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시끄러워서 잠을 잘수가 없군.]
박율의 그림자를 타고 나타난 데판은 기세등등하게 박율의 등을 차지했다.
그는 정면의 까마귀와 뱀을 보았다.
[마인들이군.]
그리고는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이번엔 내가 가지.”
까마귀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도의 날을 세우며 데판을 향해 도약했다.
차악!
날아든 까마귀의 검날이 데판의 복부를 스치며, 축축한 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인간놈들, 예의가 없군.]
그 어느 것도 데판의 몸에 생채기를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복부엔 선명하게 검흔이 남아있었다.
데판은 길게 난 상처를 따라 흐르는 작은 핏방울에 손을 가져갔다.
갑작스런 공격에 방심했다곤 하나, 고작 인간의 칼날에 베일 몸이 아니었다.
네파림과의 전투로 심장을 하나 잃은 결과였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이 몸에 상처를 내다니.]
데판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를 빠득 갈았다.
“거, 숙면 한 번 오래하시네.”
박율이 흘깃 데판을 보았다.
[누가 내 심장을 하나 터트려서 말이지.]
“거, 내가 했슈?”
쾅!!!
박율은 코어를 이용해 정면에서 날아든 장화연의 공격을 흘렸다.
그리곤 재빨리 코어를 쇠사슬 형태로 만들어 장화연의 왼팔에 감았다.
“그 두 놈은 고양이 아저씨한테 맡깁니다.”
[...제일 예의 없는 인간이 옆에 있었군.]
“잔말 말고. 고양이 그림자 양반.”
[허.]
데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박율에게 살기를 내뱉었지만, 그 살기는 그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자신을 노려보는 까마귀를 향했다.
뱀은 한껏 인상을 찡그린 채 데판을 보았다.
“...저거 뭐야?”
“악마.”
그렇다고 평범한 악마는 아니었다.
“악마가 왜 쟤를 돕는데?”
까마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데판을 향해 돌진했다.
캉!!!
그의 검과 데판의 커다란 팔이 부딪히며 쇳소리가 울렸다.
까마귀는 그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일본도를 휘둘렀다.
캉!!!
캉!!!
쇳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지며 데판의 몸에 작은 생채기들이 흩날렸다.
방심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날은 매서웠다.
[...나름 봐줄만하군.]
데판은 덩치에 맞지 않는 민첩함으로 내려 찍히는 일본도를 피하고 가볍게 까마귀를 날리려 했지만, 까마귀 역시 그의 움직임을 보고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공격을 피했다.
[바퀴벌레 같은 놈이 또 있었군.]
까마귀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데판은 그에게 손을 뻗지만, 까마귀는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숨기고는 데판의 옆에서 나타나 그를 공격했다.
차악!
검날이 그의 뺨에 작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데판은 한껏 빡친다는 얼굴로 까마귀를 보았다.
한바탕 장화연과 몸싸움을 하던 박율은 잠깐 그의 옆으로 날아왔다.
”고양이 아저씨. 거 너무 화내지 말고, 여기서 빡친다고 다 부수면 우리 다 죽습니다. 거기 두 명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줘요.“
데판이 여기서 분에 못 이겨 덩치를 키우기라도 한다면 동굴이 무너져 몰살이다.
까마귀 정도야 그림자를 타고 도망칠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은 전부 꼼짝없이 죽을 터였다.
[뭐?]
”설명하긴 길고.“
박율은 달려드는 장화연의 공격을 피해 그녀의 허리에 망치를 내리꽂았다.
캉!!!
역시나 그의 망치는 장화연의 검은 자국에 막혔다.
더럽게 빠른 건 여전했다.
”열심히 버티다가 신호 주면 아주 세게 땅을 내리쳐요.“
데판은 버티라는 단어에 잠시 빡이 돌았지만,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까마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박율 역시 정면의 장화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
”어째 저번보다 더 약해진 거 같은데?“
장화연의 왼팔을 쇠사슬로 묶은 박율은 쇠사슬을 살살 당기며 그녀를 자극했다.
”이 개새끼가.“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장화연은 도발에 이를 빠득 갈며 달려들었다.
박율은 달려드는 장화연의 손을 피해 하늘 높이 뛰었다.
장화연은 그를 쫓으려 손을 뻗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어 그대로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무식하긴.“
박율은 다시 쇠사슬을 당겼다.
쇠사슬은 이미 그녀의 몸을 두어바퀴 감은 채였다.
하지만 쇠사슬이 느슨하게 감긴 탓인지 그녀를 주박하지도 그렇다고 이렇다 할 효과를 내지도 못했다.
대신 하나 확실한 건.
”이리와!!! 이 개 같은 쥐새끼야!!!“
저 여자는 관자놀이에 핏대가 설만큼 아주 빡쳤다는 거다.
박율은 이번엔 몸을 낮게 숙여 주먹을 피했다.
아니, 피할 줄 알았다.
쾅!!! 박율을 향해 주먹을 뻗던 장화연의 투박한 손이 허공에서 박율을 향해 그대로 내리꽂혔다.
”큭...!“
박율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다시 씨부려봐.“
장화연은 바닥에 넘어진 박율을 향해 발을 내려찍지만, 박율은 재빨리 몸을 굴려 발을 피했다.
그리고는 또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계속!!!“
또 달려든다.
”쥐 새끼처럼!!!“
이번엔 어디로 피해야 하는가.
”도망치지!!!“
딱히 보이는 곳이 없다.
”말고 싸워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고 피해야지.
[유리]
장화연의 주먹이 그를 향해 날아드는 순간, 박율의 상체 일부분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이...이...“
장화연은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박율을 노려보았다.
”왜? 급해? 화장실은 밖에 있는데.“
”...넌 진짜 잡히면 뒤졌어.“
”그런건 잡고 나서 말해야 멋있는 거야.“
장화연은 검은 자국의 힘을 빌려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
콱!
콰당탕!!! 박율을 향해 달려오던 장화연이 절반도 채 달리지 못한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뭐야!?“
”뭐긴.“
박율은 왼손에 쥔 쇠사슬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장화연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둘러싼 쇠사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왼손에만 묶여있었던 쇠사슬이 어느새 그녀의 온몸을 주박하고 있었다.
느슨하게 그녀의 몸을 감싼 쇠사슬이 그녀의 도약으로 압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거 풀어!!! 이 개새끼야!!!“
”싫은데?“
”비겁한 새끼!!!“
”칭찬이지?“
이기기 힘들다면 싸우지 않으면 된다.
박율은 쇠사슬을 최대한 강하게 당긴 채 허리를 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유리관으로 다가갔다.
”이제 클라이막스 시간이야.“
박율은 망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통로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자 다들 지금이에요!!!“
쨍!!!
그의 망치가 유리를 깼다.
우우웅!!!
유리가 깨지는 순간 통로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망토 속에 가려져 있던 하세원이 망토를 헤치고 나와 벽에 화살을 쏘았고, 데판은 있는 힘껏 땅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쾅!!!
그의 주먹이 땅을 울리자 지진이 인 듯 통로에 흙먼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흙먼지는 점차 굵어져 커다란 바위들로 바뀌었고, 경매품들을 지키고 있던 유리관들은 땅속으로 모습을 숨기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바위들은 그들이 서 있는 동굴을 전부 메울 듯 떨어졌다.
”돌아와! 피카츄!“
데판은 불쾌하다는 듯 박율을 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박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씨발, 지금 뭐하는 짓이야!?“
장화연이 땅속으로 사라지는 경매품들을 보며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긴. 도망치는 중이지.“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하세원이 쏜 하얀 불꽃을 머금은 화살이 벽을 꿰뚫은 상태였다.
화살이 박힌 벽은 스르륵 타오르더니 이내 커다란 불꽃을 만들었다.
두 개의 흔적이 연결되었다.
”두 사람은 먼저 도망쳐요.“
망토를 거둔 박율은 숨 죽인 채 숨어있던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군말 없이 하세원이 만든 통로로 몸을 던졌다.
”어디가!!!“
”도망치는 중이라니까.“
박율 역시 하세원이 만든 통로를 따라 뛰었다.
그 순간, 턱.
그의 옆으로 까마귀의 일본도가 그의 길을 막았다.
박율은 재빨리 망치를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캉!!!
”왜? 싸우려고?“
”...“
까마귀는 다시 검을 들어 박율을 겨누었다.
”다 같이 뒤지고 싶으면 싸우던가. 아, 그래도 너는 살아남겠네. 근데 쟤들은 아닐걸?“
박율은 까마귀의 뒤로 장화연과 뱀을 가리켰다.
그들은 쏟아지는 바위들을 피하고 있었다.
특히 장화연은 온몸이 꽁꽁 묶인 탓에 몸을 이리저리 구르거나 온몸을 강화해 떨어지는 바위를 속수무책으로 막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 역시 다가오고 있었다.
”어때?“
”...“
가면에 가려진 까마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색무취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잘도 살아남는군.“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까마귀는 박율을 향해 겨누던 검을 내리고 장화연과 뱀에게로 갔다.
”뭐하는 거야!? 저 새끼 잡아!!!“
장화연은 어떻게든 쇠사슬을 풀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돌아간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미쳤어!?“
”...“
까마귀는 그림자를 넓게 펼쳐 뱀과 장화연을 감쌌다.
박율은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짓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다음에 봐. 특히 거기 미친 여자.“
”넌 씨발!!! 잡히면 뒤졌어!!!“
”그런 말은 잡고 난 뒤에 하라니까?“
”아아악!!!“
아주 발악을 하는구만.
박율은 통쾌하다는 듯 껄껄 웃으며 그녀를 도발했다.
”꼽으면 찾아오시던가.“
그리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장화연을 묶어두었던 쇠사슬을 풀어 다시 왼손으로 가져갔다.
박율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 뒷걸음질로 통로 너머로 넘어갔다.
* * *
”율 씨...!“
먼저 통로를 타고 넘어온 하세원의 말이었다.
통로를 타고 넘어온 박율은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아직 닫지 마요.“
”네?“
”강태공이 먹이를 던졌으면 하나 낚아야죠.“
그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박율은 뭐하냐는 질문에도 굴하지 않고 통로 쪽을 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르고 새하얀 불꽃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불꽃 너머에서 나타난 이는 장화연이었다.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겠다는 표정을 한 채 미친 개마냥 뛰쳐나왔다.
[신속]
박율은 그녀가 통로를 빠져나옴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그녀에게 몸을 던졌다.
콰앙!!!
박율에게 맞아 날아간 그녀는 그대로 날아갔다.
그리고 날아간 그녀의 몸뚱이는 덫에 걸렸다.
둥글게 진을 친 촛농은 그녀가 걸려들자 여백을 촛농으로 채우며 그녀의 실루엣 그대로 그녀를 봉쇄했다.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