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박율은 숨을 헐떡이며 울창한 숲속을 뛰어다녔다.
무슨 놈의 속도가 저렇게 빠른지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감시는커녕 구경도 못할 지경이었다.
“천천히 좀 가라...!”
명색이 원숭이과라고 커다란 덩치로 저 작은 나무들을 타고 다니는 모습은 퍽 안쓰러울 지경이었지만, 안쓰럽고 나발이고, 좀 멈췄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박율도 나름 나무도 타고, 땅을 구르면서 달렸지만, 아무리 달려도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아...!!!”
박율은 오르막길 앞에서 결국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 가라, 가! 이 새꺄! 가 인마! 나도 너 안 잡아! 여자 주인공 안 해! 나 사실 킹콩 싫어해!”
그리고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씨 내가 왜 이러고 있냐.”
분명 성유물을 찾으려고 찾은 곳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마수의 등장에 이 넓은 산을 두발로 뛰어다니고 있다니.
꼭 잡을 필요가 있을까?
“...괜찮겠지. 뭐. 킹콩도 산에서만 움직이고 있으니까.”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등산로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도 아니니 굳이 쫓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알기로 킹콩은 귀소본능이 아주 뛰어난 마수였다.
그래서 다 때려 부수는 개차반인 성격에, 말릴 사자도 없었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동물이었다.
그리고 나무를 타고 이동하는 킹콩의 특성상 나무가 없는 지상으로 내려갈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 괜찮겠지.”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오오오!!!”
하지만 클리셰라고 했던가.
“꼭 이래. 꼭. 썅.”
“우오오오오!!!”
“기차화통을 삶아드셨나.”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척후]
드넓게 펼쳐진 산마루 저 끝에 킹콩이 보였다.
“이야, 그새 저기까지 갔어.”
그리고 넓은 산을 떠돌아다니던 킹콩과 누군가가 마주하고 있었다.
킹콩은 포효를 질렀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저기 보이는 누군가는 킹콩에게 뭘 자꾸 던지며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바나나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에휴, 썅. 어련하겠어.”
박율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린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돌아갈 나름 온순한 동물이지만, 심기를 건드는 순간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괴물이 될 터였다.
게다가 지금 저 킹콩을 말릴 인물은 박율 밖에 없었다.
괜히 허튼짓하기 전에 얼른 저것을 말려야 했다.
혹시라도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을 때, 킹콩을 모르는 사자나 다른 이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말 그대로 대참사가 벌어질 터.
아주 소극적으로 생각해도, 지역구 정도는 다 부숴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도착했을 때, 킹콩은 이미 등산객을 잡고 있었다.
바닥엔 킹콩의 손가락 만한 바나나가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나름 저 괴물을 진정시키려고 분투한 것 같긴 하지만, 저 괴물이 좋아하는 게 저런 과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되려 그의 행동이 저것의 심기를 건드렸던 듯했다.
“사...사...살려...”
“어우...”
박율은 꺼내놓은 망치를 불꽃 속에 넣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저 킹콩은 잡은 등산객을 마치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본 듯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먹이로 착각한 걸까?
남자를 입에 넣으려고 한다.
“휘이~!”
박율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남자를 먹으려던 킹콩이 고개를 돌렸다.
“안녕...?”
박율이 인사를 건네자 킹콩은 불쾌한 듯 표정을 짓더니 남은 한 손으로 한참 씹어먹던 너덜너덜한 나무뿌리를 던졌다.
박율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아슬하게 나무뿌리를 피했다.
콰쾅!!!
“이씨...!”
킹콩은 다시 남자를 먹으려는 듯 입안 깊이 집어넣었다.
“휘이~!”
박율은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킹콩은 코를 씰룩이며 박율을 보았다.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인마. 너 이거 먹고 싶지?”
박율은 왼손의 코어를 기다란 사탕수수모양으로 바꿨다.
그리고 코어를 킹콩에게 내밀었다.
“이거 줄테니까 그 사람 좀 내려놓고...”
“살려주세요!!! 살려...!!!”
“좀 닥치고 있어봐요. 도움 안 되게. 친구야? 내 말 들리지?”
박율은 한 손에 든 사탕수수 모양 코어를 내민 채 다른 손을 높이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킹콩에게 다가갔다.
킹콩은 여전히 박율을 보며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어른이 이렇게 상냥하게 말하는데, 인마 표정 좀 풀고. 그 사람 내려놔. 그거 장난감 아니야.”
박율은 나름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잡혀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킹콩은 남자와 박율을 번갈아 보았다.
“맞아, 그거야. 그거. 그거 내려놔.”
킹콩은 그의 말에 손에 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흔들었다.
“아악아아악!!!”
“아니, 아니 흔들지 말고. 그렇지. 그렇지.”
세차게 남자를 흔들던 킹콩은 박율을 지긋이 보며 남자를 든 손을 내렸다.
“그래, 그대로 내려놔. 그대로...”
킹콩은 마치 박율의 행동을 따라하듯 몸을 움직였다.
박율이 사탕수수모양 코어를 내려놓자, 킹콩 역시 손에 쥔 남자를 내려놓았다.
“그렇지, 잘한다.”
박율은 아주 조심스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마치 내려놓은 사탕수수를 먹으라는 듯.
킹콩은 남자를 내려놓고는 사탕수수 쪽으로 걸어갔다.
그것의 손이 사탕수수에 닿자 박율은 재빨리 코어를 당겼다.
“우오오오!!!”
“야야, 흥분하지마!”
박율은 당장에라도 날뛸 듯 소리를 지르는 킹콩에게 다시 코어를 내밀었다.
“조용히 따라오면 이거 줄게.”
그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잔뜩 인상을 짓던 킹콩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박율을 따라 걸었다.
등산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킹콩이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자 부리나케 도망쳤다.
“후... 그렇지. 천천히 따라와.”
박율은 아주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혹시라도 킹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끔.
킹콩을 쫓아 얼마나 산을 돌아다닌 건지, 꼭대기가 바로 옆에 있었다.
중간중간 킹콩이 날렵하게 사탕수수를 훔쳐가려고 움직이기도 했지만, 박율은 재빨리 사탕수수를 가져왔다.
가끔 참다 못한 킹콩이 폭발하려는 듯 포효를 지르기도 했지만, 박율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씩 꺼내 킹콩의 입에 넣어주었다.
“힘들 때 먹으려고 가져온 거였는데...”
킹콩은 넙죽넙죽 사탕들을 받아먹으며 박율을 따라갔다.
저 커다란 덩치랑 얼굴에 안 어울리게 달콤한 건 뭐 저렇게 좋아하는지.
“아주 귀여워 뒤지겠네. 개 같은거.”
그리고 겨우 킹콩이 나타났던 심연의 골짜기 앞에 도착했을 때, 박율은 진저리를 치며 킹콩을 보았다.
“이거 먹고 싶지?”
박율은 사탕수수 형태의 코어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심연의 골짜기를 향해 던진다.
“가서 먹어!!!”
킹콩은 흠칫 박율을 보더니 이내 날아가는 사탕수수 형태의 코어를 향해 도약했다.
킹콩의 몸뚱이가 심연 그 너머로 넘어갔을 때, 박율은 한 손으로 코어를 불러들이고 남은 한 손으로 심연을 흡수했다.
집 한 채 정도 들어갈 법한 심연의 골짜기가 점점 작아졌다.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증기는 작은 구슬을 만들어냈다.
“후...무사히...”
라고 입을 여는 순간 쾅 하며 굉음이 들려왔다.
박율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서 있는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박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하늘 높이 사람 하나 들어갈 법하게 작아진 심연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오우, 그러지 마.”
박율은 흡수에 박차를 가했다.
더욱 더 권능에 힘을 불어넣어 더욱 강하게 흡수했다.
쾅!!!
심연이 흔들린다.
쾅!!!
굉음이 바늘구멍 같은 심연을 통해 빠져나온다.
쾅!!!
“조금만 더...”
흡수에 힘을 더 넣자 심연은 겨우 작은 주먹 하나 들어갈 법한 정도로 작아졌다.
“우오오오!!!”
킹콩의 포효가 울린다.
그 순간 심연이 닫혔다.
함께 산을 뒤흔들던 포효 역시 멎었다.
심연은 하나의 구슬이 되어 박율의 손에 떨어졌다.
“어떻게 바람 잘 날이 없냐.”
사자가 된 이후로 단 하루도 조용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도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갔다.
혹시라도 킹콩이 흥분이라도 했었다가는...
콰앙!!!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박율의 손에 있던 심연의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씨...”
박율은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들었다.
닫힌 줄 알았던 심연이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마주치기 싫은 마수가 얼굴을 드러냈다.
“발...”
“우오오오!!!”
킹콩은 포효를 내질렀다.
박율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가만히 듣다가는 달팽이관이 피를 쏟아낼 것이었다.
킹콩은 심연에서 솟구치듯 뛰어나와 땅에 착지했다.
쾅!!!
쾅!!!
킹콩은 지금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어필이라도 하듯 땅을 내리찍었다.
고작 주먹으로 땅을 몇 차례 내려찍는 것만으로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박율은 땅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에 중심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킹콩이 도약한다.
쿵!!!
킹콩의 발바닥 자국이 선명히 새겨진 채 킹콩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박율을 향해 떨어진다.
박율은 재빨리 킹콩의 몸뚱이를 피했다.
콰아아앙!!!
마치 핵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야 내 말 좀 들어봐.”
한낱 미물이 어떻게 사람의 말을 듣겠거니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차피 싸워서 절대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하... 그냥 냅둘 걸.”
지금 와서 후회한들 뭐 어쩌겠는가.
박율은 날아드는 킹콩의 몸뚱이를 피해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코어를 사탕수수 형태로 만들기도 했지만, 더 이상 얄팍한 수는 먹히지 않았다.
“거기 하늘 위에 미천한 사장님. 귀한 부하는 먼저 가는 꼴 보고 싶습니까.”
역시나 대답은 없다.
쾅!!!
킹콩이 옆에 있던 나무를 하나 뽑아 박율에게 던졌다.
박율은 가까스로 나무를 피하지만, 그 뒤 바로 날아드는 킹콩의 몸뚱이까지 피할 힘이 없었다.
[각화]
박율은 코어를 방패 모양으로 만들고, 온몸을 각화로 강화시킨다.
쾅!!!
킹콩의 육중한 몸이 박율의 몸을 짓눌렀다.
코어와 각화의 힘으로 겨우 버텼다지만, 다음 공격까지 버틸 힘은 없었다.
“저 뒤지면 당신 탓입니다. 나 성불 안 하고 당신 저주만 할 거에요. 나 지금 궁서쳅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그리고 뿌연 흙먼지 속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하루종일 찾아다녔던 잠든 성유물이 땅 속에 숨어있었다.
일명 ‘나침반’, 대상이 누구든 일방적인 통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성유물.
둥글게 생긴 모양과 안에 들어있는 침이 나침반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
박율은 재빨리 나침반을 들었다.
그리고 산에 오기 전에 찾아 두었던 보석 하나를 꺼내 잠든 성유물을 깨운다.
흙먼지에 더럽혀졌던 나침반이 하얗게 타오르며 겉에 묻은 진흙이 떨어져 나간다.
이내 나침반은 황금색 테투리가 돋보이는 둥근 나침반 모양으로 되살아났다.
박율은 나침반에 재빨리 흔들었다.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지?
박석훈? 아냐 너무 멀잖아.
한지원? 에라이 씨, 시체 처리를 부탁할 것도 아니고.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 사람.
박율은 충분히 흔든 나침반을 입에 가져갔다.
“저기 팬클럽 사라지게 생겼는데, 좀 도와주실래요?”
동시에 킹콩의 주먹이 박율을 향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