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콰앙!!!
날아간 마기는 박율을 꿰뚫고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차올랐다.
[...?]
악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마기가 인간의 몸을 관통했건만 인간이 보이질 않았다.
죽은 것이라면 그 시체가 남을 것이고, 도망친 것이라면 그 흔적이 남을 테지만, 말 그대로 사라졌다.
[한눈을 팔다니.]
데판의 목소리였다.
흠칫, 악마가 재빨리 고개를 돌린 순간, 데판의 커다란 주먹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이미 그를 집어삼킨 상태였다.
이윽고.
콰앙!!!
데판의 주먹과 악마의 몸뚱이가 동시에 바닥에 내리찍혔다.
[큭...!]
악마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을 내려찍은 주먹을 막았다.
두 다리가 돌바닥을 파고들고, 주먹을 막은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쿠구궁!!!
[이까짓...!!!]
악마는 악을 지르며 자신을 내려찍는 주먹을 옆으로 날렸다.
쾅!!!
떨어진 주먹은 바위가 내려앉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비겁한...]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주변엔 누구도 있지 않았다.
그와 자웅을 겨루던 데판을 비롯해, 마기에 맞아 죽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남자와 그의 곁에 있던 여자 역시.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악마는 눈을 굴렸다.
말 그대로 인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가 서 있는 그 공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
[...어디로 간 것이냐.]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척.
악마는 그곳을 향해 마기를 날렸다.
쾅!!!
하지만 역시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이젠 쥐새끼마냥 꽁무니를 빼는 것이냐?]
흠칫.
그의 뒤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악마는 그곳을 향해 힘을 내리찍었다.
시멘트로 이루어진 돌바닥이 그의 힘에 찌그러졌다.
[...무엇이냐.]
찌그러진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딜 보냐?”
악마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쫓아 힘을 다시 한 번 내리찍었다.
쾅!!!
이번엔 분명했다.
누군가 있었다.
데판을 거두고 있던 남자가 분명히 있었다.
[...?]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환각을 보는 것인지.
찌그러진 바닥과 그 위에 있는 것이라곤 떨어진 먼지와 돌조각 밖에 없었다.
“여기다!!!”
또 뒤였다.
[나를 놀리다니...]
악마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마기를 날렸다.
쾅!!!
마기가 폭발했다.
“야.”
악마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분명 마기에 관통당했던, 그리고 그의 힘에 짓눌렸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로 말이다.
[대체 무슨...?]
“그게 끝이냐?”
남자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악마가 보고 있는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소리 역시 그의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악마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남자가 있었다.
[언제 거기로 이동을...]
“난 여기 있는데?”
다시 고개를 돌려도 남자는 서 있었다.
악마의 앞뒤로 남자는 서 있었다.
[오호... 그렇군. 화신(化身)이 네 능력인가보군.]
악마는 들끓는 분노를 마기로써 표출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한 번에 모조리 죽여주지.]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양옆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묘목의 가지가 나무가 되기 위한 갈무리를 하듯 마기는 영역을 넓히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 마기는 양옆에 서 있던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마기는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뭐하냐?”
남자는 말했다.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하게.
얼른 자신을 죽여보라는 듯 거만한 표정을 하고 말이다.
“뭐라도 좀 해봐.”
악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다른 이의 소리였다.
아니,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그가 보고 있는 두 사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악마는 눈동자를 굴렸다.
역시나 그의 측면으로 팔짱을 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내가 간다.”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발을 굴렀다.
하나가 아니었다.
세 방향에서, 아니 다섯 방향이었다.
남자는 달려들었다.
첫 번째 남자가 망치를 쥐고 악마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 망치는 악마를 관통하고 사라졌다.
두 번째 남자의 망치는 악마의 밑에서 치고 올라왔다.
악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어 피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르지만, 닿지 않았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그리고 다섯 번째도.
전부.
마치 신기루를 보기라도 하는 양 그들은 달려들었고, 사라졌다.
다섯이 사라지면 여섯이 나타났고, 여섯이 사라지면 일곱이 나타났다.
“빡치냐?”
달려드는 남자들 사이 유일하게 저 멀리에서 구경을 하던 남자가 말했다.
[...네가 본체로구나.]
악마의 말에 수십 명의 남자들이 흠칫 당황한 듯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악마를 막기라도 하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하지만 악마는 사라졌다.
그리고 남자의 앞에서 나타났다.
남자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이냐?]
남자는 떨었다.
공포를 마주한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악마는 살기를 내뿜었‘다.
갑자기 공포에 떨던 남자의 어깨가 차분해졌다.
그리고 입은 연다.
“내가 알아야 돼?”
악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려찍었다.
콰앙!!!
땅이 갈라지고, 주먹이 닿은 근방이 패였다.
[...]
남자는 사라졌다.
“아, 그거 본체 아니었어? 난 본체인 줄 알았네.”
악마의 뒤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같이 내뱉었다.
귀를 후비기도, 아니면 코를 파기도, 악마의 화를 돋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구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콰직!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악마의 관자놀이를 타격했다.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악마의 마지막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분노와 마기에 잠식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누가 본체인지 알 수 없다면 전부 없애버리겠다.]
악마는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을 내뻗는다.
길게 뻗은 손에서 검은 마기가 넘실거렸다.
마기는 남자가 서 있는 근방 모든 바닥에 깔렸다.
그리고 유압프레스를 누르듯 내려찍는다.
서서히.
[죽어라.]
악마의 말이었다.
* * *
흙먼지가 날리는 경매장을 빠져나온 박율은 망토를 고이 접어 불꽃 속에 집어넣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이세진과 킹콩이 만든 탈출구를 따라 도망치던 박율은 흘깃 뒤늦게 쫓아오는 데판을 보았다.
[흠.]
“뭐 한다고 이렇게 늦게 와요?”
고양이의 형태로 되돌아온 그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뛰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
“각별한 사이 맞나보네.”
[각별한 사이지. 돌멩이로 인사를 주고 받는...]
“그새 돌 던지고 왔어요? 역시... 나한테 잘 배웠어. 어떻게 해야 남을 빡치게 만드는 줄 안다니까.”
“그냥 이렇게 도망치면 되는 거야!?”
박율을 쫓아 발을 구르던 서희가 소리쳤다.
“왜요? 다시 가서 싸울라고? 병풍이 그리워요?”
“아니...!!!”
“괜찮아요. 전략이라니까.”
박율은 자신의 손에 있는 항아리를 가리켰다.
그의 손에 있는 사람 모양 항아리에선 끊임없이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그들이 도망쳐온 길을 가로질러 경매장으로 스며 들어갔다.
“항아리 능력이에요. 소유자의 환영을 소환하는. 아마 지금쯤 저 악마, 저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을 거에요.”
쿠구궁!!!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경매장에서 땅이 내려앉는 소리가 울렸다.
박율은 서희를 보며 뒤쪽을 가리켰다.
“저렇게?”
박율은 그러고는 태연하게 다시 밖으로 향했다.
“그래서? 이게 끝이라고?”
서희는 어서 이 상황에 대해 부가 설명을 해달라는 얼굴로 박율을 보채고 있었다.
박율은 자신만 잘 따라오라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 저 정도로 저 악마를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단 빠져나가요. 나가서 설명해줄게요. 지체할 시간이 없거든요.”
박율은 일단 따라오라며 빨리 설명하라는 그녀의 질문에도 출구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기나긴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왔을 때, 역시나 경매장이 진행되던 파티장 일대는 이미 마인들과 마수들로 득실거렸다.
박율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이들은 이미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몰려드는 악마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서희는 눈을 의심하는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사이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왜 하필 오늘 온 거냐고 물은 거에요.”
“이...게...”
“우리로 치면 남산타워 사태랑 비슷한 거죠.”
박율은 이제 됐다는 듯 항아리의 불을 껐다.
쿠구궁!!!
두 사람, 아니 동물 하나와 두 사람이 완전히 건물을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뒤로 건물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마치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이 부서진 듯 건물은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쿠궁!!!
“...!!!”
서희의 눈이 흰자위까지 드러내며 충격을 표현했다.
아마 오늘 하루종일 저 눈이 감길 일이 없을 듯했다.
건물이 완전히 내려앉고, 건물에서 뿜어져나온 흙먼지가 일대를 전부 장악하자 박율은 서희를 지나쳐 빠져나온 입구로 다시 걸어갔다.
그리곤 쇠로 된 가시를 하나 꺼냈다.
“원래는 마인들이랑 마수들을 건물에 가두려고 했던 거였는데.”
그는 가시를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푹!
땅 깊이 파고든 가시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푹 하며 가시 옆으로 또 다른 가시가 튀어나왔다.
가시는 증식이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더 많은 가시를 만들어냈다.
마치 고슴도치가 위협에 가시를 돋우듯 솟아오르는 가시는 점차 건물의 지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서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박율을 보았다.
“거, 죄송한데 계속 그렇게 눈 땡그랗게 보고 있을 거면, 저기서 우리한테 시비 걸 거 같은데 처리 좀 해주실래요?”
박율은 턱으로 서희 너머를 가리켰다.
그녀는 흠칫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저 멀리에서 박율이 지닌 성유물들을 눈독 들이는 마수 몇 마리와 마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희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박율을 보았지만, 그는 얼른 하라며 그녀를 닦달할 뿐이었다.
“내가 정말...”
저 건방진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방 때리고 싶었지만, 서희는 한숨을 팍 내쉬며 발을 돌려 다가오는 악마들을 보았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러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호리호리한 몸을 자랑하던 서희가 한 발자국 발을 내딛자, 흑으로 가득한 주먹이 나타나고, 또 한 걸음 내딛자 온몸을 지탱하던 두 다리는 검게 물들어 헤라클레스의 다리를 연상케하는 기둥으로 변했다.
그리고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자.
그녀, 아니 서희였던 무언가에게 달려들던 악마들의 흔적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