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잠깐...”
“360만 달러.”
“370만 달러!!!”
진짜 미쳤나보다.
박석훈은 일주일을 굶어 음식 앞에 눈 돌아간 개마냥 피켓을 높이 들었다.
“400만 달러.”
“420만 달러!!!”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박율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박석훈을 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또 처음이었다.
결의에 찬 얼굴이 아주, 누가 보면 일생일대의 대결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550만 달러.”
“저기 석훈 씨?”
“560만 달러!!!”
“석훈 씨.”
“600만 달러.”
“630만...”
“석훈 씨.”
박율은 피켓을 들어올리려는 박석훈의 손을 막았다.
더 이상은 안된다.
장대호 회장에게 양쪽 뺨을 내어줄 각오로 경매장으로 왔긴 했지만, 이건 양쪽 뺨으로 끝나지 않는다.
최소 못해도 어디 뼈 하나는 내놔야 할 정도였다.
“전 포기 못해요.”
“아니 왜...”
박석훈은 자신의 손을 막은 박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떼었다.
“고개는 왜 끄덕이는데...”
“630만 달러!!!”
저 미친...
“650만 달러.”
아니, 저 양반은 또 왜 저렇게 값을 높이 부르는 건데.
저 양반은 저 유물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6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서까지 사려고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박율은 마른 세수를 했다.
“저 미친...”
“육백!!! 육십!!!”
정정한다.
미친 사람이 둘이나 있다.
박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680만.”
“육백!!!”
“제발 그만 좀...”
“팔...”
“제발.”
박율은 살벌한 미소를 선보이며 박석훈의 질주를 막았다.
그의 팔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피켓을 들려는 의지가 막강하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다.
박율은 제발 그만하라는 듯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주 우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유물이 갖고 싶어요...”
하, 나.
이걸 때릴 수도 없고.
“굳이 지금 안 이래도 구할 수 있으니까. 좀 참아요.”
“그래도...”
박율은 마치 칭얼거리는 애를 달래듯 박석훈을 진정시켰다.
그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팍 내쉬며 피켓을 내렸다.
드디어 포기했다.
박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를 토닥여주었다.
진행자는 다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박율과 박석훈을 보는 그 눈빛은 빨리 손을 들라는 듯 강렬했다.
하지만 박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훗.”
아주 도도한 콧소리를 낸 건 서희였다.
그녀는 카운트가 내려가는 동안 흘깃 박율을 보며 승리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듯했다.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서희라는 양반한테 미술관 테러와 그림을 부순 일은 패배나 다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무시하려 했지만, 서희는 마치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저 거만한 모습을 봐서는 안됐다.
‘뭘봐?’
뭘봐...?
허, 그래, 뭐.
어차피 사지도 못할 거,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깽판이나 쳐보자.
“...석훈 씨, 가만 생각해보니까 잘못 생각한 거 같아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를 베든 고기를 썰든 해야죠. 그쵸?”
“네? 유...율 씨?”
박석훈이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만류하던 입찰을 박율이 피켓을 든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를 겨냥해서.
‘쫄리면 뒤지시던가.’
박율의 행보에 서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녀 역시 피켓을 높이 들었다.
* * *
“1230만 달러.”
길어야 10분 남짓으로 예상되었던 경매는 30분 가까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참여자는 둘 뿐이었다.
박율과 서희.
다른 이들은 그저 둘의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1300만 달러.”
고작 박율을 꺾기 위해서 저런 거금을 들이는 게 맞는가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저 유물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양반이 말이다.
“1350만...”
“1400만 달러.”
“오케이, 1500만 달러. 이번에도 쫓아오냐?”
박율은 한쪽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서희를 보았다.
그녀는 이를 빠득 갈며 박율을 보았다.
아마 이렇게까지 갈 줄은 몰랐겠지.
암만 그녀가 돈이 많다한들 저 유물 하나에 저만한 거금을 쓰고 싶진 않을 거다.
상대가 박율만 아니라면 말이다.
서희는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이내, 차분한 얼굴로 다시 피켓을 들었다.
“1600만 달러.”
그리고는 어디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듯 새침한 얼굴로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그녀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는 피켓을 잡았다.
하지만 들어 올리진 않았다.
“훗!”
서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기가 이겼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박율은 피켓 대신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트는 시작되었지만, 그는 피켓을 들지 않았다.
아예 피켓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더 이상 경매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야 1600만 달러나... 한국돈으로 얼마지? 100억이 넘는 거금을... 크...”
박율은 아예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쳐 주었다.
한껏 승리에 만끽하고 있던 서희는 무언가 일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팍 지었다.
표정으로 봐선 당장에 온갖 쌍욕을 날리려 하는 듯했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겠지.
박율은 통쾌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젠가 저 콧대를 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왕왕 했었는데, 그게 지금일 줄이야.
박율은 대신 으쓱거리는 어깨로 자신의 승전보를 울렸다.
카운트는 벌써 3을 지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피켓을 든 이는 서희뿐이었다.
언제든지 침착하고 냉철한 판단을 하는 양반이 이런 승부와 관련해서는 미친개마냥 뛰어드는 게 참 어이가 없었다.
아주 이기려고 발악을 해대는 게, 참.
“four!”
카운트가 마지막 하나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서희는 조금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얼굴로 진행자와 박율을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진행자가 마지막 숫자를 외치려는 순간.
“자...잠깐...!”
서희는 입을 열고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너 뭐하는 짓이야!?”
서희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야!!!”
“어머, 나요?”
박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왜요~?”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긴 너무 비싸서 입찰을 포기했습니다만.“
”아니...“
”왜? 대신 사주려구요?“
”너... 일부로 그런 거지!?“
”제가요? 아뇨, 돈이 없어서 그렇다니까요? 제가 어떻게 1600만 달러를 구해요?“
”야이!!!“
서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표정으로써 표현했다.
진행자는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이내, 스페인어로 구성된 낙찰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박수 소리와 함께 낙찰이 끝나자 서희는 당황스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함께 박수를 치던 박율은 그런 그녀를 보며 터질 듯한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경매에서는 패배했을지언정 현실에서는 박율이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너 이씨...!!!“
서희는 주먹을 꽉 쥔채 박율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박율의 손에서 하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흠칫,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보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이들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들과 몇 보 떨어져 있던 서희의 손에서도 역시.
박수를 치던 박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여러분들 준비합시다.“
쾅!!!
진행자가 다음 순서를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경매장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벽 너머에서 나타난 것들은 다름 아닌 악마들과 마수들이었다.
그것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차악!!!
진행자의 곁에서 마치 그를 지키듯 서 있던 경호원의 손이 진행자의 가슴팍을 크게 베었다.
“커헉...!!!”
그리고는 마인은 진행자를 집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흠칫, 사람들이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사이, 함께 있던 다른 경호원들과 경매에 참석한 이들 몇몇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움직였다.
그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의 몸을 난도질하며, 경매장에 난동을 피웠다.
그들의 등장으로 경매장과 파티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남아있던 경매장의 사람들은 마인들과 악마들의 습격에 대피를 시작했다.
물론 박율 일행과 서희를 제외하고 말이다.
“세원 씨.”
“네...네!?”
“제가 저 유리관 부수면 유물 아래쪽으로 활 쏴요. 하나둘셋. 지금!”
진행자에게 큰 상처를 입힌 마인은 혼란을 틈타 경매장의 중심에 있던 ‘선홍빛 갑주’를 훔치는 중이었다.
다른 마인들 역시 경매에 나왔던 그리고 나올 유물들을 챙기고 있었다.
박율은 그 사이로 망치를 던졌다.
날아간 망치는 경매장 중심의 유리관을 깼고, 뒤이어 날아간 하세원의 화살이 그 아래를 차지했다.
타오르는 불꽃은 성유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성유물은 하세원이 바닥에 만든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서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악마들의 침공에도 굴하지 않고 박율에게 다가갔다.
“뭐가요?”
“그걸 네가 왜 가져가!?”
“아, 떨어져 있길래 주웠어요. 원래 떨어져 있는 건 줍는 사람이 임자잖아요. 그쵸?”
“이...”
서희는 그의 말에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녀의 뒤로 마인 하나가 달려들었다.
마인은 박율의 손에 있는 유물을 노리는 듯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쾅!!!
새카맣게 변한 그녀의 손은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단숨에 내려찍었다.
바닥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내려 찍힌 마인은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내놔...”
“뭐 1600만 달러 주고 이거 사실려고?”
“...닥쳐.”
서희는 이를 빠득 갈며 박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척후]
빠르긴 또 어찌나 빠른지 권능을 쓰지 않고서는 쫓지도 못할 정도였다.
박율은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높이 뛰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희의 다른 쪽 팔이 박율을 내려찍었다.
[경화]
콰과광!!!
찰나의 순간 경화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그 충격은 실로 강력했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큭...”
“내놔...”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이게 뭔 줄 알고 100억이 넘는 돈을 써가면서까지 차지하려고 해요?”
“닥쳐!”
서희는 또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박율은 코어를 천장에 박아넣어, 그 반동으로 몸을 굴려 주먹을 피했다.
“잘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이걸 훔쳐 가서 그쪽이 ‘어쩔 수 없이’ 못 사게 되면 그 돈 쓸 일 없어요.”
“...”
“아, 예. 아니면 가져가요. 그리고 돈 내던가.”
서희는 박율의 말에 한껏 빡친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박율이 건네는 유물을 가져갈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라지만, 100억이라는 돈이 푼돈도 아니고.
서희는 박율이 건네는 팔찌와 박율을 번갈아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흠칫.
“그렇게 지는 게 싫어요?”
“...”
“지면 어디 건물이라도 무너진답니까? 거 뭐, 사람이 살다보면 지고 하는 거지.”
당장에라도 박율을 죽일 듯하던 서희는 벙찐 얼굴로 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동의를 한다는 뜻이겠지.
“그럼 그렇지.”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뒤로 커다란 실뭉치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