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박율은 눈을 의심했다.
“저 아줌마가 여기 왜 있어?”
서희가 경매에 참석한 적이 있었던가?
그가 알고 있기로 서희가 경매에 참석했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끔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거나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참여했단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림에 미쳐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행사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시간이 아깝다고 했었던 게 여전히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 왜...?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서희의 눈이 박율을 향했다.
“안녕.”
그녀는 박율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거만한 얼굴이었다.
“...그쪽이 여기 왜 있어요?”
“왜 있긴 경매장에 경매하러오지. 마작하러 오냐?”
“그러니까 그쪽이 왜 있는 거에요? 경매는 하지도 않는 양반이! 그리고 하필 와도 오늘이에요?”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내가 경매를 하는 지 안 하는 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 뭐 알 만큼 알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아주 알기 싫을만큼 잘 안다고 말하고 싶지만, 저 눈빛을 봐선 그걸 말했다가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놔야 직성이 풀릴 성싶었다.
“그냥 뭐 여차저차해서...”
박율이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자, 서희는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내가 왜 왔냐고?”
“...”
박율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대충 그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서희는 앙칼진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박율은 매섭게 쏘아보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궁금했거든. 네가 도대체 뭐하는 놈인지.”
“에?”
“도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남의 미술관에 와서 그림들을 전부 박살내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지 말이야.”
“그건 죄송하게...”
“그리고 어떻게 내 스승님과 내 관계를 알고, 내가 어떻게 하면 빡칠 수 있는 지를 아는지도 말이야.“
“...큼.”
그제야 깨달았다.
나 때문이구나.
박율은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다.
갑자기 일들을 성급하게 진행하다보니 그 여파로 서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망할.
“그래서 뭐하는 놈인지 알아보려고 찾아왔지.”
“...근데 내가 여기 오는 건 어떻게...?”
“길드 율에 내 지인이 있어서 말이야.”
“지인이요...?”
아, 장대호 회장...
퍼즐이 맞춰지다 못해 퍼즐째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박율은 다시 이마를 탁 짚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게요?”
“뭐가?”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알아본다면서요.”
“그냥 뭐 계속 지켜보려고.”
“인기가 많아지면 파파라치가 생기고 스토커가 생기는 건 알겠는데, 그게 그리 썩 좋지만은 않네요.”
서희는 뭐라는 것이냐며 인상을 팍 지었다.
“뭐, 알아서 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알아서 할 생각이다만.”
“웬만하면 돌아가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생각 없죠?”
“당연히.”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몸조리 잘하시고.”
이 사람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도움이 됐으면 됐지.
야차라 불리는 이 사람의 능력은 그만큼 요긴하니까 말이다.
박율은 혀를 내두르며 그녀를 지나쳤다.
뒤에서 그들의 신경전을 보던 하세원과 최지호 역시 눈치를 보더니 그를 쫓았다.
“저 사람 티비에 나오는 그 사람 아니에요!?”
박율의 옆으로 따라붙은 하세원은 한껏 놀랍다는 표정을 한 채 박율에게 물었다.
박율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양궁만 연습을 했을 하세원이 서희를 아는 걸 봐선 웬만큼 유명하긴 한가보다.
“우와! 저 연예인 처음 봐요!”
“저 사람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박율은 됐다며 손사레를 치곤 자리를 물색했다.
로비 구석에 빈 좌석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마 경매품을 보기도 어렵고, 너무 외진 곳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곳이라면 박율에겐 아주 땡큐였다.
“저기로 갑시다.”
박율은 뒤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위치를 알려주며, 그들을 따라 경매장으로 들어온 두 그룹의 무리들에게도 넌지시 알려주었다.
박율과 일행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뒤이어 일행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율씨.”
“기껏해야 하루만인데 그렇게 제가 보고 싶었어요?”
박율은 옆자리를 차지하는 김진목에게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내심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를 따라 들어온 차영훈, 김진목이 나란히 자리에 앉았고, 잠시후 찾아온 한지원과 이세진마저 자리를 차지했다.
“다들 잘 지냈어요?”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답을 한 이는 이세진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밤새 경매장의 모든 동선과 주변을 탐색한 것으로 모자라 킹콩을 대동해 밖으로 나갈 활로까지 만들었으니.
박율은 그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엄지를 치켜세울 뿐이었다.
“잘했어요.”
“언제 시작되는 거에요...?”
이세진의 옆에있던 한지원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굳어 있었다.
질문의 요지는 경매의 시작을 묻는 게 아닌 듯했다.
경매와 함께 벌어질 퍼레이드.
그것에 대해 묻는 질문이었다.
“확실히는 몰라요. 경매 시작하고 벌어진다는 것만 알아요.”
박율이 이전의 역사에서 이 경매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번엔 그저 정보만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필요한 성유물은 두 개나 획득했으니 최소한의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어제 진짜 죽을 뻔했잖아. 이상한 가면을 쓴 놈들이 칼을 들고 막 어우.”
“별로 한 것도 없을 거 아니야? 율 씨가 다 했을 텐데.”
“나 없었으면 인마.”
옆에서는 그새 박석훈과 최지호가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싸워대더니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주 절친이 따로 없었다.
박율은 그런 그들을 뒤로 경매장의 이들을 살폈다.
예상대로 중간중간 마인들이 섞여있는 듯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저것들을 패죽이고 경매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괜히 벌써 난동을 피웠다가 찾아야 할 성유물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면 안되니까 말이다.
박율은 흘깃 박석훈을 보았다.
그에게 줄 성유물이 오늘 이곳에 등장한다.
그 순간, 경매장의 중심으로 한 남성이 등장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경매장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뭐라뭐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이제 시작합니다.”
박율은 한창 사담을 나누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흠칫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꾹 닫았다.
무대의 중심에 있던 남자의 옆으로 유리관에 쌓인 유물이 하나 등장했다.
“어제 봤던거다!”
최지호가 말했다.
전날에 그가 눈독 들였던 녹슨 소총이었다.
역시나 가장 값어치가 없는 물건이니만큼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그것을 본 이들의 반응 역시 미지근했다.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은 끽해야 다섯 정도.
20만 달러를 시작으로 대부분 100달러 정도만 높여 부를 뿐,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총은 딱 봐도 유럽의 귀족같아 보이는 자제의 손에 들어갔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유물도, 그 다음으로 나타난 유물도 비슷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익숙한 유물이 나타났다.
지금은 박율의 손아귀에 있는 사람 형태를 한 항아리의 모조품이었다.
저 유물의 진가를 아는 이들이 몇몇 있는지 이번엔 전보다는 적극적으로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50만 달러로 시작한 경매가는 어느새 100만 달러에 육박했다.
“저거 우리가 가져온 거 아니야?”
최지호가 아주 거만한 미소를 지은 채 옆에서 물었다.
“쉿.”
박율은 조용히 검지를 입에 가져갔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사절이다.
전날에 목숨과 뒤바꿀뻔 했던 항아리는 자그마치 122만 달러에 팔렸다.
아마 내일이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항아리가 낙찰이 되고, 다음으로 또 베일에 쌓인 유리관이 등장했다.
진행을 맡은 남자가 유리관을 덮은 보자기를 걷어내자 박율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유물이 나타났다.
투명한 유리관 너머엔 새카만 녹으로 범벅이 된 팔찌가 있었다.
일명 선홍빛 갑주.
저게 어떻게 갑주냐는 물음이 나올테지만, 저 유물 역시 형태를 달리하고 있는 희귀한 성유물이었다.
진행자는 처음으로 50만 달러를 부르자 박율은 조용히 피켓을 들었다.
제발 아무도 참여하지 마라...
기왕이면 조용하게 가져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땅.
“one!”
진행자가 낙찰을 알리는 숫자를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박율은 흘깃 사람들을 보며 긴장했다.
정적이 감도는 경매장에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피켓을 들까말까 신경전을 벌였다.
“two!”
한 걸음.
“three!”
진행자가 얼른 참여를 하라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독촉했지만, 여전히 참여자는 없었다.
그럴만도 한 게 앞서 나왔던 유물들과는 달리 그리 독특하다거나 유물로써의 가치가 높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겉모습만 봐선 어디 땅속에 묻혀있던 쓰레기를 가져온 것만 같았으니까.
“four!”
이제 마지막 숫자만 부르면 저 유물은 박율의 것이 된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제발...
그리고 진행자가 낙찰을 알리는 다섯을 외치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피켓이 머리 위로 등장했다.
“51만 달러.”
“...?”
피켓을 든 이는 다름 아닌 서희였다.
그녀는 박율을 흘깃 보더니 아주 얄미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행자는 그녀의 등장에 활짝 미소를 보이며 또다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52만 달러!”
박율이 피켓을 들었다.
“55만 달러!”
반격이라도 하듯 서희가 또 다시 피켓을 들었다.
저 성질 더러운 아줌마...
박율은 굳게 닫은 입으로 열불을 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것이지, 왜 저런 짓을 하는가.
“56만...”
“60만 달러!”
서희는 박율을 누르기라도 하겠다는 듯 박율의 말을 가로채 가격을 더욱 높이 불렀다.
“61만...”
“70만.”
서희는 경매가가 100만 달러가 넘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박율을 꺾었다.
솔직히 말해서 300만 달러까지 그냥 막 부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장대호 회장에서 골프채로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서희가 120만 달러를 부르면서 박율은 높이 든 피켓을 내렸다.
“포기하는 거에요...?”
박율이 섣불리 피켓을 들지 못하자 테이블 끝에 있던 박석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박율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여기서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서희가 가져가는 거라면 그녀와 협상을 해서 받아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나중에 난장판이 벌어질 때 혼란을 틈타 훔쳐도 되는 거니까.
“나중에 서희 씨한테 받아내죠. 석훈 씨 성유물을 받을 때가 조금 늦어지긴 하지겠지만.”
박석훈은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 유물이 박율이 말했던 자신의 무기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그는 흠칫 고개를 돌려 낙찰이 되기 직전의 유물을 보더니 재빨리 피켓을 들었다.
“...석훈 씨?”
“150만 달러!”
미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