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박율은 안산시 외곽의 어느 산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다음 목표는 단탈리온의 세 가지 시험.
이곳엔 그 시험을 위해 준비 해야 할 유물이 하나 잠들어 있다.
어떤 유물인지, 그 능력은 뭔지, 어디에 있는지도 전부 알고 있는 유물이지만 유일한 문제는 위치를 알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능선을 따라 정면에 커다란 돌멩이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에서 열 네 번째 나무 아래.”
박율은 주머니에 메모를 해두었던 종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에라이, 씨. 중세시대 보물지도가 이것보단 설명이 잘 돼 있겠다.”
박율은 한숨을 내뱉었다.
산의 입구에서 저 아득하기만 한 능선까지 올라갈 생각에 저절로 진저리가 났다.
그렇다고 목숨을 담보로 그 영감탱이한테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실 다른 유물이나 사람들을 먼저 찾아도 되겠지만, 어차피 찾을 거라면 어려운 것부터 찾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단탈리온의 시험을 공략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물건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일전에 만났던 그 섬광의 여인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득한 저 꼭대기를 보면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뭐 찾다가 뒤지기야 하겠어?”
박율은 비장한 얼굴을 하고 산으로 발을 들였다.
* * *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목소리를, 자신을 플라우로스라고 소개한 그 존재를 믿어야 할까?
해도 되는 일 일까?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봉기는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문을 넘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수년째 봐오던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기우를 돌보아주는 백봉기에게 있어 누구보다 감사한 이들이었다.
백봉기는 고개를 꾸벅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병실을 찾았다.
302호.
“하...”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이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문을 여는 순간 도저히 마주하기 싫은 그 모든 것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백봉기는 손잡이에 손을 얹지만, 열 순 없었다.
그는 문 앞에서 그저 시선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우를 더 빨리 병원에 데려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조금만 더 빨리 아이의 병을 알았다면.
괜찮았을까?
왜...
내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의 뒤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닥을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터벅터벅,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
스쳐 가는 그 모든 소리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애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어?’
‘기우가 죽게 된다면 그건 모두 당신 탓이야.’
“하...”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린다.
치욕스럽고 분노가 끓어오른다.
‘당신들이 뭘 알아? 뭘 아는데? 당신들이 내가 어땠는 지 알아? 나는... 나는...’
“백기우 보호자분 맞으시죠...?”
백봉기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기우를 보살펴주던 간호사였다.
“괜찮으세요...? 땀이...”
“아... 네, 네... 괜찮...아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힘내세요.”
백봉기의 시선이 간호사의 눈을 향했다.
그녀 역시 백기우의 상태를 아는 듯 착잡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위선.
그녀는 위선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위선을 표하고 있다.
‘당신이 뭘 안다고 내게 말을 꺼내는 거야? 당신이 뭘 안다고 내게 힘을 내라고 하는 거냐니까? 당신이...’
“저희도 최선을 다 했지만... 죄송합니다.”
숨이 거칠어졌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이 감정을 죽일 수가 없다.
욕구, 욕망.
위선을 뱉는 저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열망.
백봉기의 손이 저도 모르게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럼 살렸어야죠...”
백봉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느라 두 눈을 감았지만, 벌어진 입에선 제멋대로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녀의 위선을 볼 수가 없기에 눈을 감았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살렸어야죠...”
백봉기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자신을 보는 저 여자의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축 처진 눈가가, 슬픈 척 내려간 입꼬리가, 자신을 위로하는 저 눈빛, 모두 전부.
저 표정 이면의 웃음이 느껴진다.
그녀가 내뱉는 모든 말이 가식인 것만 같았다.
“괜찮으세요...?”
진짜 최선을 다했냐고 묻고 싶었다.
당신은 정말 기우를 살리기 위해 모든 최선을 다했냐고.
저 아이의 작은 숨결을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노력했냐고.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지를 묻고 싶었다.
“괜찮으...”
간호사가 물었다.
그제야 백봉기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깨달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아...아... 죄...죄송...”
한참을 자리에 굳어 백봉기의 눈치를 살피던 간호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더니 먹쩍은 웃음을 보였다.
“아...아니에요.”
그리고 간호사는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백봉기는 머리를 쥐어 잡았다.
손을 내려다본다.
간호사를 죽이려 했던 그 손을.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제 정신이 아닌걸까?
분명 그는 여자를 죽이려 했다.
살기라는 것을 드러낸 채 말이다.
미쳤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
머리가 너무 복잡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백봉기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잡념을 떨쳐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그는 찰싹 두 볼을 때렸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었다.
홀로 침대에 누워있는 저 야윈 아이.
백봉기의 숨이 떨려왔다.
그저 아이를 보는 것 만으로 다리 힘이 풀려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이끌고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기우...야.”
백봉기는 떨리는 손으로 기우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바람결에 차가워진걸까.
아이의 몸이 몹시나 차가웠다.
혹시나 잘못된 게 아닐까 아이의 손을 만지고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기도 했다.
그리곤 괜찮다는 것을 알고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기우야...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그는 잡은 아이의 손에 이마를 가져갔다.
백봉기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아빠!]
환청인가?
기우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백봉기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아이의 얼굴로 눈을 옮겼다.
분명히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는 저 아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이는 움직일 수조차 없다.
“환청...인가...”
문득 백봉기는 아이의 목소리는 떠올렸다.
“허...”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우의 목소리가 어땠었지?
얇았었나? 두꺼웠었나? 그것도 아니면...
어땠었지?
왜 기억이...
울분이 차올랐다.
아빠라는 작자가 아이의 목소리마저 기억할 수 없다니.
백봉기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손을 아이의 볼에 가져간다.
“아빠가...꼭...살려줄게...”
* * *
“능선을 따라 정면에 커다란 돌멩이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에서 열 네 번째 나무 아래까지 왔잖아아아아!!!”
박율은 들고 있던 삽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벌써 시간만 4시간째 삽질을 하고 있다.
아무리 파고 파도 보이는 거라곤 뱀이나 지렁이 뿐이었다.
[척후]
산은 또 어찌나 넓은 지 눈에 온 힘을 집중하고 척후를 쓰고 둘러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박율은 한숨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산에 여드름이라도 난 듯 사방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냥 포기할까? ...에휴. 해야지 뭐...”
어차피 이곳에서 성유물을 찾지 못하면 단탈리온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박율은 다시 삽을 들었다.
그리고 땅을 파려고 삽을 높이 들어올리는 순간.
오른손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박율은 삽을 땅바닥에 꽂아두고는 손을 펼쳤다.
“뭐야?”
불타오르는 하얀 불꽃은 움직이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얼레?”
손을 암만 움직여봐도 불꽃은 그대로였다.
삽에 몸을 맡긴 채 불꽃의 방향을 쫓지만, 역시나 움직이지 않았다.
흔들고, 뒤집어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게다가 산속이라 그런지 유리 깨지는 소리나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구석조차 없었다.
“뭔데...?”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심연이 나타나는 방향을 따라 불꽃이 타오르는 거라면.
“근데 움직이질 않는다...? 그럼...”
말을 내뱉는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들어섰다.
박율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아.”
쾅!!!
상공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그를 덮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박율을 짓밟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아파...”
박율은 땅바닥에 몸자국 그대로 박혀 있었다.
“너무 아파...”
박율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들었다.
이미 악마는 그를 반쯤 땅바닥에 처박은 채 어디론가 사라진 듯했다.
“복수할 거야... 얼굴에 점찍고...”
박율은 이를 빠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우수수 흙먼지가 떨어진다.
박율은 삽을 놓고 망치를 소환했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잘 됐어. 금이빨 빼고 다 씹어 먹어줄게.”
[척후]
드넓은 숲이 펼쳐지고, 숲속의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사이 보이는 저 압도적으로 커다란 덩치.
“찾았...다? 근디 저거 뭐여?”
그것을 본 박율은 눈을 의심했다.
나무를 타고 움직이는 고릴라 마수가 보였다.
“에이 설마... 에이 아닐 거야... 설마...”
박율은 잘못 본 게 틀림없다며 눈을 비볐다.
하지만 두 눈 씻고 다시 봐도 그것은 확실한 고릴라 마수였다.
그것도 너무나도 익숙한 실루엣의 마수였다.
커다란 덩치하며,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저 뒷모습.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마수, 일명 킹콩이자 개차반 미친 싸움꾼 마수라고 불리던 괴물이 나타났다.
무엇이든 맘에 들지 않으면 일단 개박살부터 내고 보는 미친 마수.
“저게 왜 여기서 나와?”
힘은 더럽게 세고, 피부는 얼마나 딱딱한지 저 마수의 피부를 뚫은 사자는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함은 다른 마수들과는 달리 괜히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달려들진 않는다.
“쟤가 이때쯤 나타났었나?”
어차피 이제 마수들도 하나 둘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타이밍이기도 했다.
저 고릴라에 대해서 들은 기억은 없다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순 없는 놈이었다.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알아서 돌아가거나 하겠지만.
“하... 킹콩이 나타났으면 킹콩 잡을 여자 주인공도 나타나야지.”
박율은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킹콩을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