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넌 언제나 최고여야해.”
서희가 살아오며 셀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완고했다.
언제나 그녀가 최고이길 바랬다.
지면 안 된다고.
패배한다는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무언가라고.
어머니는 지병에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녀에게 말했다.
언제나 승리를 쟁취하라고.
어디에서든, 무얼하든.
“절대 지면 안돼.”
그리고 이기적이게도 죽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각인된 그 말의 의미는 그녀가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는 숨을 쉴 때조차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있어 패배는 치욕이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 위에 서 있는 누군가여야 했다.
그녀는 노력했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예술이라는 것은 재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노력과 재능의 결합은 그녀를 피라미드의 정점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따라붙었고,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한 피라미들이 따라붙게 만들었다.
“이게 그림이냐?”
하지만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 중에 단 하나, 정점에 서지 못한 한 가지.
좋은 말로는 스승, 나쁜 말로는 악연.
언제나 1등을 고수하던 그녀를 처음으로 꼭대기보다 아랫 계단에 내던진 남자가 나타났다.
유일하게 넘지 못하는 산이자 건널 수 없는 바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같은 존재였다.
아득바득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람.
“선은 그렇게 투박하게 그리는 게 아니란다.”
“거기서 그 색채는 이상한 거 같지 않느냐?”
“그리고 싶다고 그리는 게 전부 그림은 아니지.”
치욕스러웠다.
스승은 그녀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유일한 재능을 짓밟기를 망설이지 않았으니까.
서희는 그를 넘어서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했지만 도저히 그를 넘을 수 없었다.
그는 자유로웠고, 방탕했다.
원로들이 추구하는 틀을 그는 무시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작품 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고, 최고가 될 수 있었다.
서희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스승의 존재는 유일한 안식처였으니까.
어머니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최정상에 목매지 않아도 되는, 정점이라는 극점에 다가가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장소였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안식처였던 어머니를 잃고 처음으로 마주한 편안함이었다.
닿을 수 없기에, 그저 그 뒤를 쫓을 수 있기에.
목을 옥죄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서희는 스승의 앞에서 편안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면 죽냐? 가끔 져도 돼.”
그는 언제나 서희에게 말했다.
이기는 것에 목매지 말라고.
하지만 그 편안함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스승 역시 그녀의 곁을 떠나면서 그녀는 또 다시 혼자 남겨졌다.
아니,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었다.
원로가 정한 규칙을 끊임없이 무시하는 그에 대한 보복성 사고였다.
“그렇게 지는 게 싫으냐...?”
“...”
“지면 어디 건물이라도 무너진다니?”
죽음 앞에서도 스승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란다. 얘야.”
스승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서희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 * *
“그렇게 지는 게 싫어요?”
“...”
“지면 어디 건물이라도 무너진 답니까?”
서희는 벙찐 얼굴로 박율을 보고 있었다.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
패배라는 것을 안겨준 스승과 똑같은 굴레를 거니는 남자가 말을 했다.
서희는 자리에 굳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이들과 그의 모습이 겹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생김과 동시에 박율은 사라졌다.
쾅!!!
“큭... 뭘 멍하니 있어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그녀의 뒤였다.
서희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박율은 커다란 실뭉치를 막고 있었다.
“...!”
박율은 냅다 막고 있던 방울을 옆으로 튕겼다.
쾅!!!
땅에 떨어진 실뭉치는 바위가 내려앉은 듯 묵직한 소리를 울리더니 가닥가닥 풀려 풍선에 담긴 물마냥 퍼졌다가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이야.”
소리와 함께 저 멀리에서 고양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나타났다.
“...질척이는 여자는 매력 없는데.”
그녀는 회수한 실뭉치들을 얇은 가닥으로 바꾸어 다시 박율을 향해 날렸다.
[척후]
챙!!!
박율은 재빨리 코어를 검의 형태로 바꿔 날아오는 실가닥들을 튕겼다.
고작 실가닥이 어찌나 단단한지 쇳소리가 울렸다.
그의 뒤에서 일행은 그를 지키려 움직였지만,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속도의 실들을 뚫고 박율을 도울 수가 없었다.
“그거 내놔.”
고양이는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실들을 날리며 박율이 쥐고 있는 유물을 가리켰다.
박율은 간신히 실들을 튕겨내며 고양이를 보았다.
“이건 좀 치우고 부탁하지...!”
“치우면 줄 거야?”
“그건 아닐걸?”
“그럼 죽어야지.”
챙!!!
“그것도 싫으면?”
“닥쳐.”
고양이는 속사로 쉴새 없이 실가닥을 내뿜었다.
차악!
날아든 실가닥 하나가 박율의 어깨를 스쳤다.
실가닥을 따라 흐르는 핏물이 서희의 눈두덩이에 떨어졌다.
“저기...! 거기 계속 있을 거에요? 도와주던가 아니면 어디로 좀 가던가...!”
박율은 흠칫 뒤에서 멍하니 서 있는 서희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박율을 보았다.
그는 피할 수 있는 공격마저 서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젠 조금 힘들거든요?”
“아...”
“다들 계획알죠? 저 떼껄룩은 제가 상대할 테니까, 다들 움직여요.”
박율의 지시에 그의 일행들은 알겠다는 듯 비장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움직이려는 찰나.
“어딜 가려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등장했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개구리 가면을 쓴 채 일행의 길을 막았다.
“갈 거면 어제 훔쳐 간 손톱이랑 항아리 내놓고 가.”
“네가 주인이여?”
개구리의 말에 최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뭐 주인은 아니긴 한데... 안 준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일행들 사방에 커다란 방울들이 나타났다.
“건들지 마요!!!”
박율은 재빨리 소리쳤다.
그의 말에 전투태세를 취한 일행들은 흠칫 자리에 굳었다.
하지만 이미 방울은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닿으면 폭발해요!!!”
박율이 말을 채 내뱉는 순간, 바람결에 떠다니던 방울 하나가 툭 하고 한지원에 닿으며 폭발했다.
“...!!!”
반사적으로 박석훈이 달려가 폭발을 막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움직임은 더 많은 연쇄폭발을 일으킬 뿐이었다.
순식간에 연달에 터지는 방울에 경매장에 뿌연 연기가 들어섰다.
“미친...”
저 정도 폭발이면 생채기로 끝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들 괜찮아요!?
박율은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안돼...!“
“감히 한눈을 팔아?”
박율이 일행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고양이의 커다란 주먹이 박율을 내리찍었다.
“...!!!”
이번엔 피할 수 없었다.
박율은 코어를 방패 형태로 바꿔 주먹을 막았다.
콰앙!!!
방패와 경화가 무색할 정도로 온몸을 저리게 만드는 강력한 충격이었다.
충격에 폭풍 같은 바람이 일 정도였다.
“크윽...!”
“이번엔 제대로 붙어보자고.”
고양이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살벌했다.
이전에 쌓인 앙금이 아주 걸쭉해진 듯했다.
하지만 박율의 시선은 여전히도 그의 일행을 향하고 있었다.
“...!!!”
폭발로 인한 연기가 걷히고.
그 중심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서희...?”
검게 뒤덮힌 그녀의 몸이 폭발로부터 일행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무사한 것을 파악하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흘깃 박율을 보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박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고양이는 그 모습조차 아니꼬운지 또다시 공격을 날렸다.
박율은 반사적으로 땅에 닿을 듯 몸을 뉘어 공격을 피했다.
“죽고싶나보지?”
“거참, 질척이는 여자는 매력 없다니까...!”
박율은 연달아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곤 망치를 소환해 고양이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망치는 고양이에게 닿지 않았다.
닿기 직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만들어진 실이 망치를 막았다.
“이런 걸...”
“훼이크라 그러지.”
박율은 말했다.
동시에 망치 끝에 달린 구슬이 쩌적 갈라지며 불꽃을 내뱉었다.
이윽고 펑!!!
구슬에서 폭발하는 불꽃이 고양이를 덮쳤다.
박율은 그 사이 방울 사이 갇힌 일행들을 보았다.
“율 씨...!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어차피 악사회가 찾아올 거라 생각은 했다.
“다들...”
박율은 입을 열었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 그새 폭발 속을 빠져나온 고양이는 어림도 없다며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콰앙!!!
박율은 반사적으로 땅을 박차고 뛰었다.
동시에 고양이의 주먹을 피하던 그를 향해 다른 주먹이 날아들었다.
콰당탕!!!
날아간 박율은 땅바닥에 처박혔다.
“큭...”
박율은 주먹에 얻어맞은 복부를 매만지며 부서진 땅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어우, 이젠 말도 못하게 하네. 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든다는데! 고양이라 그러냐!?”
“그거 내놔.”
“이거 주면 곱게 보내줄 거냐?”
“...아니?”
“그럼 내가 왜 줘야 하는데?”
“...알았어. 그거 주면 살려줄게.”
“이거만 주면 되는 거지?”
박율은 손에 쥐고 있던 팔찌 형태의 유물을 들어보였다.
고양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먹잇감을 찾은 맹수의 눈빛이었다.
“내놔.”
“그래? 그럼 가져가봐.”
박율은 팔찌를 멀리 던졌다.
고양이의 시선이 팔찌를 향하는 순간, 박율은 왼손에 그려진 척후 문양을 지웠다.
그리고.
[유리]
권능을 개방함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피어난 불꽃은 고양이의 발끝부터 그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진실의 방이지.”
“이...”
날아간 팔찌를 집으려던 고양이는 갑작스레 발에 붙은 불길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내 박율의 소행인 것을 깨닫고 그를 향해 실가닥을 날렸다.
“...!!!”
날카로운 실가닥이 박율의 눈을 꿰뚫기 직전, 다행히 실가닥은 힘을 잃고 떨어졌다.
“놀래라.”
고양이의 몸이 전부 사라지자, 박율은 왼손의 유리를 다시 척후의 문양으로, 오른손의 경화를 지우고 신속의 문양으로 바꾸었다.
고양이의 몸이 유리된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신속]
박율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는 재빨리 코어를 단검의 형태로 바꿔 일행들을 가둔 방울들을 모조리 터트렸다.
그리고 터진 방울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신속]
또 다시 박율의 몸뚱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