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제 닫아요.”
박율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하세원은 재빨리 동굴과 연결된 통로를 닫았다.
통로가 닫히기 직전 돌무더기 쏟아져 나와 사고가 날뻔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무사히 통로를 닫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이 등지고 있던 술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 폭삭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스페인어로 된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박율은 애써 뒤쪽을 무시했다.
“이거 뭐야!?”
촛농에 온몸을 봉인 당한 장화연은 희번뜩 눈을 뜨며 물었다.
그녀는 이를 빠득 갈며 발버둥을 치지만, 얼굴만을 남기고 전신이 주박된 그녀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눈과 입은 박율을 향했다.
“너, 이 개새끼...!!!”
“또 보네?”
박율은 익살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손인사를 건넸다.
장화연이라면 응당 도발에 응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위험하고 위급한 상황에도 이 미친 여자라면 도발에 걸려주리라고.
그리고 역시나 아주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이거 풀어!!!”
“풀어달란다고 풀면 내가 널 왜 잡았냐?”
“...닥치고 이거 풀어!!!”
“워메, 귀청 떨어지것네.”
박율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화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제 됐으니까 데려갑시다.”
박율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은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다.
“얘 안 죽여?”
“마인이니까 죽여야...”
박율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못 죽여요.”
“왜?”
“왜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니 당장 이 흉악한 짐승을 죽이라는 눈으로 박율을 보았다.
하지만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죽이려면 한 방에 끝내야 하는데, 한 방에 못 죽이거든요. 잘못 건드리면 봉인이 풀려서 난장판이 될 거에요.”
장화연을 죽이는 걸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한 방에 죽이지 못했을 때, 즉 저 여자의 온몸을 돌아다니는 검은 자국이 그녀를 보호했을 때를 가정하면 아주 큰일이 벌어진다.
최지호는 자신의 능력이 있다며 으스댔지만, 역시 박율은 고개를 저었다.
암만 기절을 시킨다 한들 어떤 방식으로든 한방에 죽을 위인은 아니었다.
전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 여자의 무대포 같은 성격은 여전했기에 잡아들이는데 까지는 손 쉽게 성공했지만, 그 다음 단계를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자의 몸을 돌아다니는 검은 자국은 장화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움직였다.
그렇기에 목숨에 위해가 생긴다 싶은 상황에는 검은 자국이 그녀를 지켰다.
그녀가 기절을 하던 뭘 하던간에 말이다.
가끔 그녀가 인위적으로 검은 자국을 한데 모을 때 말고는 그녀를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미 한 번 실패했기도 하고 말이다.
[필요하면 뭐.]
“거, 하이브리드 심장은 다시 잠이나 자슈.”
박율의 그림자 속에서 데판이 조금 으스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심장이 하나 사라진 지금 그의 상태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됐고, 일단 들고 갑시다. 이제 오늘 일은 끝났어요.”
움직이는 게 눈코입밖에 없는 것이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던지 촛농으로 입까지 틀어 막고 서야 세 사람은 움직일 수 있었다.
박율은 마치 들짐승을 사냥한 원시부족 마냥 장화연을 망토에 싼 채 어깨에 짊어 맸다.
원하는 만큼 크기가 늘어나다보니 이만큼 좋은 보자기가 또 없었다.
박율은 두 사람을 숙소로 돌려보내고 혼자 깊은 산 속을 찾아 들어갔다.
이 사람을 버리는 데에 이렇게 안성맞춤인 곳이 없다.
사람도 없고, 있는 거라곤 나무들뿐인데다 산짐승이 살아 숨 쉬는 깊은 산 속.
박율은 온몸에 결박된 장화연을 산 중에 내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
“읍!!! 읍!!!”
“좋은 거 알어. 인마. 쉬고 있어. 아 불편해? 기다려봐.”
마음같아서는 이대로 그냥 어디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촛농이 결박력이 좋다한들 길어야 이틀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풀리긴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박율은 저 여자에게 위해를 가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읍!!! 읍!!! 읍!!!”
박율은 장화연을 산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생각보다 보기 좋은데.”
영화 속 대왕거미에게 잡혀 고치가 된 주인공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장화연이 주인공은 아니겠지만.
“거기서 경치나 좀 구경하다가 다음에 봐.”
박율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를 보는 장화연의 눈빛엔 당장에라도 죽이겠다는 일념이 가득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는가.
탄력을 받아 대롱대롱 흔들리는 게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박율은 인자한 미소를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시간은 흘러 경매가 벌어질 이튿날이 되었다.
박율과 일행은 한데 모여 파티장으로 치장된 경매장 앞에 모였다.
겉으로 봐선 여기가 어떻게 경매장이냐는 물음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곳에서 벌어질 경매는 극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하는 일명 VIP 전용 경매장이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이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런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율은 그 앞에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다들 준비됐어요?”
박율을 따라온 일행들 역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 모두 나중에 봅시다.”
박율 일행은 전날과 동일하게 세 팀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아는 이상 뭉쳐있는 것은 위험했다.
이곳도 한국에서처럼 이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박율의 영향이 거의 없는 곳이니만큼 그리 큰 이변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더욱 긴장했다.
파티장으로 발을 들인 박율은 세상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는 보이는 사람마다 고개를 살짝 숙여가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게 나름의 문화라고 들었다.
뭐 아니면 말고.
“어디로 가야 돼? 우리?”
박율은 흠깃 눈치도 없이 소리를 고래고개 지르는 최지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파티장의 소음 속에서 세상 다정한 미소를 한 채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조용히 좀 하고 따라와요.”
최지호는 어깨를 으쓱 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제발 쓸데없는 짓은 좀 안했으면 좋겠다.
어? 야.
어디가?
“어? 야! 이거 공짜래!”
그러니까 그런 짓 좀 제발...
박율은 아주 즐겁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최지호의 어깨를 착 감으며 그를 보았다.
세상 온화한 미소였지만, 그 이면엔 입으로 담기 힘든 쌍욕들이 담겨있었다.
“...닥치고 따라와요. 제발.”
물론 과자와 샴페인을 건네는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 또한 잊지 않았다.
“Gracias.”
남자는 미소로 답해주었다.
“다 공짜라는데, 즐겨!”
“그럴 시간이 없다고...”
“캬!”
최지호는 받아든 샴페인을 한입에 꿀꺽 삼키더니 소주라도 마신 듯 아주 상쾌한 탄사를 내뱉었다.
“놀러왔어요?”
“어차피 여기까지 온거 즐기면서 하는 게 좋은 거지? 안 그래!?”
“즐기는 건 좋은데, 제일 눈에 띄는 짓은 좀 하지 말라고요. 세원 씨, 반만이라도 닮아줘요. 제발!”
박율은 뒤에서 조용하게 따라오고 있던 하세원을 가리켰다.
“뭐 어때? 지금 다 똑같이 즐기고 있구만.”
그래, 다 즐기고 있지.
당신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없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나저나 너 발음 진짜 구리더라.”
“저기요. 저 스페인 사람한테 직접 배웠어요.”
“잘못 배웠어! 아주!”
“취했어요?”
“안 취했어!”
고작 샴페인 2잔 먹고 취하고선 이렇게 행패를 부리다니.
박율은 한숨을 팍 내뱉으며 머리를 짚었다.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겠구나.
“...세원 씨, 이 사람 데리고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네!”
“잠깐만 따라오시죠.”
“나 화장실 안 가도 돼!
하지만 박율은 안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최지호를 반쯤 강제로 화장실로 끌고갔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하세원은 경쾌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굳이 단어로써 형용하자면 퍽이라던가 쾅이라던가.
그리고 잠시후 모습을 드러낸 박율은 그제야 속이 후련하다는 듯 해보였고, 최지호는 군기가 바짝 들어 박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호 씨.“
”예! 예, 에?“
”그냥 조용히만 따라오면 되는 거에요. 알겠죠?“
”네, 넵!“
”안 어울리게 존댓말을 쓰고 그래요.“
”어...어...“
최지호는 흠칫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고 오신 거에요...?“
하세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박율을 보았다.
”뭐 그리 심각한 건 아니고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가졌죠. 그나저나 슬슬 때가 된 거 같네요.“
”어떤...?“
박율은 턱으로 파티장 중심을 가리켰다.
겉보기에는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박율은 알 수 있었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어디론가 이동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경매를 시작할 시간이라는 거죠.“
박율이 먼저 발을 떼었다.
그 뒤를 따라 두 사람이 쫓았다.
다행히 함께 따라온 다른 두 일행 역시 흠칫 박율을 보더니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시다.“
이곳에서도 최지호의 역할이 중요했다.
명색 VIP 경매인만큼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는다.
박율은 자신을 따라오는 일행들을 살피며 인적이 없으며 웨이터가 자리를 지키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박율은 천천히 웨이터에게 다가갔다.
”큼...“
”¿Necesita algo?“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뭐가 필요하냐는 상투적인 질문인 것 같았다.
”웨잇 어 미닛.“
박율은 웨이터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다가오던 최지호에게 턱으로 웨이터를 가리켰다.
”뭐라고 하면 돼...요?“
”경매장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해요.“
”오케이.“
”그리고 뒤이어 들어오는 두 팀도 들여보내라고.“
최지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웨이터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몸에 손을 가져갔다.
웨이터는 조금은 불쾌한 듯 인상을 팍 지었다.
”잠시만...“
최지호의 권능이 웨이터에게 스며듬과 동시에 웨이터의 표정이 풀렸다.
아주 잠시 웨이터는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세 사람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길을 안내했다.
웨이터를 쫓아 세 사람은 복도를 지나 책장으로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도 다른 경호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웨이터는 그들에게 귓속말로 뭐라뭐라 속삭이더니 경호원들은 말을 듣고 길을 터주었다.
세 사람은 그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맞이하는 경매장.
사방이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에 은은한 불빛만이 감돌았다.
로비를 차지한 의자는 대부분 먼저 온 사람들이 차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