
당신을 되찾겠노라.
다시 당신과 함께 하루를 살아가겠노라.
악마는 손을 높이 들어 가까이 있던 철근 하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박율을 향해 날렸다.
박율은 하나 남은 세계수의 잎을 꺼냈다.
그리고 입 안에 넣는다.
“기다리고 있어. 형.”
동시에 날아든 철근이 박율의 복부를 꿰뚫었다.
고통의 격류가 휘몰아쳤다.
고개를 살짝만 내려도 그의 시야에 복부를 꿰뚫은 철근이 보였다.
”미안하다... 율아...“
백봉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함께 쓰디쓴 맛이 입안을 간지럽혔다.
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달았다.
고작 5분이라는 그 시간의 달콤함은 말이다.
온몸을 가득 채우던 격통과 쓰라림이 그의 몸을 떠나기 시작했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막의 신기루처럼.
복부를 꿰뚫은 철근과 뼛조각이 사라졌다.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구를 벌렸던 상처는 눈을 감았지만, 그 자리엔 쓰라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 뒤에 찾아오는 격통과 울렁임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달콤한 쓰라림이었기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 데에 대한 제약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이 그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놔.”
다시 두 눈이 트였을 때.
그의 앞엔 한 남자가 뼛조각을 들이민 채 서 있었다.
익숙하고도 차가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남자가 말이다.
그는 박율이 쥐고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서 낙엽과 생화의 무게를 재단해야 할 것이다.]
박율은 떠올렸다.
단탈리온이 남긴 그 말을.
여전히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낙엽과 생화가 지금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낙엽과 생화가 누군가의 죽음을 은유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낙엽과 생화...”
“...”
아직 그는 길의 끝까지 오지 않았지만, 박율은 이미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 말인즉슨, 길의 끝에 다가왔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제 눈 앞에 선 절벽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박율은 늑대 가면을, 아니 백봉기를 보았다.
가면으로 가려진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어렵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형.”
“...”
“미안해.”
박율은 손에 쥐고 있던 항아리를 내밀었다.
그가 내뱉은 사과에 아주 살짝 백봉기의 뼛조각 끝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평온한 대지에 불어온 작은 바람 일어 풀들이 흔들리듯, 그의 숨결마저 흐릿하게 흔들렸다.
“이번엔 다를 거야.”
“...”
“다시 찾으러 갈게.”
백봉기의 숨결은 잔잔한 바다의 파도처럼 요동쳤다.
흐릿했고, 가벼웠다.
하지만 그 가벼운 파도에서 작은 일렁임이 일고 있었다.
박율의 한마디는 그 잔잔한 파도 위에 파문을 일으켰다.
눈치도 채지 못할 작은 파도가 그를 집어삼킬 때까지.
“꼭.”
오직 당신을 위해.
메마른 사막에 한줄기 빗물이 되겠노라.
* * *
씁쓸했다.
마치 입안에 모래를 한 주먹 털어 넣은 듯 텁텁하고, 불쾌한 쓴맛이 났다.
백봉기는 박율이 건네고 간 사람 모양의 항아리를 보았다.
울음을 터트리듯 인상을 지은 항아리의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마치 그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
그 말에 순간 백봉기의 심장이 아려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이미 괴물이 되고자 마음을 먹은 그에게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그를 사무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백봉기는 떨군 고개를 다시 들었다.
쿠구궁!!!
무너진 건물에서 굉음이 들림과 동시에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그 안에서 악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하늘 높이 뛰어올라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그를 제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사자들이 나타나며 이어지는 전투.
백봉기는 그들을 뒤로 발길을 돌렸다.
“드디어...”
때가 왔다.
모든 것을 뒤바꾸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백봉기는 항아리를 보았다.
이것으로 플라우로스라 불리우는 악마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저 멀리에서 악사회의 다른 일행들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백봉기는 손에 쥔 항아리를 해골 하나의 갈비뼈 사이에 넣어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