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박석훈은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산이었다.
눈을 가지고, 손을 가지고, 뿔을 가진 악마의 형태였지만, 그것은 산이었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아득한 존재.
박석훈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산을 보았다.
거대한 산 역시 그저 가만히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죽음에서 비롯되는 공포.
토머라 불리우는 그 악마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무력함.
박석훈은 자신의 키보다 곱절은 더 큰 악마를 앞에 두고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박율이라는 사람을 눈 앞에서 죽였던, 그리고 그를 죽음이라는 것의 코앞까지 몰아세웠던 그 악마와 같은 위압감을 가진 저 악마는 그에게 공포를 선사하고 있었다.
“어...어...”
박석훈은 공포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유...율 씨...!!!”
한 걸음.
악마가 그를 향해 다가간다.
“아...악마가...!!!”
그리고 한 걸음.
고작 두 걸음이었지만, 벌써 그 악마는 박석훈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기지 못한다.
이길 수 없다.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석훈 씨!!! 도망쳐요!!!』
뇌리에 박율의 목소리가 진동을 하지만 그는 이미 공포라는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눈 앞에 존재가 가진 위압감에 갇혀 패닉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못했다.
그의 뒤엔 세 사람이 미로에 갇혀 있었다.
만약 그가 자리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분명 이 악마는 세 사람을 죽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공포에 벌벌 떨면서도 주먹을 쥐었다.
[설마 싸우자는 건가?]
할 수 있다.
그의 권능은 강기.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면 무너지지 않는 기상을 가진 사내였다.
『석훈 씨, 조금만...!』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박율의 소리.
그것만으로 그는 악마에 맞설 수 있었다.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는 악마의 앞에서 박석훈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악마가 그를 가볍게 때리자, 그의 몸은 길거리의 돌멩이마냥 날아가 굉음을 일으키며 벽에 부딪혔다.
쾅!!!
“커헉...!”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면, 이미 악마는 그의 앞에 있었다.
[끝이야? 더 해봐.]
『조금만 버티면 갈 테니까...!』
그를 믿는다.
박석훈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악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마는 한 손가락으로 그의 주먹을 막았다.
[이걸로 뭘 하려고?]
다시 악마가 그를 후려쳤을 때, 그의 몸은 하늘을 날아 성벽을 부쉈다.
콰과광!
박석훈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겨우 눈을 떴다.
저 아득한 존재는 그야말로 무색무취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저 존재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똥 마려운 똥개마냥 떨지 말고.』
또 다시 들려오는 박율의 소리.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내뱉는 그 덕분에 박석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길 수 없다면 그저 버틴다.
언제나처럼 박율이 찾아와 그를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턱!
눈 깜짝할 새 다가온 악마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고작 목이 잡힌 것만으로 시야가 아득해지고, 머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죽음.
토머와 대적할 때 느꼈던 그 공포와 무력감.
그는 또 한 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쿠구궁!!!
* * *
손끝에 간신히 걸쳐 잡은 망치가 허공을 질주했다.
고작 휘두르는 것만으로 태풍이 일고, 바닥에 금이 간다.
그리고 망치가 벽에 닿는 순간.
쩌적!
단단하기 그지없던 벽에 번개 같은 균열이 벌어지고.
이내.
콰과광!!!
미로를 집어삼킬 듯 부풀어 오른 망치는 벽을 부쉈다.
그리고 다른 벽을.
그 너머의 벽을.
“큭...!!!”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고, 떨리는 팔의 진동은 전신으로 퍼져 몸을 지탱하는 다리마저 울렸다.
박율의 두 팔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미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미로를 파괴하고 있던 망치를 막지는 못했다.
박율의 허리가 원에 가까운 움직임을 끝냈을 때, 미로는 형태를 잃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아악!!!”
박율은 양팔을 부여잡았다.
찢어질 듯 솟구치는 고통에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팔을 잘랐으면 하는 고통이었다.
“그만...!!!”
고통은 그의 전신을 기어올랐다.
어깨를 움켜진 손에서 피가 나오고, 살이 패여도 고통은 멎질 않았다.
온몸을 웅크리고 있던 차영훈과 김진목은 그의 비명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율 씨...!!!”
박율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겨우 소리를 쫓아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상태를 본 두 사람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오지...마!!!”
미로를 끝내야 한다.
“빨리...!!! 끝내요...!!!”
“네...네!?”
차영훈은 벙찐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석훈...석훈 씨가 위험해요...!!! 빨리...미로를...끝내요...!!!”
박율은 흐트러지는 정신 속에서 겨우 실눈을 뜬 채 소리쳤다.
그제야 두 사람은 사태가 이해된 듯 그를 지나쳐 미로의 끝으로 달렸다.
“으...으...”
박율은 떨리는 손으로 나침반을 꺼냈다.
“석훈...석훈 씨... 괜찮...아요...?”
역시나 대답은 오지 않았다.
척후를 써서라도 그의 동태를 살피고 싶었지만, 당장 손을 들어 올릴 힘조차 부족했다.
쿠구궁!!!
그 사이 두 사람은 미로의 끝에 도착한 듯 지반이 흔들리며 무너진 벽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폐허 같았던 미로는 처음 그들을 반겼던 성으로 바뀌었다.
다만 처음과 완전히 똑같진 않았다.
사방이 무너져 있었고, 한쪽 벽은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곳엔.
“석훈 씨!!!”
김진목은 소리쳤다.
무너진 벽 앞엔 악마에게 목을 붙잡힌 박석훈이 있었다.
그는 악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지만, 악마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되려 더욱 세게 그의 목을 조였다.
박석훈의 얼굴은 새파래져 당장에라도 죽을 듯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박율은 어떻게든 그를 살리고 싶었지만, 미로를 부순 후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움직여라...!!! 제발...!!!”
고통에 떨리는 팔은 여전히도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박석훈은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발...!
박율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악마의 정수를 몇 개 꺼내지만 떨리는 손은 정수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만 떨어뜨렸다. 침착하자.
박율은 심호흡을 하며 떨어진 정수를 주웠다.
[흡수]
하지만 정수를 흡수해도 그 반동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아...안돼...!”
박석훈의 몸이 저항을 포기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는 죽는다.
“영훈 씨, 할 수 있겠어요?”
“해봐야죠.”
박율은 흠칫 소리를 쫓아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옆에 있던 두 사람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의 성유물을 꺼냈다.
그리고 먼저 김진목이 악마를 향해 달려갔다.
그 뒤에서 차영훈 역시 봉술을 구사하며 그를 쫓았다.
먼저 달려간 김진목의 톤파가 악마의 목을 노렸다.
캉!
하지만 톤파의 날이 악마에게 닿기도 전에 악마는 남은 한 손으로 톤파를 막았다.
뒤이어 날아오는 차영훈의 봉.
기다란 봉은 공기를 가로지르며 박석훈을 잡은 손을 내리쳤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되려 악마는 마치 벌레는 보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이 버러지들이 감히 내 몸에 손을.]
흠칫.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꺼억...컥...”
박석훈의 단말마.
그의 소리에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달려든다.
김진목의 톤파가 악마의 허파를 스치고, 함께 날아온 차영훈의 봉이 악마의 복부를 후려치지만, 그들의 무기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악마는 날아드는 파리를 피하듯 그저 짧은 동작 하나만으로 공격들을 전부 피하고 있었다.
박석훈의 눈이 감기기 시작하며, 두 사람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때.
차영훈과 김진목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김진목은 한 발자국 뒤로 악마와 거리를 벌렸다.
다시 자세를 잡고, 달린다.
김진목의 톤파는 하얀 불꽃에 쌓여 더욱 두껍고 날카로운 날을 만들었다.
톤파의 날은 박석훈을 붙잡은 악마의 팔꿈치를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 악마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려 하지만, 이번에 날아드는 공격은 이전과 달리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강화]
차영훈의 권능이 피어오른다.
그의 권능은 톤파의 날도, 김진목도 아니었다.
피어오르는 하얀 불꽃은 톤파가 날아가는 악마의 팔꿈치를 감쌌다.
타격점의 강화.
쾅!!!
김진목의 톤파가 박석훈의 목을 움켜잡은 악마의 팔을 후려치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함께 악마는 갑작스런 충격에 그를 놓쳤다.
타격점의 강화와 김진목의 공격이 어우러진 일격이었다.
“커허억...!!! 커헉...!!!”
악마에게서 벗어난 박석훈은 구토를 하고, 분비물을 내뱉으며 그간 참아왔던 숨을 들이켰다.
새파랗게 질렸던 그의 안색은 점차 원상태를 되찾고 있었다.
차영훈은 재빨리 그를 데리고 악마에게서 떨어졌다.
“괜찮아요!?”
“허억... 허억... 가...감사...”
박석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내뱉었다.
두 번째 죽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게 기적일 정도였다.
“숨셔요...!”
차영훈은 옆에서 호흡을 맞춰주며 그의 심폐를 도왔다.
그리고 겨우 호흡을 되찾은 박석훈은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박율은 안간힘을 쓰며 움직이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도망쳐요...! 못 이겨요...!”
“우리가 도망치면 댁은 여기서 뒤지실라고?”
박율의 말에도 그들은 악마를 노려보았다.
[단탈리온을 만나러 왔더니 웬 벌레들이 있군.]
악마는 역겹다는 듯 네 사람을 보았다.
그러자 김진목과 차영훈은 아직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박율과 박석훈을 등지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의 준비태세가 무색하게 악마는 고작 한 발자국으로 그들의 앞에 나타났고, 고작 한 손가락으로 그들을 날렸다.
콰과광!!!
“커헉...!!!”
날아간 두 사람은 고통에 신음하지만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악마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끊임없이 날아들었지만, 악마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악마는 끈질기게 달려드는 두 사람을 다시 날려버리려 하지만, 그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박석훈이 뒤에서 달라붙었다.
악마는 걸리적거린다는 듯 그를 발로 찼다.
콰과광!!!
[거슬리게...]
그리고 뒤이어 달라붙는 두 사람 역시 가볍게 날렸다.
콰과광!!!
날아간 그들은 피를 토하면서도 계속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마는 그들을 날아다니는 파리 취급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날려보냈다.
성이 무너질 것만 같은 굉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턱!
“컥...!”
다시 악마에게 달려들던 김진목의 목에 악마의 손이 날아들었다.
[그냥 죽어라.]
꽈악!
김진목은 악마의 팔뚝을 내려찍지만, 그는 미동도 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콰직!
날아든 망치가 악마의 어깨를 날렸다.
“주인공 등장이다. 이 새꺄.”
박율이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