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일어나. 어쭈? 느리다. 더 빨리.”
살기를 내뿜는 서희의 앞에서 박율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온갖 기행을 벌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입을 꾹 닫고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팔 벌려 높이 뛰기 백 오십 회, 몇 회?”
“배...백...”
“몇 회!?”
“백 오십 회!”
“이백 회!”
“이백 회!!!”
“실시!”
“실시!!!”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은... 마치 군대가 생각나는 똥개훈련이었다.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미술관에서 난동을 피운 만큼 어느 정도 꼬장을 부릴 것이라고 예상은 했기에, 적당히 받아줄 만큼 받아주고 대충 넘기려고 했지만...
저것만 아니었어도...
박율은 이를 빠득 갈며 발 앞에 놓여진 그림을 보았다.
분명 확실하게 부쉈고, 확실하게 부서지지 않게끔 조절했다.
하지만... 그 사이 진짜로 파손된 그림이 하나 있었다...
끝자락에 아주 자그마한 흠집으로 그쳐서 다행이지.
혹시라도 진짜 저 그림에 문제가 생겼다면 지금쯤 박율은 아마 염라대왕과 소꿉놀이라도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율 씨, 파이팅...!”
“자기 아니라고 증말...”
“누가 잡담해도 된다고 했지?”
박율은 흠칫 서희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팔 벌려 높이 뛰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횟수가 100을 조금 넘어가고 있을 때쯤.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에라이 씨 안해!”
박율은 들고 있던 망치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뭐...?”
“우리가 뭐 그림을 부순 것도 아니고! 고작 끝에 살짝 부서진 거잖아요! 뭐 이렇게 쪼잔해요?”
“...쪼잔? 다시 말해봐.”
“아니, 그렇잖아요. 고작... 잠깐, 누나 그 표정 풀어요. 그거 아니야. 에이...”
야차다.
서희의 덩치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모든 이들의 동공만큼이나.
죽는다.
이건 정말.
죽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거 알죠...?”
“다시 말해봐. 내 그림이 뭐 어쩌고 저째?”
그녀는 당장에라도 그를 찍어누를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박율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이러나저러나 누가봐도 훌륭한 작품인데 끝에 흠집 하나 난다고 작품의 수준이 떨어집니까? 원래 훌륭한 미술은 작은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그 변화까지도 미술로 승화시키는 거잖아요! 지금 봐요! 그림의 격이 달라진 거같지 않아요!? 마치 ‘피카소’처럼!”
박율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속에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서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몹시나 즐긴다.
게다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피카소’까지 얹는다?
말 그대로 그녀에게 있어서는 금상첨화, 극찬 중에 극찬이나 다름 없었다.
역시나 서희는 박율의 말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수줍은 얼굴을 했다.
“큼큼... 그래, 뭐. 어느 정도 작품을 보는 눈이 아예 없진 않나보군.”
“예, 뭐...”
박율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서희는 조금은 침착해진 눈으로 박율을 보았다.
“그래, 그래서 이제는 좀 들어봐야겠어. 날 부른 이유가 뭐지?”
“하... 드디어...”
근 한 시간 가까이 기행을 부리다 이제야 본론에 진입하다니...
박율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서희의 두 눈을 응시했다.
“예, 뭐, 다른 건 아니고 서희 씨의 미래 예지 능력을 빌리고 싶습니다.”
“...뭐?”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입니다.”
박율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게 바뀌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최측근에게조차.
야차 정도야 그녀의 측근이라면 불같은 성격에 가끔 보았겠지만.
다시 말해 아직 그녀의 능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맞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 능력에 대해 말을 내뱉었다.
서희는 서서히 일그러지는 얼굴로 박율을 훑었다.
테러라는 이름으로 이렇게까지 난장판을 피우며 그녀를 부른데다가, 그녀의 스승이 그린 그림을 알고,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박율은 더 이상 그저 평범한 테러리스트는 아니었다.
서희는 순식간에 박율의 몸을 벽에 밀치고 팔뚝으로 그의 목을 막았다.
“너 뭐야...?”
“악! 이거 좀 놓고...”
“죽기 싫으면 똑바로 얘기해.”
서희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미술관이 싸하게 변할 정도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세 사람이 저도 모르게 물러설 정도로.
그녀는 진실을 고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박율은 양손을 높이,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손을 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까지도 서희는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박율은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서희는 이맛쌀을 찌푸리며 명함을 보았다.
[길드 RYUL]
[대표이사 박율]
“허, 저건 또 언제 만들었데?”
그를 지켜보던 박석훈의 말이었다.
박율은 몰래 그를 보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이를테면 보험이었다.
언제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길드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길드원...?”
“얼마 전에 봤을 거에요. 남산타워에 나타난 커다란 악마.”
“...”
“앞으로 3주 후 또 다시 악마들의 침공이 있을 겁니다. 그 사태를 막고자 서희 씨를 영입하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마시던가.”
그의 뻔뻔한 태도에 서희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박율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명함을 보고 있는 서희의 팔을 치우려 했지만, 그녀는 더욱 세게 그의 목을 압박했다.
명함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서희는 흠칫 눈을 의심하더니 이내 그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메스컴이 집중했던 악마를 사냥하던 그 남자.
박율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팔을 치울 수 있었다.
“자...잠깐 너...!?”
“예, 맞아요. 그놈.”
“분명 죽었다고...”
“죽은 척 한 거에요.”
서희는 여전히도 그를 응시하며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어때요. 이젠 좀 믿겠어요?”
“자...잠깐...”
서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영입하려고 이 염병을 떤 거라고?”
“정답.”
“스승의 그림을 부순것도...?”
“그 그림 싫어하잖아요.”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베일에 싸인 히어로 정도로 해두죠.”
“잠깐, 잠깐만...”
서희는 잠시 양손 중지로 머리를 짚었다.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의 향연이었다.
“당신이 원하게 ‘될’ 걸 하나 드리죠.”
“...뭘?”
박율이 서희와 함께 지낸 시간만 9년에 가까웠다.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석을 드릴게요.”
“청석...? 그게 뭐지? 처음 들어보는데?”
“모르는 게 당연하죠. 아직 이 세상에 없는 물건일테니까. 쉽게 말해 모든 색으로 변하는 염료죠. 빛을 가하는 방식에 따라 색이 변하는 원석입니다. 제가 아는 이가 말하기를 천의 염료라고.”
아는 이라고 해봐야 미래의 서희겠지만.
지금의 서희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돌이니까.
박율이 예술 쪽에 조예가 깊은 것도, 그렇다고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수년간 그녀를 곁에 두고 살아온 입장으로써 그것만큼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저 여자는 청석을 원하게 된다.
박율은 일전에 킹콩의 등에 붙어있었던 그 원석, 주머니에서 청석을 꺼냈다.
다이아몬드와 사피이어를 섞은 것만 같은 특이한 형태의 원석이었다.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있더라고요. 물론 마계에.”
청석을 본 서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바뀌었다.
마치 이것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박율은 시범이라도 보이겠다는 듯 하얀 불꽃으로 청석을 태웠다.
그러자 짙은 청색이던 청석의 색이 적색과 황색을 거쳐 백색에까지 도달했다.
서희 역시 변하는 색에 따라 더 충격적인 얼굴을 했다.
박율은 그녀의 손이 청석에 닿기 직전 재빨리 청석을 집어넣었다.
“이...이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단탈리온이라는 악마의 위치를 찾아주세요.”
“뭐?”
“그렇게만 해주시면 청석을 가져오겠습니다.”
“내...내가... 고작 그런 걸로 유혹당할 줄 알고?”
당했다.
저 표정은.
이미 넘어올 만큼 넘어왔다.
“청석이 또 그렇게 흔한 원석이 아니라서 말이죠.”
“뭐...?”
“이 청석이 마계에 있는다한들 늦으면 구경도 할 수 없다, 뭐 그런 말이죠.”
물론 거짓말이다.
마계에 가면 천지에 깔린 게 청석이었다.
“뭐,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술관을 나가려는 듯 발을 돌렸다.
턱.
성공이다.
“잠깐...”
* * *
나름의 거래를 끝낸 후 서희는 미술관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캔버스를 놓았다.
“그의 이명은 단탈리온, 다른 이름은 미래를 보는 대공작.”
서희는 박율의 말을 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림 안 그려요?”
“쉿.”
박율은 박석훈의 물음에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지금부터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작은 방해도 용납하지 않는다.
한참을 두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있던 서희는 이내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린다.
눈꺼풀이 내려앉은 두 눈은 무엇을 보는 지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선과 선을 잇고, 그 선에 교차하여 선을 그린다.
쉴틈없이 말을 내뱉는 박율이 유일하게 숨을 죽이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서희가 그림을 그리는 지금 이 순간.
마치 천사가 강림하여 붓이라는 검을 휘두르는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푸른색의 선은 마치 태평양의 바다를, 초록색의 선은 마치 아마존의 우림을 연상케 하는 손놀림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세계에 함께 흠뻑 젖어든다.
그녀를 보는 다른 세 인물의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캔버스 위에 그림은 점점 형태를 갖춰갔다.
그저 아리송한 선들의 향연이던 것들이 어느새 하나의 그림이 되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예술로 변한다.
그 선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고 나서야 서희는 붓을 내려놓았다.
“후...”
그리고 눈을 뜬다.
서희 역시 그제야 자신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 폭의 그림에 담긴 수많은 선들.
서희는 그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그림을 보는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심정이리라.
“숲...?”
김진목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림은 마치 하나의 숲을 그린 것마냥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근데 이건 뭐에요?”
차영훈이 그림 속 한 점을 지목했다.
그리고 뒤따라 박석훈이 말을 이었다.
상공에 검은 반점 하나가 있었다.
“눈을 감고 그려서 잘못 그린 건가?”
박석훈이 말했다.
그의 말에 서희는 잔뜩 인상을 지었다.
그리고 그 와중, 반점을 보는 박율의 표정은 다른 이들의 얼굴과는 달랐다.
그는 저 반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심연의 골짜기.”
“예?”
박율은 저 숲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