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박율은 실뭉치를 뚫고 지나가려 하지만, 실뭉치는 벨수록 더욱 두껍게 겹겹이 쌓였다.
결국 그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고양이의 실인형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휘두른다.
박율은 탐색으로 실뭉치의 주먹을 궤도를 예상하며 가까스로 피했다.
“싸우자며.”
고양이의 손이 더욱 빨라진다.
함께 실인형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실인형의 주먹이 내려 찍힌 곳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 커다란 구멍을 만들며 굉음을 냈다.
“하아...!!!”
이제는 예상이 아닌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해야 하는 수준까지 달했다.
“그럼...이놈을 좀 치우던가...!”
“싫어.”
“비겁하게 친구를 데려오면...!”
“비겁...?”
실인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실이 박율을 향해 직격했다.
박율은 재빨리 코어로 방패를 만들어 실을 막는다.
콰과각!!!
바늘처럼 쏘아대는 실들과 방패가 맞부딪혔다.
동시에 위에서 내려 찍히는 실인형의 다른 주먹.
박율은 망치를 입에 물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신속]
콰앙!!!
인형의 주먹이 바닥을 박살 냈다.
뿌연 흙먼지가 바닥을 가득 메웠다.
“뭐야...?”
흙먼지 속에서 인위적인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양이는 그제야 무언가를 알아챈 듯 실인형을 조종해 흙먼지 속에 손을 휘젓지만, 역시나 박율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어?”
“어디 갔긴.”
박율은 그새 고양이의 뒤, 그녀가 보지 못하는 사각에서 코어를 활 모양으로 만들어 시위를 당겼다.
시위에 걸린 망치와 손잡이에 붙어있는 폭탄 구슬 하나.
박율은 시위를 놓는다.
펑!!!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던 망치에 붙어있던 폭탄이 터진다.
폭탄의 영향으로 가속을 받은 망치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고양이의 뒤통수를 향해 쇄도한다.
그리고 그 순간, 고양이의 그림자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솟아났다.
콰과곽!!!
그림자는 손에 쥔 일본도로 망치를 베어가르듯 망치를 흘렸다.
날아간 망치는 내리꽂히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림자...?”
검은 그림자는 이내 사람의 형상을 하더니 익숙한 덩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사내.
그는 일본도를 다시 칼집에 넣었다.
고양이는 그제야 남자의 존재를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감시를 맡겼더니.”
“네가 왜 여깄어?”
까마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박율을 향했다.
“...용케도 살아남았군.”
박율 역시 까마귀를 보고 있었다.
“돌아가지.”
“야, 뭐하냐? 아직 안 끝났어.”
고양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미 늦었다.”
“닥쳐. 갈거면 혼자 꺼져. 난 안 갈 거니까.”
고양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단호했다.
까마귀는 고양이를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5분 내로 끝내라. 그 이상은 기다려 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는 다시 꺼내려던 일본도를 집어넣었다.
“까마귀...”
박율은 다시 망치를 소환했다.
[탐색]
권능을 개방하고 주변을 살핀다.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건 근처에 악사회의 나머지들도 있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 이미 벌써 포위당한 걸지도.
박율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저 멀리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 장화연을 제외하곤 그의 눈엔 까마귀 말고는 악사회의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까마귀 혼자 나타난 걸까?
불필요한 살생은 물론, 그 누구의 희생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불가능은 아니었다.
아마 타겟을 처리하러 보낸 고양이와 장화연의 복귀가 늦는데다가 고양이의 실 인형까지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까마귀 혼자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사방엔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까마귀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박율을 죽일 수 있다.
아니, 죽이진 않겠지.
“대신 팔다리를 하나씩 자를 놈이지. 아주 무서운 놈.”
그렇다면.
박율은 발을 뗐다.
왼손의 코어를 단검의 형태로 바꾸며 까마귀를 향해 달린다.
[신속]
박율의 신형이 사라지고 이내 까마귀의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선빵필승...!”
박율의 단검이 까마귀를 향해 쇄도했다.
캉!!!
까마귀는 순식간에 일본도 잡고는 전부 꺼내지도 않은 채 길게 뻗은 그의 공격을 막았다.
묵직한 쇳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코어와 일본도가 맞부딪히며 불씨가 생겨날 정도였다.
박율은 왼손의 검으로 일본도의 움직임을 막은 채 오른손의 망치를 휘두른다.
망치가 까마귀의 관자놀이를 날리려는 순간 까마귀의 몸은 검게 변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라진 그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의 예리한 실이 박율을 향해 직격했다.
푸푹!
박율은 반사적으로 검과 망치를 휘둘러 실을 피하고 베어내지만, 수십 개의 실 모두를 피할 수는 없었다.
“큭...!”
박율의 어깨와 다리를 꿰뚫은 실에 검붉은 핏물이 맺혔다.
그는 실을 끊어내려 어깨를 움직이지만, 곧바로 날아드는 실에 움직임이 막혔다.
“큭...”
고양이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박율에게 걸어왔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여줄까?”
“...아니? 죽고 싶진 않은데.”
“너 좀 얄미운 거 알지?”
“조금은.”
고양이는 손가락에서 길게 뻗어 나온 실을 박율의 목 앞에 가져가지만, 더 이상 움직이진 않았다.
“...아이 씨 맘에 안 들어. 이러면 쟤가 나 도와준 거 같잖아.”
고양이는 당장에라도 박율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되려 그녀는 박율을 속박하던 실들을 풀어주었다.
“야, 다시 절루 가.”
박율은 벙찐 얼굴로 고양이를 보았다.
“뭘 봐? 다시 저기로 가. 처음부터 다시 해.”
“...”
“빨리 가.”
박율은 흠칫 고양이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천천히 달려온 자리로 돌아갔다.
“너 절대 끼어들지마. 경고했어.”
고양이는 박율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이를 겨냥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빨리 아까 했던 거 다시 해. 그 활 그거 있잖아. 그거 쏴. 어차피 나 그거 못 피해. 맞아줄 테니까. 다시 하자고.”
고양이는 자존심이라도 상한 듯 떽떽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나야 땡큐지.”
박율은 망설이지 않고 활을 들었다.
그리고 망치와 폭탄을 시위에 걸고, 힘을 집중했다.
조금 전에는 급조해서 만든 탓에 안정적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 방에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만든다.
게다가 아까처럼 고양이가 실인형을 만든 상태가 아니기에 이 한방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야? 그거 아까보다 더 커진...”
시위를 놓는다.
동시에 폭탄이 터지며 망치에 가속이 붙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으아아아아아!!!”
순간 고양이의 너머에서 익숙한 여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고양이를 넘어 박율을 향해 달려든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장화연이었다.
“이 개새끼가 감히...!!!”
그녀는 잔뜩 성난 얼굴로 박율을 향해 몸뚱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 길은 망치가 나아가는 길과 같은 방향이었다.
“...어머?”
날아든 망치는 그대로 나아간다.
콱!!!
망치는 장화연의 이마를 또 다시 깨부술 듯 직격하고는 그녀를 넘어 고양이를 향해 날아갔다.
박율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장화연은 공중에 떠올라 대충 세 번 정도 구르더니 또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망치는 멈추지 않고 고양이를 향해 날아갔다.
쾅!!!
콰과광!!!
망치에 맞은 고양이의 몸뚱이가 저 멀리 바닥을 새기며 떨어졌다.
“죽...었나...?”
박율은 활을 놓은 자세 그대로 고양이를 주시했다.
망치에 맞아 쓰러진 고양이는 아직 미동조차 없었다.
“이제 된 거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고양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화연에 맞아 망치의 속도와 위력이 약해진 탓일까, 고양이는 다시 일어났다.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고양이의 호흡은 한껏 상기된 상태였다.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당장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가면 너머 고양이의 살기는 당장에라도 박율을 죽일 것만 같았다.
“잠깐만 반칙...”
박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양이가 사라졌다.
“어우, 좆됐네.”
흠칫 느껴지는 살기.
박율은 본능적으로 코어를 방패 형상으로 바꿔 하늘 높이 들었다.
그의 위에서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은 실뭉치로 감싸진 채였다.
고양이는 힘껏 주먹을 내리찍는다.
쾅!!!
박율은 공격을 막은 채 재빨리 반격하려 망치를 소환하지만, 고양이는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고양이를 쫓아 시선을 옮기지만 어디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흠칫 박율은 인기척을 쫓아 뒤쪽으로 망치를 휘두르지만, 역시나 없다.
하지만 분명 고양이의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여...”
그리고 그 순간 바닥의 흙이 으스러졌다.
박율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넘겼다.
그가 서 있던 자리로 격자로 쌓인 실들이 흙을 베어 가르고 올라갔다.
푹!
격자로 된 실들을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실조각이 박율의 등을 꿰뚫었다.
“큭...!”
고통을 호소할 새도 없이 고양이의 공격이 이어졌다.
측면에서 나타난 고양이의 실뭉치가 박율의 머리를 후려치고, 뒤이어 날아오는 실가닥이 박율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그는 실이 머리를 꿰뚫기 직전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이래서 고양이를 한 번에 죽이려고 했었는데...!”
흥분한 고양이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새침하고 날카로운 고양이가 개가 된다면 필시 저렇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터.
“끝이야?”
고양이의 목소리엔 오금이 저릴 정도의 살기가 아른거렸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안 기다려 줄 거지?”
“당연하지.”
“그럴 줄 알았어.”
박율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폭탄을 꺼내려고 하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한 새 주머니가 찢어져 있었다.
그제야 바닥에 구슬들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전략인데.”
고양이가 잠시 공격을 멈춘 틈에 박율은 다시 움직였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고양이를 향해 달린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들이 날아온다.
[탐색]
얼마나 얇은 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수준이었다.
찰나의 순간, 실이 그에게 닿기 직전에 겨우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박율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치명상을 피하기만 했다.
시큰한 고통이 뒤따르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양이 역시 조금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주 무모하고도 확실한 방법.
뼈를 주고 살을 취한다.
그리고 고양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박율은 코어를 작은 갈고리의 형태로 바꿔 던진다.
고양이는 박율의 갈고리가 닿이기 직전 온몸을 실처럼 바꿔 사라진다.
하지만 갈고리는 여자의 실에 걸렸다.
실들이 허공에 흩날려 사라지며 갈고리 역시 실을 따라 날아갔다.
박율은 다시 갈고리를 쫓아 도약했다.
실들이 고양이의 형태를 되찾는 순간, 박율은 힘껏 망치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