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남산타워는 재건을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길거리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도로엔 언제나처럼 차들이 즐비했다.
닷새 전의 일이 거짓이었다는 듯,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일상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순간들이었다.
대신 온갖 매체들은 사자들의 존재와 악마를 상대하던 박율이 죽는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희생도 없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지켜진 평화라는 제목의 뉴스가 포털 사이트 대문에 걸려있는 수준이었다.
매스컴은 악마를 죽인 사자들의 공로를 치하했고, 적극적으로 악마들을 소탕하지 못한 군과 경을 비난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그리고 박율의 죽음으로 세상은 악마를 대비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닷새 전 한국의 침공 이후, 일본에서, 그리고 중국, 미국에서도 악마들이 나타났다.
전 세계가 악마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다.
동시에 아무런 피해 없이 악마들을 제압한 사실이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어 각국 정상들의 러브콜이 한국에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박율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혹시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모자를 푹 눌러썼다,
“율 씨, 저희 어디로 가는 거에요...?”
조용히 박율을 쫓던 박석훈이 물었다.
박율은 그제야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물주 만나야죠.”
“물주요? 물주라함은... 태...태산그룹이요...!? 그런 사람이 이런 곳에 있다고요...?”
“아뇨. 그런 높은 사람을 만나려면 절차를 밟아야 하거든요.”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경기도 외곽의 한 달동네였다.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동네였다.
박석훈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주위를 살폈다.
“여기서 누굴 만나요...?”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아니, 조금 그렇잖아요.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요? 사람도 안 보이고...”
“그거 편견이에요. 여기 사는 사람들도 다 똑같아요. 사람이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살면 쓰나.”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알았어요. 미안해요.”
“됐고, 여기에요.”
박율이 멈춰 선 곳은 달동네의 허름한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판자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게 나사 하나 남은 경첩이 달린 문은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고, 천장은 고작 나무 판대기 몇 개와 신문지로 겨우 막아둔 상태였다.
사람이 사는 곳이 맞을까 싶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석훈 씨, 뒤쪽에서 창문 막고 있어줘요. 제가 앞에서 들어갈게요.”
“네...?”
“우리가 찾는 사람은 가만히 우리를 반겨줄 위인은 아니거든요.”
“위험한 건...아니죠?”
“폭탄 맞고도 살았으면서 뭘 그런 걸 걱정해요. 이런데선 기껏해야 칼빵이 끝이에요.”
“무슨 말을... 네, 일단 알겠어요.”
박석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혹시나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러 돌아갔다.
박율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덜렁거리는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똑똑.
하지만 반응은 없다.
박율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문 가까이 귀를 가져갔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요.”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는다.
“거기 있는 거 압니다.”
똑똑.
수차례 문을 두드리고, 한참의 기다림 끝에 덜렁거리는 문이 아주 살짝 입을 벌렸다.
“...누구세요?”
“혹시 최지호 씨 맞나요?”
“...아니요.”
“안녕하세요. 최지호 씨. 다름이 아니라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필요 없어요.”
턱.
문 너머 사람이 단호하게 문을 닫으려 하자 박율은 재빨리 문 틈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에요?”
“일단 이야기 먼저 들어보시고.”
“필요 없다고요!”
“큰 빚이 있으시죠?”
문 너머 공기가 싸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에이 씨...!!!”
문 너머 최지호가 문 손잡이를 세게 당기자, 박율은 반사적으로 문에서 손을 뗐다.
쾅!
굳게 닫힌 문이 흔들렸다.
닫힌 문 너머에서 달음박질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문 손잡이를 돌리지만, 역시나 문은 잠겨있었다.
하지만 박율이 완력으로 문을 당기자 잠금이 무색하게 그나마 버티고 있던 경첩이 떨어지며 문이 열렸다.
“그냥 이야기나 좀 하자니까.”
떨어진 문을 넘어 안쪽으로 드러서자 쾌쾌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마치 쓰레기장에라도 들어온 듯 절로 인상을 찌푸려졌다.
박율은 코를 막고 최지호를 뒤쫓았다.
좁은 방안에 쓰레기가 어찌나 많은지 내디딜 곳을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최지호는 벌써 방을 빠져나가 좁은 주방의 창문을 타고 나간 뒤였다.
“나한테 왜 이래!!!”
창문 너머로 박석훈과 실랑이를 하는 최지호가 보였다.
박율은 힘겹게 땅을 딛고 창문으로 움직였다.
“그 사람 잡아요!”
“에이 씨...!”
박율은 작은 창문에 머리를 내민 채 말했다.
하지만 말하기 무섭게 최지호는 박석훈의 낭심을 걷어찼다.
“억...!”
최지호는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는 박석훈을 떨쳐내고 달동네 속으로 사라졌다.
그새 겨우 창문을 타고 넘어온 박율은 마른 세수를 했다.
“아 씨, 또 귀찮아 지겠네... 전직 경찰 맞아요? 사람 하나 못 잡어. 왜.”
“윽... 유...율 씨...”
“일어나요. 뭐 그 정도 가지고 아프다고 그래요.”
“진짜 아파요...!”
“아이 참, 귀찮게.”
박율은 박석훈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권능을 개방했다.
[탐색]
동시에 달동네의 구불구불한 길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미로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뭔 놈의 달동네가 이렇게 복잡해...?”
길 끝에 보이는 최지호의 신형.
최지호는 역시나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었다.
“자 일어나요.”
박율은 손을 멈추고 최지호에게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았다.
“석훈 씨는 저쪽으로 가요.”
“네?”
“저쪽으로 쭉 가서 오른쪽, 그리고 직진, 코너 두 번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은 다음에 그 다음 블록에서 왼쪽으로. 알겠죠?”
박율은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달려갔다.
“유...율 씨!”
하지만 이미 박율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박율은 탐색을 유지한 채 최지호를 쫓았다.
시야를 트이게 해주는 탐색이 거슬릴 정도로 길이 복잡했다.
벽을 넘으면 또 다른 벽이 나오고, 조금만 길을 잘못 틀면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게다가 길은 또 얼마나 가파른지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찰 정도였다.
속도만 빨랐다면 충분히 최지호를 붙잡겠지만, 최지호는 나무나 빠른 속도로 달동네를 누비고 있었다.
어떻게든 최지호를 쫓으려 해도 길이 익숙치 않은 그에게, 이런 달동네에 빠삭한 최지호를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더럽게 빠르네.”
이대로면 놓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번에 최지호를 놓친다면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하다못해 설득은 못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율 씨!!!”
와중에 저 멀리에서 박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그를 찾자 저 너머 길을 잃은 그가 보였다.
박율이 말해준 방향과는 반대편에 가까울 정도로 멀리 돌아간 상태였다.
“아니 저 사람은 또 왜 저기로 갔어?”
박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왜 거깄어요!!!”
“이쪽으로 가라면서요!!!”
“내가 언제!!!”
“아까!!!”
“에이 씨. 어떡하냐...”
어차피 속도나 지형적인 측면에선 최지호를 쫓을 수 없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흠칫 고개를 돌려 최지호를 쫓자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최지호가 보였다.
최지호는 어느새 달동네의 거의 꼭대기 쪽에서 박율과 박석훈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최지호의 뒤로는 달동네를 빠져나가는 길이었고, 정면엔 박율, 측면에 박석훈이 있었다.
박율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발을 뗐다.
“석훈 씨!!!”
“네!!!”
“거기서 오른쪽으로 틀어요!!! 그리고 정면으로 쭉 달려요!!!”
“오케이!!!”
박석훈이 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최지호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비웃었다.
그럴만도 한 게 박율이 지시한 방향은 최지호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 위치에서 박석훈이 최지호를 잡으려면 대략 그의 키 네 배는 될 법한 높이의 벽을 뛰어내려야 가능할 정도였다.
박율은 벽을 넘어 판자집의 천장으로 올라갔다.
박석훈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들쑥날쑥한 판자집들을 뛰어넘으며 박율은 최지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지호는 두 사람을 흠칫 보더니 이내 반대쪽으로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최지호는 박석훈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오케이.”
박율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판자 집들을 뛰어넘었다.
쿵!
쿵!
쿵쿵 뛰어넘는 판자 집에서 때아닌 소란에 버럭 소리를 치는 사람들도 나왔지만, 박율은 개의치 않고 뛰었다.
“거기!”
한참을 뛰어간 끝에 저 멀리 최지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최지호는 인상을 팍 짓더니 반대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박율은 다시 최지호를 쫓았다.
이 속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최지호는 박율에게서 멀리, 박석훈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이정도면...”
다시 최지호를 향해 발을 내딛던 순간.
쾅!
판자집의 천장이 부서졌다.
박율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부서진 천장에 몸을 떨어뜨렸다.
쿠당탕!
“윽...!”
박율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지만, 이미 최지호는 저 멀리 도망친 상태였다.
게다가 박석훈은 벌써 예상했던 위치에 도착한 상태였다.
박율은 이를 빠득 갈며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변 가장 높은 건물 위로 올라간다.
“석훈 씨!!!”
박율의 외침에 박석훈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뛰어요!!!”
그는 박율의 말에 흠칫 벽 아래를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너무나 높았다.
하지만 그에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아래에 최지호가 달려오고 있었다.
박석훈은 박율을 잠시 보더니 이내 그의 말을 따라 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박율은 자세를 잡는다.
[신속]
종아리에서부터 올라오는 폭발적인 힘을 터트림과 동시에 박율의 신형이 사라진다.
고개를 뒤로 박율을 보고 있던 최지호는 흠칫 놀라며 눈을 의심했다.
분명 그의 시야 끝에 박율이 있었지만,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쿵!!!
정면에서 박석훈의 몸뚱이가 떨어졌다.
족히 8미터는 넘어 보이는 높이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저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등 뒤에서 먼지가 일었다.
고개를 돌려 먼지의 원인을 찾았을 때, 그곳엔 구부러진 난간을 잡은 채 나타난 박율이 있었다.
“이씨...!!!
“굿나잇.”
박율의 망치가 도망치려 하는 최지호의 머리를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