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X 됐네...”
박율은 시계를 보았다.
원래 같았다면 장장 12시간의 비행을 끝마치고 스페인에 도착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그마치 20시간 가량을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소리였다.
“허허...”
박율은 잠자는 사자를 피하듯 아주 조심스레 휴대폰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휴대폰 화면을 흘깃 보더니 뜨거운 감자라도 만진 듯 휴대폰을 다시 떨어뜨렸다.
“어으...”
얼핏보인 통화만 수십 통, 문자는 수백 통.
일 년간 받을 문자와 전화를 한 번에 받은 듯했다.
박율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휴대폰을 가져왔다.
[율 씨, 어디에요? 왜 안 와요?] - 박석훈
[일어나!!!] - 김진목
[사고라도 났어요?] - 한지원
그것 말고도 다른 문자들이 많았다.
굳이 말하자면 대부분 욕이었다.
그간 못했던 욕들을 오늘에야 쏟아낸 듯했다.
박율은 그제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너무 스스로를 혹사하긴 했다.
마계에서 돌아오기 전이나 후나 기절한 시간을 빼면 한 시간도 자지 않고 뛰어다녔으니.
어찌보면 예견된 사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 벌어져선 안 되는 사태라서 문제인 거지.
박율은 당장 스페인행 비행기표부터 찾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출발하면 간당간당하게 시간을 맞출 순 있을 터였다.
“...근데 나 여권도 없잖아...?”
공식적으로 그는 죽은 몸이었다.
그래서 장대호 회장의 도움으로 밀입국을 할 예정이었다만.
다시 한 번 X된 순간이었다.
“지금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욕하려나?”
욕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밀입국을 도와달라고 말했을 때부터 표정은 뭐 이미 그를 때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장대호 회장이라한들 당장 밀입국을 도와달라고 도와줄 수는 없을 터였다.
하필 데판도 한창 숙면에 빠져있을 때,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그동안 피곤하다 피곤하다 말했던 게 진짜로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지금도 데판은 자고 있는 듯 반응도 없었다.
“아...”
박율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두 손을 높이 들어 그대로 머리에 착 붙였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X 된 거지.”
지잉.
타이밍에 맞게 전화가 한 통 울렸다.
박석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받아야 할까...? 그냥 받지 말까?”
국제전화는 받는 거 아니랬는데.
그냥 끊을까?
아주 잠시 고민을 하던 박율은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어쩌겠어.
뚝.
“여보...세요~?”
[야이...]
“흠...”
박율은 휴대폰을 저 멀리 떼어놓았다.
휴대폰을 귀에서 1미터 가량을 떨어뜨려놨는데도 상스러운 욕들은 여과 없이 그의 귀에 꾹꾹 틀어박혔다.
대충 목소리를 들어선 망나니 최지호가 욕을 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그 말고는 저렇게 상스러운 욕을 할 사람은 없으니까.
최지호의 권능인 정신 착란 권능을 안 쓰고도 입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라고 깨달은 순간이었다.
[큼...큼...]
한참의 욕이 끝난 뒤에야 박율은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라고 전해달래.]
“예, 고맙네요 이젠 석훈 씨 바꿔줄래요?”
[율 씨, 어딥니까.]
이번엔 차영훈의 목소리였다.
기왕이면 가볍게 맞고 싶었는데, 안되나보다.
“음...그게...”
[집이네, 이거 집이야.]
차영훈의 뒤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김진목인 듯했다.
나 화났소하고 자랑하는 투였다.
“정답...?”
[지호 씨? 한 번만 더.]
박율은 다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스러운 욕의 파도.
이런 파도를 맞았다간 뼈가 산산조각나겠다 싶은 욕들이었다.
그의 뼈들은 이미 너덜너덜 해졌지만.
아마 조각난 뼈들을 모아서 전시하면 인체 해부도가 하나 뚝딱 나오겠지 싶었다.
[이상.]
“욕이 되게 찰지네요?”
[칭찬 고맙. 자 여기. / 후... 그래서 이제 어떡할 겁니까? 할 거 많다면서, 그리고 내일 싸우게 될 거라면서?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이렇게 주인공이 없으면 우리끼리 뭘 알고 싸웁니까?]
최지호의 욕 퍼레이드가 끝나자 김진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일단 제가 알려줄 테니까 먼저 하고 계실래요? 지금이라도 가면...”
[늦겠지.]
“그쵸, 늦겠죠.”
[어떻게 욕 한 번 더 들을래요?]
“아뇨, 이젠 조금 거북할 거 같아요.”
[그래서 어떡할 겁니까?]
“잠시 생각을 해봅시다.”
[하... 우리가 뭐부터 해야 하는지 먼저 알려줘요.]
“음... 일단 먼저 경매장에 몰래 들어가서 나쁜 놈들이 경매품에 장난 못 치게 막아야 해요.”
[어떻게요?]
“성유물을 가지고?”
[그게 어디있는데요?]
“제품에?”
[...그거 말고.]
“스페인 경매가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거라 동선 파악부터 해야 돼요.”
[거기가 어디있는데요?]
“저도 가물가물해서 가봐야 알 거 같은데요.”
[근데 당신은 늦잠을 자서 못 왔고?]
“그렇죠?”
[지호 씨, 그냥 한 번만 더 해요.]
또 다시 쌍욕들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진다.
이젠 뭐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니던가.
욕먹는 것 정도야 적응만 하면 나름 그것도 그것대로 맛이 있다.
이번엔 어떤 욕을 할까 하는 기대감도 조금 있고 말이다.
[나도 이제 목 아픈데. / 그만하면 됐어요.]
“어우, 시원하다 못해 등줄기가 오싹하네요.”
[그래서 어떡할 거냐고... 네? 뭐라고요?]
한참 김진목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리던 와중 그의 뒤에서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그 문제라면 제가 한 번...]
하세원의 목소리였다.
번뜩 그의 뇌리를 타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그를 때렸다.
“아!!! 맞네!!! 그걸 왜 생각을 못 했지!?”
그제서야 생각났다.
지금 저 파티에 일원 중 한 명은 전이 능력이 있는 하세원이었다.
그녀가 새긴 두 흔적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전이라는 권능.
그 능력을 지닌 사람이 저기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소리였다.
[오기 전에 양궁을 조금 연습했었...]
“갑니다. 위치 불어요.”
박율은 곧장 하세원이 말한 양궁장 앞에서 그녀가 쏜 화살을 찾았다.
“도착했어요...!!!”
[네, 그럼.]
하세원의 목소리가 끝나자 화살이 닿은 과녁에 하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꽃은 과녁을 전부 집어삼킬 정도로 커졌다.
박율은 과녁을 삼킨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불꽃 속을 넘어간 박율은 스페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일행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 이후는 설명하자면 길지만, 쉽게 말해서 맞았다.
아주 흠씬 맞았다.
단언컨대 악마들을 상대하면서 맞았던 횟수보다 오늘 박율이 맞은 횟수가 더 많으리라.
그간 쌓여온 앙금들을 그날에 모두 풀어내는 듯했다.
감정이 실린 주먹을 맞을 땐,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근육을 긴장시켜야 덜 아프다.
“...자 이제 다 때렸으니까 설명할게요.”
그리고 또 맞았다.
이후 대충 박율 일행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박율과 최지호, 그리고 하세원으로 구성된 그룹은 경매품을 찾으러 갔고, 한지원과 킹콩을 대동한 이세진은 경매장 동선 파악 및 부가적인 일들을, 남산타워 사태를 함께한 세 사람은 경매장 근처 박율이 건넨 폭탄 구슬을 설치하러 갔다.
*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마기로군.]
고양이 형태로 있던 데판은 스페인으로 넘어와 말했다.
그리고는 박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박율은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만, 답을 해주진 않았다.
대신 필요할 때 부르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들어 스페인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다행히 스페인엔 큰 이변은 없나보네.”
그의 활약으로 한국에서는 안드라스의 침공이 빨라졌지만, 이곳엔 딱히 큰 이변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영향이 여기까지는 닿지 않은 듯했다.
스페인은 앞으로 2년 뒤, 푸르카스의 침공이 벌어질 예정이다만, 그정도면 한국의 일을 처리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꾸벅이던 박율은 허리에 얼음팩을 가져가며 인상을 팍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때린 거 아니오? 아주 삭신이 쑤시네, 쑤셔.“
”맞을만 했지.“
최지호는 혀를 끌끌 차며 답했다.
온몸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던 박율은 따로 반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늦잠으로 지각한 것도 사실이고, 그 때문에 모든 일정이 딜레이 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일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면 되지 않겠는가.
박율은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해?“
”사색합니다. 왜요?“
”저...어디로 가는 거에요...?“
이번엔 한창 뒤에서 박율을 따라오던 하세원이 물었다.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죠. 이제.“
내일 있을 경매를 위한 준비.
”분명 경매품 찾으러 간다고...“
”경매장에 갈 줄 알았어요?“
”아닌가요...?“
경매품이 경매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긴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페인 어느 외진 골목이었다.
”이쪽이에요.“
박율은 두 사람을 이끌었다.
그를 따라 쫓아간 곳은 허름한 술집이었다.
”여기요...?“
하세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름한 술집의 외관을 살폈다.
바람 불면 쓰러질 법한 술집엔 간판도 없었다.
아는 사람만 찾아올 법한 그런 집이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이건 그냥 경매가 아니라 암시장에서 이뤄지는 경매라고.“
암시장이니만큼 보통 사람은 알 수 없게끔 진행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찾은 곳은 경매장에 쓰일 경매품들을 숨겨놓은 일종의 금고였다.
박율은 술집 앞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인적이 없는 골목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어디가요...?“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하세원은 흠칫 놀라며 그를 쫓았다.
골목의 구석으로 들어온 박율은 잠시 주변을 경계하더니 주머니에서 초를 하나 꺼냈다.
”뭐하는 거에요...?“
그를 지켜보던 하세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일종의 덫이죠.“
박율은 간단하게 답을 하고는 손으로 하얀 불꽃을 피워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불에 그을려 떨어지는 촛농을 마치 동물을 잡으려고 깔아놓는 부비트랩처럼 바닥에 둥글게 깔았다.
”자 다 됐어요.“
박율은 촛농이 끊어지지 않게 군데군데 촛농을 떨어뜨려가며 함정을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촛농 가운데에 엄지 손가락만한 보석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보석은 은은한 빛을 뿜대니 파사삭하고 부서져 흩뿌려진 촛농 속에 스며들었다.
”세원 씨, 이쪽에 흔적 하나 남겨요.“
박율은 덫과 가까운 벽을 가리켰다.
”흔적이요?“
”덫을 깔았으면 동물도 하나 잡아야죠?“
”아... 네, 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박율의 지시대로 가운데에 화살을 하나 꽂았다.
”자, 그럼 이제 진짜 갑시다.“
”네, 넵.“
”근데 최지호 씨 어디갔어요?“
”누구요?“
”같이 왔던 그 양반.“
”아, 그러게요?“
그제서야 알았지만, 최지호가 사라졌다.
박율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머리를 짚었다.
”여기서 그놈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너무 귀찮아지는데.“
”이거 놔!!!“
와장창!!!
”...여기 있네요.“
다행히 어디로 도망친 건 아니었나보다.
등지고 있던 술집에서 최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하는 배경음악은 덤이었다.
”얼른 골칫덩이 찾으러 갑시다.“
박율과 하세원은 혀를 끌며 다시 술집을 찾았다.
그리고 역시나 최지호라 쓰고 골칫덩이라 불러야 할 그놈은 술집의 한가운데에서 덩치 큰 남성에게 제압당한 채였다.
”...뭐하세요?“
”아니! 술 좀 한 잔 시키려는데 다짜고짜 꺼지라잖아!“
”근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남자가 돼서 말이야! 다짜고짜 꺼지라는 말을 들었으면 반박을 해야지! 그래서 나도 한국 전통의 유구한 욕들을 쏟아냈지.“
”그게 자랑이에요?“
”한국의 얼을 지켰다 이말이야! 내가! 아아악!!! 아파!!!“
한심하다 못해 어이가 없구나, 정말.
박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뱉었다.
”이제 너희들 다 뒤졌어! 우리 형님 왔다!“
”저는 그쪽 형님이 아닌데.“
저 골칫덩이가 박율을 지목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그런가 술집에 있던 이들의 이목이 박율을 향해 몰렸다.
”hola...?“
조용하게 지나가긴 글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