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카앙!!!
이명석의 검과 박율의 검이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맞부딪힌 두 검날은 황금빛 물결을 만들었다.
“크윽...!”
이명석의 검은 황금빛 물결마저 베었다.
카앙!!!
“정신차려요!”
박율은 호소했다.
하지만 이명석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그는 무미건조하지만 슬픈 얼굴로 첨예한 검을 들이밀었다.
카앙!!!
박율은 검을 들어 검을 막았다.
두 남자의 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십 번의 합과, 수십 번의 틈.
박율은 그 틈 사이에 칼을 찔러넣지 못했다.
대신 그때마다 그와 거리를 벌릴 뿐이었다.
박율은 이명석이라는 남자를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의 인생을,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알게 된 이후 그를 죽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명석이라는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이였고,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이명석의 목에 칼을 겨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날아오는 공격을 막을 뿐이었다.
“포기하시면 안 돼요!”
하지만 그는 그것을 노려 더욱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카앙!!!
검신과 검신이 맞부딪힐 때마다 그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슬픔, 증오, 한탄, 박애, 그리고 절망.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절망이었다.
카앙!!!
그의 공격은 단순했다.
목을 내어주거나 목을 취하거나.
그렇기에 박율은 선뜻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혹시.”
이명석이 말했다.
“...탑을 쌓아 올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명석은 아픔이라는 육중한 무게를 실은 검을 내리꽂았다.
카앙!!!
무미건조한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려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뼈를 깎고.”
카앙!!!
“살을 내어주고.”
카앙!!!
“결국에는 나 자신을 꼭대기에 위태롭게 올려놓는.”
카앙!!!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고, 눈동자엔 물기가 메말라 있었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에 젖었다.
“탑을 무너뜨리는 일은 너무나 쉽더군요.”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웃음으로 지웠다.
그 웃음의 의미는 슬픔이었다.
슬프고 아프기에 웃는 것이었다.
카앙!!!
“고작 한 마디에, 고작 한순간에 모든 게 무너지더군요.”
그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 아픔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고통을 읊을 뿐이었다.
휘두르는 검에 그의 상처를 담았고, 공기를 베어 가르는 검에 그의 아픔을 담았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넣지 않아 날카로운 검날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검에 실은 무게는 그 무엇보다 무거웠다.
그 무엇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이 담긴 무게였다.
“힘이 있기에 누군가를 내려찍고, 돈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아픔을 장난감처럼 다루더군요.”
그의 검날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 속도 역시 가속을 더해갔다.
마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탑을 쌓아 올려야 하는 세상을 바꿀 겁니다.”
이명석의 온몸을 둘러싼 마기는 그의 면면을 덮기 시작했다.
마치 기생충처럼.
손끝에서부터 그의 발끝까지 야금야금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 겁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명석 씨도 똑같은 놈이 되는 거에요!”
그는 그저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악인이 되어서라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단념이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아뇨.”
“어떻게든...!”
“그럼 저를 말려주세요.”
그의 정의가 변절되기 전에.
그의 선이 악이 되기 전에.
“...나를 죽여주세요.”
이명석은 말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살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카앙!!!
“당신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집니다. 결계를 없애거나.”
마기는 이미 그의 하반신을 전부 차지했다.
그리고 마기는 그의 상반신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카앙!!!
“여기서 나를 죽이거나.”
박율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여기서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리고 완전한 마인으로 변절한다면 원래의 역사에서처럼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이룩했던 수많은 참상들을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박율은 여전히 그의 목에 검을 겨누지 않았다.
“전 포기 안 할 겁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직 그는 이명석이라는 남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카앙!!!
내려 찍히는 이명석의 검을 망치로 막는다.
다시 검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찍힐 때.
[척후]
검의 궤적을 파악하고 가볍게 몸을 비틀어 검을 피했다.
박율은 코어를 커다란 방패의 형태로 바꾼다.
그리고 달려든다.
쿵!
방패에 밀려 떨어진 이명석이 바닥을 굴렀다.
박율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위를 점령했다.
“포기할 순 없겠죠...?”
“그럼 죽여주세요.”
이명석의 눈은 박율을 향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늦기 전에.”
마기가 이명석의 상반신마저 삼키고 있었다.
“이 힘이 어떤 힘인지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혀왔다.
마치 사포로 기도를 긁어내듯 따가웠다.
이명석은 웃었다.
그의 정의가 선에서 악으로 바뀌기 전에, 그의 손으로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그의 신념이 뒤틀리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저는.”
박율은 망치를 높이 들었다.
“당신을.”
박율은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짓을 하게 될지.
박율의 망치가 내려찍힌다.
콰직!
박율의 기억 속 이명석은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죽여야 했다.
하지만.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악인(惡人)이었지만, 그는 선인(善人)이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이명석의 머리를 부수지 못했다.
망치는 타고 올라오는 마기의 끝자락을 내리쳤다.
작고 하얀 불씨가 끝에 붙었다.
하지만 마기는 그것마저 삼켰다.
“...감사합니다.”
이명석은 웃었다.
이윽고 그 미소는 마기에 잡아먹혔다.
검디검은 흑이 그의 얼굴마저 집어삼켰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파앙!!!
폭발하는 마기는 돌풍처럼 몰아쳐 박율을 저멀리 날렸다.
쿠당탕!
“후우...”
마기에 날아가 바닥을 뒹굴던 박율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명석을 죽이려는 마음을 거둔 이후부터 수많은 상황을 생각했다.
“...정신 차리게 해줄게요.”
이명석은 저 멀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 걸음.
그에게 남아 있던 여백이 사라지고.
한 걸음.
그의 의지 마저 흑에 지배당한다.
그리고 한 걸음.
마기로 이루어진 갑옷을 온몸에 두르고, 마치 태초부터 그의 존재가 흑이었다는 듯 검게 변해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서 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마기에게 온전히 사로잡혔다는 소리였다.
손에서 갈무리하는 흑색 빛의 검은 박율을 향해 높이 들었다.
그것은 살기였다.
박율 역시 하얀빛으로 된 검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빛은 충돌한다.
카앙!!!
흑과 백이 부딪히며 황금빛의 불빛을 세상에 퍼뜨린다.
카앙!!!
흑은 백에 물들고, 백은 흑에 물든다.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두 가지 빛은 서로를 잡아 삼키려 아구를 벌렸다.
어느 빛 하나가 사위질 때까지.
어느 빛 하나가 다른 빛에 완전히 물들 때까지.
두 빛은 격돌했다.
* * *
흠칫.
몸을 둥글게 말아 잠을 청하던 데판은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허공에서 균열이 벌어졌다.
벌어진 균열에서는 흑과 백의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앙!!!
두 빛은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마주하는 두 검신은 서로를 같은 색으로 물들이기 위해 허공을 가르고, 쇳소리를 울렸다.
[뭐하는 짓이지?]
데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카앙!!!
두 검신은 또 다시 부딪혔다.
“딱 보면 몰라요? 싸우고 있는 거?”
[왜 안 죽이는 거냐고 묻는거다.]
그의 눈에 보인 전투는 아주 일방적이었다.
박율은 당장에라도 흑으로 덮인 남자를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고 있었다.
공격을 받아주고 있을 뿐이었다.
“다 생각이 있어서.”
카앙!!!
“그런 거니까...!”
박율은 날아드는 칼날을 막으며 소리쳤다.
두 사람의 전신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 흑의 남자는 박율 너머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었다.
박율은 그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 먼저 달려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비...켜...”
“못 비켜요.”
박율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명석은 어떻게든 그를 뚫고 남자를 죽이려 하지만, 박율은 물러서지 않았다.
캉!!!
캉!!!
그의 움직임은 점점 격해졌다.
마치 두꺼운 벽을 부수듯 검을 내리쳤다.
“비켜...!!!”
“절대.”
“비켜!!!”
마기로 덮인 그의 목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구슬펐다.
구슬펐기에 더더욱 분노가 젖어있었다.
박율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이명석은 포효했다.
그리고 절규했다.
남자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마지막 잎새까지 앗아간 남자를 죽이기 위해 울고 있었다.
“당신이 자신을 버리지 못하게 할 겁니다.”
박율은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카앙!!!
카앙!!!
이명석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절망했다.
또 한 걸음.
절규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울음을 토해냈다.
박율은 더더욱 그를 압박했다.
그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비록 그가 포기하지 않을지언정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 끝에서 그는 분노에 젖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분노는 하나의 형상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뒤덮은 흑이 하나의 형상이 되어.
그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흑이었던 남자는 흑 속에서 흑과 백으로 나뉘었다.
백으로 된 이명석과 흑으로 된 형상.
두 인물은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이때를 노렸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거기 고양이 아저씨.”
데판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박율을 보았다.
“단탈리온 그 양반이 그랬잖아요. 나의 그림자를 쫓아가라고.”
[...그래서?]
불길한 한마디였다.
“저쪽도 그림자를 소환했는데 우리도 그림자 소환해야죠.”
[그게 무슨...]
박율은 덥썩 데판의 목덜미를 잡았다.
[...! 뭐하는 짓이냐! 이거 놔라!]
미야옹, 데판은 소리를 지르지만, 박율은 개의치 않고 데판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정면의 흑과 백을 보았다.
박율은 데판을 백으로 된 이명석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는 데판을 한 손으로 패대기쳤다.
퍽!
쿠당탕!
[이...]
데판은 던져졌다는 사실보다는 한 손에 내팽겨 쳐졌다는 사실에 분개한 듯 이를 빠득 갈며 일어났다.
그리고 덩치를 불렸다.
“열심히 상대해주시고.”
박율은 흑으로 된 이명석을 보았다.
우수에 젖은 그의 눈 역시 박율을 보고 있었다.
“제발...”
“제가 말했죠? 정신 차리게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