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내가 이 모습을 하게 된 데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서희는 날숨에 온몸을 뒤덮던 흑을 지우며 말했다.
건물에 가시를 완전히 뒤덮은 박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잔등을 씰룩였다.
“내가 그쪽 불렀슈? 자기가 찾아와놓고는. 완전 도둑놈 심보여. 아주.”
“...”
“근데 그쪽은 권능이 예언인데, 이렇게 될 거 모르고 온 거에요?”
“...전부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래, 뭐 그쪽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지.”
대상 혹은 시간을 특정해야 그 미래를 볼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니만큼 예상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긴 했다.
박율을 지켜본다는 명목하에 쫓아온 경매 자리에서 이런 참상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자, 그럼.”
박율은 박아두었던 가시를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칩시다.”
“...뭐?”
서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으로 본 상황은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 장기로 치면 장군이었다.
사람들을 모조리 대피시키고, 몰려드는 악마들을 죄다 해치운 데다가 딱 봐도 대장처럼 보이는 놈을 가두었다.
근데 도망이라니?
“여기부턴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거든요.”
박율은 서희를 지나쳤다.
어차피 이곳에 그들이 없더라도 사태는 막아진다.
그게 본래의 역사이니 말이다.
괜히 이곳에까지 쓸데없는 변화를 일으키긴 싫었다.
한국에서도 그가 저지른 일 때문에 개변한 것들이 넘쳐나는 데 이곳까지 그랬다가는 피곤해 죽을 터였다.
박율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다했어요.”
필요한 성유물들을 모두 모으고, 인명피해를 막았다.
그것만으로 할 일은 끝이었다.
나머지는 스페인의 사자들에게 맡긴다.
이 이상의 관여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뒤로 첨예한 날의 찬기가 느껴졌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익숙한 살기였다.
“뒤에...!!!”
“...거 참, 인연 참 끈질기다. 그치?”
박율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예상대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내려놔라.”
그리고 내뱉는 말이라곤 차가운 한마디뿐이었다.
흠칫, 박율이 움직이려하자 첨예한 날이 그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시큼한 고통에 박율은 표정을 구겼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박율의 목을 위협하고 있는 남자는 움직이면 죽이겠다는 듯 살기를 풍겼다.
“한 놈 말곤 아무도 안 죽인다며? 까마귀 아저씨.”
“...”
까마귀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뜨린 날을 그의 목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저기, 나 이제 가야 하는데 내놓을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박율은 목을 살짝 비틀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림자는 하나.
그의 뒤엔 까마귀뿐인 듯했다.
혼자라면 나쁘지 않다.
가시에 뒤덮인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처리한다.
박율은 건물 쪽에 남아있던 항아리의 연기를 불러모아 환영을 만들어 까마귀의 뒤에 소환했다.
“...”
까마귀는 흘깃 고개를 돌렸다.
“칼 내리지.”
박율의 환영은 말했다.
하지만 까마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움직이면 이 여자는 죽는다.”
박율이 발을 구르려는 순간, 서희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장에라도 싸울 듯 자세를 취했지만, 정체 모를 압력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곰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
“...움직이지마요.”
박율은 서희를 향해 말했다.
하필 곰이 나타나다니.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저 남자라면 말을 어기는 순간 서희를 죽일 수 있다.
쓸데없는 도발은 먹히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당장 유물을 내놓아라.”
곰 가면이 말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그의 말은 단호했다.
혹여나 허튼 생각을 한다면 당장에라도 여자의 목을 꺾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표정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어떻게 다른 수를 강구할 수 있을 테지만, 가면에 가려진 얼굴을 알 수가 없다.
서희는 놓으라며 발버둥을 쳤지만, 단단하게 잡힌 그녀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진정하고 움직이지마요.”
박율은 서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후...”
정공법이 어렵다면 꼼수를 쓴다.
“...오케이. 줄 테니까 여자는 놔줘.”
“유물 먼저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고? 사람 목숨을 장난으로 여기는 놈들인데?”
“그럼 여자가 죽는 걸 구경하는 수밖에.”
협상이 먹힐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딱딱하긴.”
쳇.
방법이 없구나.
박율은 오른손으로 불꽃을 피워 왼손으로 청동거울을 꺼냈다.
그의 행동에 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무슨 뜻이지?”
“가져가라고.”
“내가 말하는 유물이 그게 아님을 알 텐데.”
“잘 봐.”
이내 박율의 손에 있던 청동거울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거울 속에 유물이 나타났다.
곰이 찾는 손톱과 사람 모양의 항아리였다.
“꺼내서 가져가라고.”
“...”
박율은 얼른 가져가라는 듯 손을 살짝 흔들었다.
곰은 살짝 시선을 내려 청동거울을 보았다.
거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것은 마치 성유물을 보관하는 창고처럼 보였다.
곰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박율을 보았다.
‘가져가지 마라... 속아라 제발...’
박율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말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빈틈이 보이면 끝장이다.
“...”
그리고 다행히 곰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꺼내라.”
“왜?”
“그게 장난질일지 어떻게 알지?”
“그렇게 사람을 못 믿으면 쓰나.”
“...”
박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동거울에 손을 집어넣었다.
은색으로 빛나던 거울에 손이 닿자 거울의 표면에 파문이 일며 일렁거렸다.
그리고 다시 박율이 손을 꺼냈을 때, 그의 손엔 손톱과 사람 모양의 항아리, 그리고 선홍빛 갑주가 있었다.
“됐냐?”
박율은 유물을 높이 들었다.
곰은 그것을 달라는 듯 손을 들었지만, 박율은 다시 유물을 가져갔다.
“여자부터 풀어.”
“다시 말하지만, 유물이 먼저다.”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오케이, 그럼 하나, 둘, 셋하면 놓는거다.”
“여자가 죽는 걸 보고 싶은건가?”
“그럼 나도 이거 못 내놓지.”
“...”
곰과 까마귀는 박율의 능력이면 여자를 포기한다면 충분히 유물을 가지고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까마귀의 뒤를 차지한 박율까지 보이니 선뜻 공격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곰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대강 긍정의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하나.”
박율은 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흘깃 까마귀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직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유물이 박율의 손에 있는 한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그런 듯했다.
그간 그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만 했으니까.
“둘.”
곰이 힘을 풀기 시작했다.
“움직이지마요.”
박율이 말했다.
괜히 움직였다가 곰이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문제가 된다.
셋을 외치는 순간, 진흙탕 싸움이 시작될 터.
박율은 눈동자를 굴려 전황을 살폈다.
서희는 여전히 곰의 힘에 짓눌려 부들대고 있었고, 까마귀는 박율의 목에 칼을 가져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뒤로 환영이 기다란 검을 까마귀에게 겨누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말이 많군.”
“셋...”
박율은 셋을 외치는 순간, 유물을 높이 던졌다.
동시에 까마귀의 검이 나선으로 돌아 그의 뒤에 있던 환영을 꿰뚫으며 가속을 유지한 채 박율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박율은 재빨리 칼이 날아드는 부위를 재빨리 코어로 감쌌다.
캉!!!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곰의 시선이 분산됨과 동시에 힘이 약해진 때를 노려.
[신속]
서희를 먼저 구출한다.
순식간에 날아간 박율의 몸이 서희를 품에 안고 저 멀리로 날아갔다.
콰당탕!
“후... 괜찮아요?”
박율은 품에 안은 서희를 놓아주며 물었다.
그의 품에서 서희는 벙찐 얼굴로 박율을 보았다.
“뭐...뭐야...”
“뭐긴 살려준 거죠.”
그리고 박율은 고개를 돌려 까마귀와 곰을 보았다.
두 사람은 박율이 던진 유물을 잡은 상태였다.
박율은 그런 그들을 보며 싱그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런 말 들어봤나? 모조품에 주의하라는.”
박율이 입을 열자, 두 사람의 손에 있던 유물들이 연기처럼 허공에서 흩날렸다.
일명 환영거울.
거울에 비춘 물건의 환영을 만드는 성유물이었다.
혹시 이럴 일이 있을까 싶어 몰래 환영거울에 유물들을 비춰놓았더니, 아주 기다렸다는 듯 일이 벌어졌다.
곰과 까마귀는 아주 살기 어린 눈으로 박율을 보았다.
“그러게. 명품 확인서는 가져갔어야지.”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이 말을 시작으로 까마귀는 손에 쥔 일본도를 모로 잡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함께 곰이 발을 떼었다.
“서희 씨, 싸워야 할 거 같아요.”
“널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그러게, 누가 오래.”
서희는 짜증 섞인 한숨을 팍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 태세를 취했다.
박율 역시 양손에 검 한 자루와 망치를 소환했다.
저 멀리에서부터 발을 구른 곰이 달려들자 서희가 야차화하여 그를 막아섰다.
동시에 까마귀의 그림자가 박율과 서희 사이에서 나타나며, 박율은 허리를 비틀어 검을 휘둘렀다.
차악!
검은 그림자의 형상을 베지만, 까마귀는 박율의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챙!!!
박율은 망치를 쥔 손을 목 뒤로,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그리고 망치를 놓고는, 발을 돌려 까마귀의 정면으로 주먹을 휘두름과 동시에 망치를 다시 소환했다.
챙!
까마귀의 안면을 가격한 망치는 그의 일본도에 막혀 쇳소리를 울렸다.
“오랜만이네. 까마귀 아저씨.”
“...”
까마귀는 대답 대신 쾌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척후]
챙!
두 사람의 합은 이어졌다.
일본도가 박율의 검을 내려찍으면 박율은 망치로 빈틈을 놀렸고, 망치를 피한 까마귀는 다음 공격이 준비되는 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싸움이었다.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전투.
공격과 공격 사이 간극, 대상과의 간극, 들숨과 날숨의 간극.
아주 작은 빈틈 하나가 승부의 결을 갈무리한다.
박율은 온 신경을 정면의 남자에게 집중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두 사람의 호흡과 흩날리는 쇳소리.
고무줄처럼 팽팽해지는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기세는 기울었다.
아무리 박율의 권능이 강력하다한들 까마귀의 검술을 완전히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차악!
미처 막지 못한 검날이 박율의 허리춤을 베고, 공격 사이 간극을 노린 검에 복부를 찔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율은 호흡을 놓치지 않고 망치와 검을 휘둘렀다.
저울로 따지면 까마귀라는 추에 무게가 더해지는 상황이었다.
익숙한 이야기의 끝은 보통 예상이 가능하기 마련이었다.
지금처럼.
벌어지는 간극은 까마귀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고, 그것은 곧 박율의 죽음으로 귀결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율 씨!!!”
“...끈질기군.”
저 멀리에서 익숙한 음성과 함께 싸움의 간극을 채워줄 얼굴들이 나타난다.
쾅!!!
날아든 킹콩의 거대한 몸집이 까마귀의 몸을 짓밟으려는 순간, 까마귀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행들의 등장으로 가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