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검은 형체 간호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따라 고통에 떨리는 검은 형체는 발버둥을 치다 이내 축 늘어졌다.
털썩.
흰자위를 드러내며 축 늘어진 검은 형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백봉기는 웃고 있었다.
“아...”
일그러진 간호사의 검은 형체는 마치 기생충마냥 그의 손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형체가 백봉기의 전신을 감싸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은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다.
손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
흠칫 인기척이 느껴졌다.
평범한 인기척은 아니었다.
살기.
백봉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문을 열었다.
문 너머, 그리고 아이의 앞에 검은 옷을 입은 까마귀 가면의 행인이 서 있었다.
“그 손 놔.”
백봉기는 말했다.
함께 그의 발바닥에서부터 번지는 검은 자국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검은 자국에서 기어 나오는 검은 형체의 해골들.
그제야 까마귀는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나타났군.”
까마귀는 가볍게 달려드는 해골들을 베어 갈랐다.
하지만 해골들은 베어도 베어도 살아나 그에게 몸을 던진다.
스륵.
해골들을 상대하던 까마귀의 형체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척.
순간 백봉기의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
백봉기는 살기를 피하려 하지만, 목에 들어오는 칼날이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너 뭐야?”
“주군의 명이다.”
툭.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밑에서 늑대 형태의 가면이 나타났다.
“주군? 플라우로스를 말하는 건가...?”
“나의 주군은 바알이다.”
백봉기는 순식간에 발을 돌려 까마귀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까마귀는 사라졌다.
드르륵.
탁.
“오늘 기우 상태...”
문 너머에서 간호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병실을 가득 채운 해골무리였다.
“이게 무슨...?”
그녀와 백봉기가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호사는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벌렸다.
“사...살려...주...”
백봉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
콰직!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해골은 그녀의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그림자 속으로 그녀의 흔적이 사라진다.
백봉기는 그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진 늑대 가면을 주웠다.
“내가 너희를 따라가면 내게 무슨 이점이 있지?”
“네가 더 잘 알텐데.”
까마귀는 기우의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백봉기는 까마귀를 응시하며 쥐고 있던 가면을 쓴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간다.
까마귀와 함께 그림자 속으로.
드르륵.
“율아.”
* * *
마기.
분명한 마기였다.
병원의 앞에서 박율은 마기를 쫓아 고개를 들었다.
“뭐야...?”
심연의 골짜기가 나타났다면 그에 따른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오직 마기만을 느꼈다.
그것도 상급 악마에 준하는 마기를.
게다가 이곳은 기우와 백봉기가 있는 병원이었다.
조금만 늦더라도 참상이 벌어진다.
박율은 마기를 쫓아 뛰었다.
병원 문을 열고 마기를 쫓는다.
엘리베이터로는 늦다.
계단을 타고 달린다.
마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불길함이 느껴진다.
이 불길함의 진원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지만, 마기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불길한 감은 현실이 되어갔다.
마기가 가장 짙은 층에 도착해서도 박율은 부정했다.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곳은 백기우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병실의 앞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악마의 마기였다.
드르륵.
문을 연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백봉기와 까마귀의 뒷모습.
“...형!!!”
박율은 땅을 박차고 사라지는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쿠당탕!
하지만 때는 이미 그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기우도, 백봉기도, 까마귀도, 전부.
“봉기형!!!”
[척후]
마기를 쫓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창밖에서도, 건물 안에서도.
그들은 이미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그들의 존재가 지워졌다.
“어디갔어...!!! 돌아와!!! 이 개새끼야!!!”
소리를 내질러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한참을 내지르던 박율은 결국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잘못됐다.
“왜 형이 까마귀와 같이...?”
그리고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백봉기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니 확실하게 보았다.
얼굴을 가리는 늑대 가면과 그 가면을 쓴 인물은 백봉기였다.
무언가... 무언가...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왜 백봉기가 악사회를 따라갔고, 가면을 받은 거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
떠오른 퍼즐의 한 조각이 전체를 은유하고 있었다.
이전의 역사에서도 만약 그가 악사회였다면?
만약 그가 아이의 생명을 담보로 가면을 쓰게 된 거라면?
그렇다면...?
박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가능성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 * *
계획을 당길 시간이었다.
박율은 먼저 장대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가?”
“회장님.”
박율은 후하며 비장한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염치 없지만, 서희 미술 전시회 입장권 네 장만 좀 구해다 주십죠.”
“무...뭐?”
“서희 미술 전시회 입장권이요.”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에요. 서희 미술 전시회 입장권.”
“...꼭 필요한...”
“무조건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박율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서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인 중 하나로 당장 미술 전시회를 예약하려면 못해도 한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슈퍼스타 예술가였다.
그리고 함께 그녀는 추후 악마사냥의 주축이 되는 위인 중 하나였다.
그녀의 능력은 예지(豫知)
미래에 일어날 일을 그림으로써 표현하는 예언가였다.
하지만 당장 미술 전시회를 가더라도 서희를 만날 확률은 거의 희박했다.
워낙 일정이 빡빡하고 일분일초가 비싼 위인인지라 그녀를 만나는 것조차 계획에 일환으로써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찾아야겠지.
찾아오지 않는 상대를 찾는 방법은 찾아가는 방법이 답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마저 박율은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박석훈과 차영훈, 김진목에게 전화를 걸었다.
“석훈 씨. 당장 제가 보낸 주소로 튀어와요.”
“진목 씨도 당장... 아, 예 저 안 죽었어요.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아니다 나중에 한지원 씨나 박석훈 씨한테 들어요. 설명하기도 귀찮으니까. 여하튼 얼른 와요.”
“귀찮게 대답하지 말고, 저 안 죽었고, 나중에 설명할 거고, 일단 튀어와요. 영훈 씨.”
박율은 전화를 끊자마자 움직였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아까웠다.
그리고 열릴 미술 전시회 앞에 도착했을 때.
때맞춰 장대호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무 늦은 탓에 표는 구하지 못했네만, 내 이름을 대면 들여보내 줄걸세.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경우 없는 전화는 사양하네만.]
“용건만 딱딱 말하는 걸 좋아하면서 수줍어 하시긴.”
박율은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침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박석훈이 보였다.
“율 씨...!”
“빨리 와요. 왜 이렇게 늦어요? 일도 그만둔 백수 양반이.”
“아니, 갑자기 불러다 놓고 왜 이렇게 늦었냐뇨.”
“나 였으면 10분은 일찍 도착했어요.”
“요즘 율 씨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뭐만 하면 계속 일을 만드니까...”
“이게 다 석훈 씨를 위한 거에요.”
“율 씨! 석훈 씨!”
한참 아웅다웅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익숙한 두 얼굴이 걸어왔다.
못 본 새 두 사람은 전보다 더 번듯하고 깔끔한 차림으로 변해있었다.
김진목은 반갑게 인사를 하다 박율을 보며 감탄아닌 감탄을 내뱉었다.
“빨리 오세요. 늦었어요!”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율 씨 죽은 거 아니었어요?”
“말하자면 기니까 일단 들어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차영훈 역시 박율을 이리저리 살피며 그가 진짜가 맞는지 확인을 했다.
심지어는 손가락으로 박율의 볼을 살포시 누르기도 했다.
“저 박율 맞고, 안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만해요. 기분 이상하니까.”
“예...예...”
그럼에도 두 사람은 박율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탄사를 내뱉었다.
“생각 중인 일들을 하려면 죽은 사람으로 움직이는 게 더 편하거든요. 그래서 퍼포먼스 좀 한 거에요.”
“근데 진짜 죽은 줄 알았는데.”
“그렇겠죠. 가짜는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모인 게 얼마 만이에요? 그 날 이후로 처음이네. 영훈 씨랑 진목 씨도 바빠졌고, 저도 바빴으니까.”
“제일 중요한 건 저 사람이 죽었었던 거죠.”
김진목은 빼먹으면 안된다는 듯 손가락까지 치켜세우며 박율을 보았다.
“자! 각설하고 입장합시다.”
드디어 모인 네 사람은 박율을 필두로 미술관에 입장했다.
박율을 보며 감탄을 내뱉던 두 사람과 박석훈은 미술관에 들어서자 이번엔 다른 느낌의 탄사를 내뱉었다.
신기함이나 대단한보다는 이게 뭐지 하는 느낌의 감탄사였다.
너무나 난해한 그림들이 사방에 걸려있었다.
“그나저나 뭐하려고 이렇게 다 부른 거에요? 다 같이 모여서 그림 구경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박석훈이 물었다.
“여기서 찾을 사람이 있거든요.”
“누구요?”
“누구겠어요?”
“모르니까 물었죠.”
“저랑 그렇게 같이 다녔는데 아직도 몰라요?”
“...아마 한평생을 같이 다녀도 모를 거 같아요.”
박석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박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찾을 인물은 서희라는 사람입니다.”
“아 서희... 서희요!?”
서희라는 말에 세 사람이 함께 놀란 소리를 내뱉었다.
박율은 뭐가 대수냐는 표정으로 세 사람을 보았다.
가장 먼저 운을 뗀 사람은 김진목이었다.
“제가 아는 그 서희요...? 막 티비 나오고, 해외가서 그림 그리고 하는...?”
“맞아요.”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요? 여기 서희 미술 전시회에요”
“알죠... 아는데... 서희가 여기 있을거란 보장도 없잖아요? 보통 전시회 열면 호스트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박율은 정확하게 집었다는 듯 엄지를 치켜올렸다.
“맞아요. 아마 지금 여기 없을 거에요. 방송이랑 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멀리 나가 있겠죠.”
“근데 어떻게 찾아요...?”
이번엔 차영훈이 물었다.
그의 질문에 박율은 대답 대신 발을 옮겼다.
“이렇게요.”
박율은 벽에 붙은 그림 한 점을 떼어내 바닥에 패대기쳤다.
동시에 미술관의 모든 이목과 경비원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이래서 여러분들을 부른 거에요.”
어이없는 대난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