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워메, 이씨.”
전쟁기념관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바깥의 상황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하늘 저 멀리, 커다란 심연의 골짜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안드라스의 제 3군단장, 그것이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저기요.”
“예?”
“지금 몇시에요?”
“어... 11시...요?”
“생각보다 빠른데...”
원래의 역사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른 시간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또 아니었다.
그럴만도 한 게 벌써 악마들은 두 개의 유물을 놓쳤고, 심지어는 지금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려야 할 졸개들까지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불꽃에 알아서 죽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늘을 부유하는 악마들 마저 모두 남산 타워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확실히 선수를 치겠다는 소리였다.
“예상은 했지만...”
“네?”
박율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갑시다.”
박율이 뛴다.
박석훈 역시 그를 따라 뛰었다.
역시나 사방에서 보이는 악마들과 사람들.
신의 사자들 역시 많이 보였지만, 악마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인듯했다.
저 멀리 정면에서 악마 하나가 사람을 영혼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박율은 망치를 소환한다.
그리고 달린다.
콰직!
박율은 정면에서 민간인을 유린하던 악마 하나의 머리를 깨부쉈다.
악마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은 그대로 힘이 풀린 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조금 늦을 수도 있겠는데.”
서둘러야 한다.
박율은 거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저기 시야 끝에 오토바이가 보였다.
박율은 서둘러 오토바이 쪽으로 달렸다.
“저기요.”
“에...예?”
오토바이에 걸쳐 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보던 오토바이 주인은 혼이 쏙 빠진 얼굴로 박율을 보았다.
“죄송한데, 오토바이 좀 빌릴게요.”
“뭐...뭐요?”
박율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망치로 남자의 머리를 쿵 내려쳤다.
남자는 그대로 목을 뒤로 젖히더니 오토바이에 몸을 맡겼다.
“율 씨!”
뒤에서 놀란 얼굴을 한 채 박율을 보던 박석훈이 인상을 찡그렸다.
“지...지금 뭐하는 거에요?”
“뭐하는 거냐뇨? 빨리 가야죠.”
“아니, 그렇다고 이게 무슨...”
“이 상황에 언제 구구절절 일일이 다 설명하고 빌려요?”
“예?”
“다 쓰고 돌려주면 되는 거죠. 렌트 같은 거에요. 렌트.”
박석훈은 여전히 인상을 지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뭐해요? 안 타요?”
“...”
“그럼 저 하늘에 저 악마가 서울 부수는 거 멍하니 보고 있을라고?”
“아이 씨, 미치겠네... 알았어요. 타요.”
박석훈은 머리를 쥐어잡더니 이내 박율의 뒤에 몸을 맡겼다.
“자...잠깐만... 율 씨, 운전...!”
“꽉 잡아요.”
오토바이는 엔진 배기음을 내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도착했어요.”
박율이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저기요.”
“에...예!?”
순간 기절이라도 한 듯 박석훈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당장에라도 토할 기세로 헛구역질을 하던 박석훈은 입을 떡 벌린 채 자리에 굳었다.
이미 두 사람은 남산 타워에 도착한 상태였다.
“와...”
그제서야 보이는 남산 타워의 모습.
대낮의 남산타워였지만, 그곳은 한밤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두웠다.
아마 저 하늘을 뒤덮은 심연의 골짜기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땅바닥에도 그 심연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서 있는 그곳에도 곳곳에 이미 심연이 벌어져 있었다.
박율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망치과 검을 소환했다.
“정신 차리고, 싸울 준비해요.”
원래의 역사 같았으면 이곳은 이미 악마들에게 점령당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이라함은 김진목의 활약 덕분인지 졸개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석훈 역시 속을 가라앉히고는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마지막이에요. 진짜 다음부터는 운전... 절대로 하지 마세요.”
“일단은 끝난 다음 다시 얘기하죠, 그건.”
심연의 골짜기에서 악마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악마들을 상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습을 막 드러낸 악마들 먼저 죽이는 것이었다.
인간계에 적응하지 못한 악마들은 졸개들과 다름 없다.
일단 눈으로 보이는 심연은 모두 아홉.
그 중 이미 모습을 드러낸 악마들은 셋이었다.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박율은 먼저 움직였다.
심연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악마 하나에게 망치를 집어 던진다.
콰직!
날아간 망치가 악마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리고 달린다.
박율은 칼을 빼들어 측면의 악마의 머리를 베어내고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 망치로 후면의 악마를 내려찍었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뭐 저렇게 잘 싸워?”
그를 지켜보던 박석훈은 그를 보며 자극이라도 받은 듯 근육을 풀더니 이내 달려갔다.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악마와 박석훈의 눈이 마주했다.
“이야아아아!!!”
박석훈은 악마에게 몸을 던졌다.
콰당!
두 몸뚱이가 땅바닥을 구른다.
“으아아!!!”
용케 악마의 위로 올라가 목을 틀어잡은 박석훈이 팔에 힘껏 힘을 준다.
악마는 박석훈을 떼어내려 발버둥 치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악마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저항했다.
[이 사자 새끼가...!!!]
퍽!
퍽!
악마의 팔꿈치가 박석훈의 복부를 찍는 소리가 박율의 귀에 들릴 정도였지만, 박석훈은 아무렇지 않게 악마를 제압하고 있었다.
콰직!
그새 악마 하나를 더 해치운 박율이 망치로 악마의 머리를 내려찍는다.
“그쪽 아직 성유물 없죠?”
“성유물이요?”
“이런거요.”
“아! 아직 망치는 없어요.”
“아니, 망치 말고.”
“아직은...”
“그럼 일단 몸으로 때워요. 맨손으로 죽이긴 힘들거에요.”
“...!!! 조심!”
한창 말을 하던 박율의 뒤로 박석훈이 뛰었다.
그를 향해 날아들던 작은 칼날이 박석훈에 막혔다.
“커헉...!”
“맞아요. 그렇게. 몸으로 때우면 돼요.”
박율은 신음을 내뱉는 박석훈을 뒤로 칼날을 날아든 방향을 향해 도약했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인간계에 적응을 끝낸 악마 하나가 박율을 보았다.
박율이 검을 휘두른다.
챙!
박율의 검은 악마의 검에 막혀 쇳소리를 냈다.
그의 검을 본 악마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넌 뭐지?]
“뭐긴 뭐야. 벌레 청소하는 세스코다.”
박율은 악마가 방심하는 틈에 곧바로 망치를 위로 쳐 올렸다.
콱!
망치가 악마의 턱을 깨부순다.
악마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박율은 악마의 몸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망치를 내려찍는다.
“후...”
아직 악마가 나타나지 않은 심연의 골짜기가 셋이나 남아있었지만, 박율은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이제 갑시다.”
“윽...”
박석훈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는 중이었다.
“엄살 피지 마요.”
“진짜 아파요!”
“뭐 그 정도 가지고...”
“왜 나한테만 이렇게 박해요?”
“그쪽한테 그건 여드름 짠 수준이랑 별 차이 없잖아요. 지금도 봐요. 일반인이 그거 맞았으면 배 뚫렸는데, 그쪽은 생채기 하나 안 났잖아요.”
“그건...”
박석훈은 배를 매만지며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잠시 박율 눈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우리 목표는 저기 남산타워 꼭대깁니다. 김진목 씨랑, 차영훈 씨도, 저쪽 근처로 갔을 거에요. 불 뿌리기 제일 좋은 곳이 거기니까.”
“저기 아직 남아있는 건...?”
박석훈이 남아있는 심연의 골짜기를 가리켰다.
“아마 벌써 나왔을 거에요. 아직까지 안 나오는 거 보니까. 그리고 괜히 피라미들 잡으면서 체력낭비 할 필요 없어요. 체스나 장기 해봤죠? 대가리 잡으면 끝나요. 우리는 지금 그 대가리 잡으러 가야하고. 이제 갑시다.”
박율이 먼저 발을 떼자 박석훈이 뒤를 뒤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악마들이 남산타워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탓인지 길을 막는 악마들이 너무나 많았다.
사방에 벌어진 심연의 주인공들인가 싶었다.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뚫고 지나가야지.”
“저 물량을요?”
어림잡아 쉰, 아니 그보다 더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가 그쪽 왜 데려온 지 알아요? 이거 받아요.”
“뭐요?”
박율은 주머니에 있던 구슬 몇 개를 그에게 건넸다.
“대충 이럴 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게 무슨...?”
“어떻게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잘 됐어요. 석훈 씨 만나서 고민이 해결됐거든요.”
“네?”
박율은 그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더니 이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배를 크게 불리며 호흡을 들이마셨다.
“야이!!! 개새끼들아!!!”
박율은 복부의 공기를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악마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 사람이 할 말 있데”
“지...지금 뭐하는...!?”
“파이팅!”
그러고는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악마들의 시선이 박석훈에게 몰려들었다.
“저...저기요!!!”
하지만 박율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저 개새끼...!”
박석훈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저...그...안녕...하세요?”
악마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그를 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도 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마치 수십, 수백의 군세가 몰려들 듯 악마들은 발을 굴렀다.
“씨발...”
박석훈은 사라진 박율을 원망하며 싸울 자세를 잡았다.
일전에 상대했던 그 놈에 비해서야 새발의 피도 안되는 것들 같았다.
“야이...!!!”
박석훈은 달려는 악마들을 향해 도약했다.
퍽!
박석훈의 주먹이 정면에 있던 악마 하나의 광대를 후려친다.
하지만 동시에 얼핏봐도 열댓 개는 넘어 보이는 주먹이 그를 가격했다.
“악...!!!”
박석훈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그가 무방비인 상태를 노려 악마 하나가 손을 날카롭게 그를 복부를 내려찍지만, 돌덩이 같은 그의 몸엔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았다.
악마들은 그를 죽이려 내려찍고, 손으로 찌르지만 그는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멀쩡했다.
“...?”
박석훈은 그들의 공격이 소용 없다는 걸 알고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끝...”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악마들은 주먹으로 그를 넘어뜨렸다.
그 이후는 말 그대로 매타작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경쾌하게 울리는 때리고 밟히는 소리뿐이었다.
“아악!!! 그...그만!!!”
박석훈은 소리쳤다.
하지만 악마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서 영혼을 빼앗으려던 악마들도 있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대략 오십이 넘는 악마들이 박석훈을 내려 밟고 있었다.
“그만.”
한참 박석훈을 때리던 악마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박석훈 역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박율이 턱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잘가.”
박석훈은 이상한 울림에 고개를 내린다.
박율이 건넸던 작은 구슬들이 공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펑!!!
귀를 때리는 굉음이 박석훈에게서 터진다.
굉음과 함께 폭발하는 하얀 불꽃이 그를 때리던 악마들을 잡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