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캉!
박율의 망치가 남자의 뒷통수에 내려 찍히려는 순간 차영훈의 도검이 그를 막아섰다.
“사람이에요!”
동시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역시.
박율이 찾는 마지막 인물, 까마귀 한상호가, 인간들이 오늘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지는 두 번째 이유가 눈 앞에 있었다.
그리고 함께 그를 죽일 최적의 기회를 눈앞에서 날렸다.
“...아 죄송해요. 잘못 봤어요.”
박율은 어색하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한상호는 박율의 말에도 답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박석훈이 물었다.
한상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엔 일본도가 들려있었다.
그야말로 임전 상태,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한상호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더니 한순간에 땅속으로 아니,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네 사람의 뒤로 달려드는 악마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차악.
한상호가 일본도를 휘둘렀다.
가느다란 검신이 달려드는 악마들의 몸을 두 동강 냈다.
악마들의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우...우와...”
차영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검술에 문외한이라 할만한 네 사람이 봐도 그의 검술과 움직임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달리 설명하자면 한상호의 움직임은 하나의 춤이었다.
바닥의 그림자 속을 유영하며 마치 피겨를 하듯 부드러운 춤사위와 날카로운 검날이 악마들의 목을 베어낸다.
그를 보는 박율은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침음했다.
언뜻봐도 수십 마리는 넘어보이는 악마들이 일순간에 전멸했다.
한상호는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여전히도 한상호의 어깨에선 살기가 넘쳐흘렀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박율은 당장에라도 싸울 듯 자세를 잡았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달려들어야 하는 걸까?
지금 저 한상호는 등을 보이고 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심장을 꿰뚫는다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한상호가 고개를 돌린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박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공포를 먹고 집채만한 악마가 되어 그를 노려본다.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심장이 뛴다.
숨이 거칠어지고,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지금 말고 기회가 있을까?
그를 죽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또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박율은 망치를 든 손에 힘을 넣었다.
할 수 있다.
박율은 침음하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발을 떼려는 순간.
“...율 씨? 율 씨. 율 씨!”
흠칫 박율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엔 박석훈이 서 있었다.
“왜 그래요?”
“에...예?”
“어디 불편해요?”
박석훈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박율을 보고 있었다.
박율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한상호를 본다.
박율을 잡아먹을 듯 커져 있던 그림자가 사라져 있었다.
터질 듯 펌프질하던 심장이 차츰 진정을 되찾았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한상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너무나 나긋해서 듣기만 해도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반쯤 무장을 해체한 상태로 한상호를 보던 차영훈과 김진목은 한상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 역시 어깨의 힘을 풀고 무기를 놓았다.
“고마워요. 석훈 씨.”
“네?”
하마터면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그를 죽일 타이밍은 있을 터였다.
혹시나 순간의 흥분에 집착해 그에게 달려들었다면 상정 외 불상사가 일어났겠지.
박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상호를 본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한상호는 기다란 검을 검집에 넣었다.
“하마터면 사고 날 뻔했어요.”
박석훈이 박율을 툭치며 말했다.
“아, 네...”
박율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뭐 그럴수도 있는 거죠.”
“네, 이해해주니 감사하네요...”
“다들 저거 잡으려고 오신 거죠?”
한상호가 하늘의 토머를 가리켰다,
“그렇죠.”
“그럼 같이 움직이죠.”
“그럴까요?”
박율이 답했다.
김진목과 차영훈이 박율의 말을 거들었다.
“근데 혼자 오신거에요?”
“아뇨. 같이 오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중간에 헤어졌어요.”
“...그럼 어떻게?”
그의 말에 박율은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모이기로 한 장소가 있거든요.”
“...어디요?”
“남산타워 아래에서 모이기로 했어요.”
박율은 애써 표정을 숨겼다.
그곳이었다.
수십 명의 사자가 희생된 그 장소.
“...그럼 갑시다. 바로 앞이니까.”
박율이 앞서 움직였다.
“그거 되게 잘 쓰시던데, 배우신 거에요?”
“검도 배웠거든요.”
“그냥 배운 솜씨가 아니던데요?”
박율은 힐끔 차영훈과 한상호의 대화를 엿들었다.
진정하고 싶었지만, 떨리는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박율은 최대한 한상호에게 표정을 숨긴 채 움직였다.
“근데...”
한상호가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은 박율의 뒤를 향했다.
“어디 불편하신 곳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아뇨, 괜찮아요. 그냥 조금 지쳐서 그런거에요.”
“아 정말요?”
“네네.”
그저 대화 하나에도 심장이 떨렸다.
어찌보면 지금 저 마인은 하늘에 보이는 토머보다 위험한 존재였다.
그는 오늘 이곳에 있을 사자의 절반 이상을 죽일 악마니까.
“어, 저기!”
박석훈이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자 태양을 등진 남산타워 아래에서 악마를 상대하며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전의 역사에서 이곳에 없었던 박율은 너무나 궁금했다.
어떻게 고작 마인 한 명이 한순간에 사자들을 죽인걸까. 얼마나 강하기에 수십명의 사자들을 한 번에 죽인다는 것이 가능한 걸까하고.
그 이유를 박율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
이미 이곳에 모든 판이 짜여 있었다.
수십 명에 육박하는 사자들이 모여있고, 저 마인은 그들을 이곳에 불러 모았다.
함께 박율이 왜 차영훈과 김진목, 그리고 차세진이라는 인물들을 몰랐었는지 역시 알 수 있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사자들을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박율이었지만, 이곳에 보이는 사자들은 죄다 처음 본 얼굴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여기서 죽게 된다.
박율은 흠칫 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요?”
박석훈이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러시네?”
“아니에요. 저기.”
박율이 고개를 돌려 한상호를 보았다.
한상호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얘기 좀 가능할까요?”
“...그럴까요?”
한상호는 아닌 척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박율은 한상호를 이끌고 외진 곳으로 걸어갔다.
할 수 있다.
박율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을 등지고 고개를 돌렸다.
박율은 수풀과 맨바닥 사이 그림자의 경계에 서 있었다.
한상호는 박율의 그림자를 밟은 채였다.
“알고 있다. 왜 불렀는지.”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쯤은 예상했다.
이미 그를 보고 마인으로 착각하는 악마들이 많았다.
그 역시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왜 부른 거지?”
“다른 이유는 아니고...”
확인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 계획이야?”
한상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박율은 그에 맞춰 인상을 구겼다.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다.”
“역시.”
박율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는 어떻게 그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조심.”
한상호가 말했다.
동시에 뒤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 악마의 머리를 터트렸다.
박율은 슬쩍 뒤를 보더니 이내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굳이 왜 그런 짓을 했냐는 눈빛을 보냈다.
“기분이 나빠서 말이지.”
역시.
그는 그림자를 이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그는 박율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박율은 자세를 바꾸는 척 그에게서 그림자를 옮겼다.
그리고 한상호의 반응을 살핀다.
신용할 수 없는 누군가와 있을 땐 사람은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방어 혹은 당장에라도 공격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한상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내 한쪽 발을 박율의 그림자에 걸쳤다.
한 번 더 자세를 바꿔봐도 한상호는 여전히 그림자를 따라 발을 옮겼다.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해서 데려온 거야. 확인할 것도 있고.”
“그럴 줄 알았다. 여기서 비슷한 놈을 만날 거라곤 나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한상호 역시 알고 있었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저 마인은 그리 의심이 많은 인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역시나 사람들은 남산타워의 그림자 가까이에 있었다.
아직 그림자가 그들을 덮치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박율을 본 박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하시고 오셨어요?”
“그런 게 있어요.”
“뭐 다 비밀이래.”
“나중에 다 알려줄게요.”
박율은 미소를 지었다.
“뭐,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박석훈은 그럴 수 있다며 박율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율은 조용히 하라며 눈빛을 보냈지만, 박석훈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쉴 시간 없을걸요?”
한상호가 말했다.
사방에서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흩뿌린 하얀 불꽃이 많은 악마들을 죽인 상황이었지만, 계속해서 심연의 골짜기를 통해 끊임없이 악마들은 걸어 나오는 탓에 여전히 많기는 했다.
그래도 여전히 걸어 나오는 악마들 중 절반이 하얀 불꽃에 죽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불꽃 누가 해놓은 건지 참.”
몰려드는 악마를 상대하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아! 그거...”
“조심!”
박율은 망치를 던지며 김진목의 말을 끊었다.
망치는 아슬하게 김진목의 코 앞을 스쳐 지나갔다.
“뭐하는...!?”
“악마가 오길래.”
“아무것도 없잖아요.”
“쉿.”
박율은 익살스런 얼굴을 했다.
김진목은 어이가 없는 듯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달려드는 악마를 상대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 멀리 그림자 속에서 악마 형태의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 악마가 노리는 것은 역시나 겹쳐진 그림자 위에 있는 다른 사자였다.
사자는 소리소문 없이 다가오는 그림자 악마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한상호를 본다.
예상대로 그는 그림자 위에서 악마들을 상대하는 척 죽일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구나.”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남자가 여기로 모두를 부른 이유는 단 한 가지.
남산타워의 그림자가 모두를 덮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