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묵직한 검날 끝에 닿은 까마귀는 살기 어린 눈으로 박율을 보고 있었다.
아직 까마귀는 쓰러지지 않았다.
되려 검에 찔린 채 더욱 깊숙이 들어와 뒤로 잡은 검으로 박율을 노렸다.
푹!
“미친...!”
박율은 간발의 차이로 까마귀를 발로 밀어내며 치명상을 막았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등 쪽에 자상이 남아있는지 뻐근한 고통이 느껴졌다.
“씨발 몰라, 그냥 덤벼.”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무리 싸워봐도 패턴은커녕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할지도 파악할 수 없는 상대에게 무슨 분석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그가 마주하는 상대는 까마귀가 아닌 까마귀의 탈을 쓴 단탈리온의 분신이다.
“짱구만 굴리다가 뒤지느니 발악은 하고 뒤져야지.”
이번엔 박율이 먼저 발을 굴렀다.
동시에 까마귀 역시 그에 맞춰 움직였다.
캉!!! 두 검이 부딪히며 쇳소리가 울렸다.
박율은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채, 검과 반대 방향으로 망치를 소환했다.
그리고 검과 함께 망치를 쳐올려 까마귀의 턱을 후려쳤다.
콱!
망치가 까마귀의 턱을 찍고는, 박율의 몸은 그대로 한 바퀴 돌아 까마귀의 가슴에 크게 휘두른다.
차악!
이번에도 역시 효과가 있었다.
까마귀의 몸뚱이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어딜 가려고!”
박율은 사라지는 까마귀를 향해 망치를 내꽂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어디로 갔어.”
[척후]
바닥을 타고 움직이는 마기가 느껴졌다.
마기는 바닥을 타고 멀어져 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타난다.
허공에서 뛰쳐나온 까마귀의 일본도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박율은 일본도를 피해 앞으로 몸을 굴렀다.
캉!
일본도가 바닥에 내리꽂히자, 박율은 재빨리 벽을 발판 삼아 뛰어 까마귀에게 망치를 내려꽂는다.
캉!!!
재빨리 들어 올린 일본도에 망치가 막히긴 했지만, 일본도를 쥔 까마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점점 까마귀의 움직임이 느려짐과 더불어 위력 역시 약해지고 있었다.
박율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캉!!!
코어와 일본도가 부딪히는 쇳소리가 귀를 스치고.
캉!!!
내려꽂히는 망치가 일본도를 찍어누른다.
그리고 그 순간.
캉!!!
“...!!!”
갑작스레 올려 친 공격에 박율은 그대로 검을 놓쳤다.
까마귀는 틈을 놓치지 않고 허리를 굽혀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다.
차악!
일본도의 첨예한 날이 박율의 복부를 스쳤다.
“큭...!”
박율은 반사적으로 배에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오래 끌면 끌수록 유리해지는 건 상대 쪽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달려든 건 까마귀였다.
박율은 아슬아슬하게 목을 지나치는 일본도를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차악!
또 한 번의 유효타.
까마귀가 뒤로 물러섰다.
박율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캉!!!
쇳소리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캉!!!
박율의 검이 위협적으로 까마귀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까마귀의 움직임이 방어에 치우쳐 봉쇄되었을 때.
“지금...!”
박율은 까마귀의 뒤, 코어와 땅바닥에 연결되어 있던 바닥의 망치를 당긴다.
캉!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날아온 망치는 까마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박율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검을 휘두르지만, 까마귀는 어느새 자세를 다시 잡고 그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까마귀는 몸을 낮추고 검을 받지만, 전처럼 위협적으로 움직이진 못했다.
캉!!!
“이제 마지막...!”
턱!
까마귀의 남은 손이 일본도의 칼집을 집더니 박율의 발목을 때렸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박율의 몸뚱이가 기울어졌다.
함께 까마귀의 검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박율은 뒤로 몸을 던져 그의 검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뒤는 벽이었다.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까마귀의 일본도는 개의치 않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피하지 못한다면 맞선다.
박율은 날아오는 칼날을 마주한 채 망치를 날렸다.
박율의 손을 떠난 망치가 정면의 까마귀를 머리를 향해 날아가고, 기울어지는 박율의 목을 따라 까마귀의 일본도가 부채꼴 궤도를 그리며 날아왔다.
“...씨...!”
척!
박율의 몸이 중심을 전부 잃기 직전 땅에 닿은 발이 그를 지탱했다.
동시에.
일본도의 날이 박율의 목 직전까지 날아들었다.
“큭...!”
카가각!
박율의 목을 자를 듯 날아온 일본도는 벽에 막혀 그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함께 날아간 망치는 까마귀의 머리를 박살내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허억...!!!”
파사삭.
날아간 박율의 망치가 까마귀의 머리를 터트리자 까마귀가 먼지처럼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움직임을 막던 마기가 사라졌다.
“...하...”
박율은 식은땀을 닦으며 주저앉았다.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
벽이 있기에 망정이었지.
대충 감을 잡았다.
본능, 본능이었다.
이 시련이 건네는 목적은 본능이었다.
본능에 몸을 맡겨라.
미래에서 왔기에,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에, 언제나 분석을 하고 계산을 하던 움직임에서 탈피해 그저 본능에 움직였다.
그 결과 그는 까마귀를 이겼다.
진짜 까마귀였어도 이겼을 까?
그건 미지수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그는 까마귀를 죽였고, 미로의 시련을 이겨냈다는 것이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심장 터질 뻔 했어요.』
박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후... 이제 위치 말해주세요.”
그가 움직인 칸은 총 네 칸.
한 칸 한 칸 움직이는 동안 계속해서 마수들이 나타났지만, 첫 번째 칸의 마수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겨우 도착한 벽 앞에서.
“이거죠?”
탁.
이번엔 아무 이변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트리거를 맞췄단 소리였다.
“후... 그럼 다음은 누구에요?”
* * *
『영훈 씨! 이제 영훈 씨 차례에요!』
“저기... 어디서 말하는 지는 몰라도 저 지금 정신이 없거든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차영훈은 거구를 자랑하며 다가오는 골렘을 보고 있었다.
족히 수십 미터는 넘을 법한 덩치에 저 커다란 손은 보기만 해도 공포가 일 정도였다.
게다가 저 돌로 된 몸덩이는 어찌나 단단한 지 벌써 수십 번은 내려쳤지만, 부서지기는커녕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봉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흡...!”
골렘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차영훈은 날아드는 손바닥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저 골렘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저기서 조금만 더 빨랐어도 그는 벌써 쥐포가 됐을 것이었다.
“왜 하필 이 무기를 골라 가지고...”
차영훈은 원망스런 눈길로 손에 쥔 기다란 봉을 보았다.
이 무기 말고 다른 무기만 골랐어도 벌써 저 골렘을 없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김진목처럼 톤파를 골랐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
하긴 그 사람은 애초에 권능부터가 무기를 잘 다루는 능력이니...
그래도 이 봉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가 쥐고 있는 기다란 봉은 설립을 준비 중인 협회라는 곳에서 받은 무기였다.
조금 늦게 찾아간 까닭에 선택할 수 있는 무기가 얼마 없긴 했지만, 그가 봉을 선택한 이유는 무기에 무지한 그에게 그나마 휘두르기 용이 했던 탓이었다.
활은 쏴도 맞추지 못하고, 철퇴는 무겁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 봉은 마냥 휘두르기만 하면 되니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금 저 골렘을 마주한 이후 그의 생각을 모조리 고쳐 먹게 되었다.
무기보단 사용자의 능력이 더 중요했다.
또 다시 골렘의 주먹이 날아왔다.
차영훈은 주먹을 피해 몸을 던졌다.
“하...”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소모전으로 간다면 결국 죽는 쪽은 자신이었다.
이제는 상대를 해야 한다.
차영훈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봉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또 다시 골렘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는 날아드는 주먹을 피해 골렘의 안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봉을 휘두른다.
탁!
“...에라이...”
역시 봉으로는 데미지는커녕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는다.
“...!”
잠시 침음을 하는 사이 골렘의 나머지 손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흡...!”
[강화]
순식간에 그의 권능을 온몸에 내둘렀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불꽃이 그의 몸을 태우듯 감싸더니 이내 그의 몸을 강화시켰다.
쾅!!!
골렘의 주먹과 그의 몸뚱이가 부딪히며 굉음이 울렸다.
함께 주먹에 맞아 날아간 그의 몸은 저 멀리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크헉...!”
강화를 온몸에 둘렀음에도 충격을 모두 흡수하지 못했다.
골렘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후...”
차영훈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일어났다.
가만히 있다가 죽기는 싫었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땐 박율이라는 사람이 쓰는 방법이 먹히기도 했다.
일단 달려들고 본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골렘의 주먹을 피하고 깊숙이 들어가 봉을 크게 휘둘렀다.
탁!
역시나.
차영훈은 골렘의 다리 사이로 몸을 던져 다음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피했다.
콰과광!!!
땅바닥으로 떨어진 골렘의 주먹은 바닥을 아작냈다.
차영훈은 계속해서 봉을 휘둘렀다.
기다란 방의 앞부분이 골렘의 다리를 후쳐치고, 뒷부분이 골렘의 허파를 때린다.
“좀 죽어라, 제발...!”
수십 대를 봉으로 때려도 반응이 없다.
되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느라 그의 기력만 바닥을 치고 있었다.
『거, 답답하시네.』
차영훈은 흠칫 들려오는 박율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향을 특정할 수 없는 소리였다.
뇌리에 틀어박히는 무언가 전파같다는 느낌.
“어...어디에서...”
『박물관 때를 생각해요.』
“네...!? 저기요?”
대답은 없었다.
제 할 말한 하고 목소리는 사라졌다.
박물관?
그가 처음 악마와 합을 나누었던 그 곳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가 권능을 이용한 곳이기도 했다.
차영훈은 소리의 정체를 채 깨닫기도 전에 날아오는 골렘의 일격을 피하느라 몸을 던졌다.
강화는 대상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박율의 말이었다.
순간 그 말에 뇌리를 감돌았다.
허공에 사용했던 그 능력.
그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능력을 써야 할까.
차영훈은 다가오는 골렘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봉을 보았다.
뭉특한 봉의 끝자락.
지금껏 그가 사용해온 강화라는 능력은 무기 혹은 대상을 전체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강화의 대상을 한 점에 모은다면 어떻게 될까?
가능할까 싶은 마음보다는 일단 뭔들 해보자는 마음 뿐이었다.
차영훈은 지반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골렘을 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골렘의 팔이 다시 그를 낚아채려 하늘 높이 올라갔다 그를 향해 내려찍힐 때.
그는 재빨리 주먹을 피하고 봉 끝에 권능을 집중했다.
뭉툭했던 봉 끝에 옅은 색의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골렘의 중심을 향해 봉을 내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