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좋은 콤비 플레이였어요. 박석훈 씨.”
박율은 박수를 치며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관람하듯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다시 움직입시다. 박석훈 씨.”
하얗게 불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박석훈이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하얀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사뭇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 같았다.
그의 옷엔 그을린 듯 검게 탄 자국이 곳곳에 보였다.
박석훈이 이를 빠득 갈며 박율을 노려본다.
흠칫 박율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음...제가 옷 좀 드릴까요? 보기 좀 흉한데?”
박율은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내더니 구슬을 깨뜨린다.
그러자 구슬에서 츄리닝 한 벌이 나타났다.
“지금 뭐하는...”
“아, 이거요? 제 권능 중에 압축? 비스무리한 게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게 가능한 거에요. 아까 그 폭탄도 같은 이치고.”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한테 폭탄을...!!!”
박율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미안하다며 익살스러운 제스쳐를 취했다.
박석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전략이에요. 전략. 거봐. 폭탄 하나로 악마들 전부 죽었잖아요. 석훈 씨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주 쓰던 전략이었어요.”
물론 고작 폭탄 하나로 가능할 일은 아니었다.
추출한 폭탄들을 하나로 추출하고, 또 추출하는 과정을 반복하니, 원래의 폭탄보다 수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의 달하는 위력을 가진 폭탄이 만들어졌다.
한방에 죽이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그 고민마저 터트려버릴 정도로 폭탄의 위력은 강했다.
“석훈 씨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같이 쓰던 전략이었어요.”
물론 할때마다 죽일 듯 욕을 하긴 했었지.
“조금 따가웠죠?”
“아니, 조금이 아니라...!”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봐요. 다 죽었잖아요. 미리 말해두면 이렇게 못 할 거 같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진짜 미안하긴 해요?”
“당연하죠.”
수십 마리에 달하던 악마들이 전부 움직임이 멎었거나, 하얀 불꽃에 휩쌓여 죽어가던 중이었다.
박율은 그것들에게서 악마의 정수를 추출했다.
그리고 흡수한다.
왼손의 검은 불꽃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일 끝나면 제가 뽀뽀라도 해드릴게요. 자, 이제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아니, 저기...!!!”
박율은 그의 말을 무시나 하듯 그를 지나쳐 올라갔다.
박석훈은 당장에라도 그를 죽일 듯 노려보지만, 이내 한숨을 내뱉고 그의 뒤를 쫓았다.
혹시나 화에 못 이겨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박석훈은 화를 꾹 참으며 순순히 그를 따라왔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할 거면 말이라도 하고 해요. 이번엔 진짜 아팠다고요!”
“알았어요. 알았어. 다음부턴 말하고 터트릴게요.”
“뭐, 터트...?”
“어 저기 보인다.”
박석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지만, 박율은 그의 말을 자르며 남산타워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김진목과 차영훈이 있었다.
타워 안쪽으로는 올라가지 못한 듯 사방을 뛰어다니며 황자총통으로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김진목은 하늘을 부유하는 악마들을 격추시키고, 땅바닥에 불꽃을 뿌렸고, 차영훈의 그의 뒤에서 그의 능력을 보조해주고 있었다.
“좋아, 좋아.”
박율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석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박율의 왼손을 향했다.
“저기요. 율씨.”
“예?”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그쪽이랑 별반 다르진 않아요. 악마들 때려잡는?”
“그게 아니라, 오른손에 하얀 불꽃은 이해가 되는데, 왼손에 그건 뭐에요...?
“아, 이거요?”
박율은 왼손의 불꽃을 본다.
오른손의 불꽃과는 다르게 선명한 검은 색이 눈에 띄었다.
“마치 저 악마들같은...”
박석훈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악마들을 향했다.
박율은 어깨를 들썩였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다고나 할까.”
“예?”
“뭐 알게 되겠죠. 저도 잘 몰라요.”
박석훈은 개운치 못한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저기 보여요?”
박율이 말했다.
박석훈은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다.
하늘 높이 벌어져 있는 심연의 골짜기에서 괴상한 눈이 나타나고 있었다.
크기는 집채 만하고,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였다.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저게 오늘의 하이라이트에요.”
“미친...”
“안드라스의 제 3 군단장, 토머에요.”
박석훈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떡 벌려 하늘의 눈을 응시했다.
“저걸 어떻게...”
“저걸 어떻게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다 왔어요.”
어느새 두 사람은 남산타워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주변 악마들은 모두 햐얀 불꽃에 녹아 죽은 채였다.
“사방에 회복약이 있네.”
박율은 추후에 가져갈 악마의 정수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다 어떻게 아시는 거에요?”
“다 겪었으니까요.”
박율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준비해요. 이제 진짜 시작이니까.”
하늘 위 심연의 골짜기는 더욱 깊어지며 진해지고 있었다.
악마의 커다란 두 개의 눈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머리가 나오기 시작할 때즈음 사방에서 악마들의 괴성이 울려왔다.
귀를 울리는 소리에 박석훈이 고개를 돌렸다.
“저 커다란 게 나타나는 데 악마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박율은 망치과 검을 꺼냈다.
그리곤 달려간다.
하늘의 악마들을 격추시키던 김진목을 보조해주던 차영훈의 뒤로 하얀 불꽃에 휩쌓인 악마 하나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 악마가 차영훈의 목을 노리려는 순간 박율은 도약했다.
그리고 콰직!
망치에 내려 찍힌 악마의 머리가 찌그러진다.
“뒤쪽도 조심하셔야지.”
박율이 차영훈을 보았다.
“어...”
차영훈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하... 졸라 멋있어...”
박율은 스스로 감탄을 자아내더니 이내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두 사람을 본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어요. 이제 나타나는 악마들은 그렇게는 못 죽일 거에요. 불놀이는 끝.”
“예?”
박율은 주머니에서 구슬 2개를 꺼냈다.
구슬에 힘을 주자 콰작하며 깨지더니 녹슨 총 한 자루와 도검이 나타났다.
놀란 눈으로 총과 도검을 보던 두 사람은 이게 무슨 의미냐는 듯 박율을 보았다.
“자, 두 분 뭐 쓰실래요?”
박율이 김진목과 차영훈을 보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눈치를 보았다.
“안 쓸 거에요? 저 놈들을 맨몸으로 상대하실려고?”
“이게...뭔데요?”
차영훈이 물었다.
“뭐긴요. 무기지.”
“이거 너무 녹슨 거 아니에요...? 총알은요...?”
이번엔 김진목이 물었다.
“우리같은 사자들이 쓰면 그 정도 보정은 알아서 돼요. 대신 많이 쏘면 피곤해질 거에요. 그래도 차영훈 씨 권능까지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소모전이거든요.”
“소모전이요?”
“이제 우리는 여기 이 정상을 사수하면서 버텨야 해요.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건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거거든요.”
“에?”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김진목이 재차 물었다.
“악마들이 여기에 나타난 이유는 따로 있어요.”
박율이 남산타워의 꼭대기를 본다.
그리고 가리켰다.
“저기.”
저 곳에 앞으로 대략 1시간 후 보석이 나타난다.
악마들이 노리는 건 보석이었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저 꼭대기에 조만간 보석이 나타날 것이다.
이미 생성되어 숨어있는 보석들도 많지만, 그만큼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보석들도 많았다.
특히나 오늘 박율과 악마들이 노리게 될 그 보석은, 지금까지의, 아니 앞으로 있을 어느 보석보다 큰 축에 속했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앞서 승기를 잡을 첫 번째 핵심이었다.
여기서 그 보석을 빼앗긴다면 악마들의 침공은 역사대로 흘러가겠지만, 방어하는데 성공한다면 인간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이 자리만 사수해주세요.”
그것만 제대로 해준다면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완성된다.
“이제 슬슬 몰려들 거에요.”
“뭐가요?”
“뭐긴요. 저런 놈들이지.”
박율은 김진목의 뒤로 달려드는 커다란 악마견에게 망치를 내던지며 말했다.
그의 말에 흠칫 고개를 돌리자 사방에서 마수들이 모습을 보였다.
박율은 망치가 날아간 방향을 쫓아 발을 옮겼다.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악마견은 재빨리 중심을 되찾더니 다시 김진목을 노렸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나타난 박율의 칼이 악마의 어깻죽지를 베었다.
그리고 망치를 회수해 악마의 머리를 깨뜨렸다.
콰직!
“이놈들은 죽기 전까지 달려드니까 한방에 죽여야 안 피곤해요.”
박율은 곧바로 옆에서 달려드는 악마견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이렇게.”
세 사람은 그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서로 등을 맞대며 달려드는 마수들을 보았다.
광견병에 걸린 듯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지옥견부터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뛰어다니는 고릴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까지.
아마존을 방불케하는 상황이었다.
선뜻 움직이지 못하던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움직인 쪽은 차영훈이었다.
“조심...!”
한창 악마견들을 상대하던 박율의 뒤로 달려드는 박쥐를 향해 도검을 내찔렀다.
박쥐의 몸통을 꿰뚫은 도검 끝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이스.”
박율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차영훈은 곧이어 박율에 가세해 지옥견들을 향해 도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시작으로 나머지 두 사람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석훈은 달려드는 커다란 덩치의 고릴라를 상대했고, 김진목은 황자총통과 소총을 가지고 박쥐들을 격추시켰다.
“으아아아!!!”
고릴라와 양 손을 마주잡고 힘을 겨루던 박석훈은 가볍게 고릴라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날아간 방향으로 뛰어가 일어나기도 전의 고릴라의 팔을 잡고 암바를 걸었다.
고릴라는 괴성을 내지르며 발버둥을 치지만, 박석훈은 꿈쩍도 않고 고릴라를 제압했다.
쾅!!!
내려찍히는 박율의 망치와 함께 고릴라의 괴성이 멎었다.
그 후로도 사냥은 계속 되었다.
마계에 있는 마수들이 전부 이곳에 모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수들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나름 상성이 잘 맞는 덕인지 사냥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사방에 마수들의 시체들이 가득할 때즈음 박율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마기에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마기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느꼈던 마기들 중 가장 진하고 역한 마기들이었다.
그리고 함께 네 사람이 서 있는 땅이 갈라지고, 나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벌어지는 심연의 골짜기.
“다들 긴장해야 겠는데요.”
총 여섯 개의 심연의 골짜기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