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혹시나 싶어 주변을 살피지만 악마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몸을 묶어놨던 노끈도 푼 상태였다.
그래도 뭐 멀리가진 못할 테지.
날개를 찢어놔서 폭주를 할 수도 없을 테고, 어차피 알아서 나가 떨어질 악마였다.
문제라 함은 그대로 죽으면 그 본체도 죽는다는 거지만.
“몰라, 씨.”
박율은 나지막이 내뱉었다.
뭐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 정도로 다쳤으면 악마는 살기 위해서라도 알아서 그 몸에서 나올 터였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다음을 준비할 시간이다.
[권능 : 성흔/추출, 흡수, 탐색, 신속, 각화]
새로이 생긴 권능은 각화(角化), 대충 써보니 몸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었다.
한번에 사용가능한 권능은 최대 2개.
악마가 가진 능력 외의 능력은 흡수 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얀 불꽃이 나타내는 활자의 명암이 곧 권능의 레벨.
대충 탐색과 흡수는 최대치에 가까웠고, 나머지는 여전히 부족했다.
성흔이라는 권능을 십분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박율은 일단 권능을 뒤로 다음 준비물을 찾기 위해 박물관 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되돌아온 박율의 손엔 점토 인형이 있었다.
그는 점토 인형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박석훈 씨.”
“예...?”
박석훈은 대자로 누워 그간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이제 알겠죠. 저 이상한 놈 아니라는 거?”
“아,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도와주실래요?”
“뭐...뭘요?”
“아직 끝이 아니거든요. 더 큰 몹이 남아있어요. 나머지 분들도 좀 도와주세요.”
저기 쓰러져 있는 차세진 빼고.
저 사람도 데려갈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
그런데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라도 오라고 하는 게 낫겠지.
끝나서 나서도 그의 능력이면 재건에 큰 힘이 될 터였다.
“세진 씨 일어나봐요.”
박율은 차세진을 흔들어 깨웠다.
차세진은 온몸이 저린 듯 고통을 호소하며 눈을 떴다.
“무...무슨...?”
“다 끝났어요.”
“아!”
그제서야 그는 악마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났다니까.”
“아...”
“저흰 이제 남산 타워 쪽으로 갈건데, 회복 좀 되거든 그쪽으로 와주세요. 알겠죠? 그쪽 능력이 되게 요긴하거든요”
“예?”
“아마 오셔도 끝나있을 것 같긴 한데, 그쪽 능력은 다양한 면에서 도움이 될 거라서 말이에요. 힘 좀 회복되게 쉬고 있어요. 이번엔 힘을 좀 많이 써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에요.”
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여하튼 갈게요. 우리는.”
박율이 움직였다.
“차영훈 씨, 김진목 씨, 갑시다.”
“네?”
김진목이 답했다.
“가자구요.”
“어딜요?”
이번엔 차영훈이었다.
“우리 얘기하는 거 못 들었어요? 남산 타워 쪽이요.”
“거긴 왜...?”
“거기에 오늘 하이라이트가 있거든요. 여기 온 건 그 무기 구하려고 온 거에요. 악마들이 가져가면 골치 아파져서.”
박율이 황자총통을 가리켰다.
김진목은 손에 쥐고 있던 황자총통을 보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마치 돌려주겠다는 듯 황자총통을 내밀었지만, 박율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거 이제 김진목 씨 꺼예요. 아껴 써요. 원래 그쪽 드리려던 건 아닌데, 나름 괜찮을 거 같더라구요.”
“아... 감사합니다.”
“됐고. 갑시다, 이제. 사지 멀쩡한 세분이면 충분해요.”
“근데 이 사람은...?”
차영훈이 상처투성이 남자를 가리켰다.
“밖에 사람들 부를 겁니다. 죽지는 않을 거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거든요.”
박율이 먼저 밖으로 향했다.
차세진을 제외한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그를 쫓았다.
* * *
건물 밖의 상황은 거의 끝물인 듯했다.
박물관을 총공하던 악마들이 어떤 이유에선가 물러난 것이다.
아마 먼저 빠져나간 악마가 무기를 빼앗겼다는 걸 알려서 그렇겠지.
그럼에도 경과 군은 자리를 지켰다.
기왕이면 하루종일 자리를 지켜줬으면 했다.
고개를 돌리자 사방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죽은 듯 하얀 불꽃 속에서 움직임이 멎은 악마들이 보였다.
역시나 이들 사이에도 신의 사자는 있다.
“그 사람 성유물은 총이겠지?”
성유물로 결정되는 무기는 각기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각자 잘 어울리는 무기를 가지는 것 같다.
박율은 손에 쥔 망치를 보았다.
“난 왜...?”
박율은 고개를 저었다.
“에휴...”
뭐 어쩌겠어. 벌써 정해졌는데.
박율은 한숨을 팍 내쉬더니 뒤의 세 사람에게 눈치를 줬다.
그리곤 손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었다.
“여기 안에 환자 있어요...!”
박율은 사태를 수습하는 군인들에게 소리치더니 재빨리 도망쳤다.
그를 뒤쫓던 세 사람 역시 그를 따라 뛰었다.
“왜 뛰어요!?”
“이 상황에서 거기 그대로 있어 봐요. 우리 총 맞을걸요?”
박율은 태연하게 말했다.
사선을 매일 넘나들던 그였다.
이 정도 상황은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었다.
박물관을 빠져나와 박율은 백봉기가 있던 차로 돌아왔다.
“형...!”
백봉기는 공벌레 마냥 온몸을 웅크린 채였다.
“형!”
“어억!”
백봉기는 화들짝 놀라며 자라마냥 목을 뺐다.
“왜 그래요?”
“유...율아.”
“무슨 일 있었어요? 왜 그러고 있어요?”
“하... 하늘에 저런 것들이 날아다니는 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
“아...그런가?”
박율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악마를 하나 보았다.
그의 옆에서 김진목이 황자총통으로 악마를 격추시켰다.
“이분들은 누구...?”
“아, 뭐 쉽게 말해서 파티에요.”
“파티?”
“안녕하세요.”
박석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의 뒤에서 다른 두 사람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 예...”
백봉기도 그를 따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형, 차 좀 빌려줘요.”
“엉?”
“여기부터는 진짜 위험해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너...너는?”
“전 안 죽어요. 마왕 앞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마지막 그놈만 아니었어도...그 개새...”
“뭐?”
“아니에요. 여튼 형. 저기 박물관 쪽으로 가면 군인들 있거든요? 거기서 기다려요. 빨리 돌아올게요. 얼른.”
박율은 반강제로 백봉기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반항할 법도 한데 백봉기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세 사람이 차례로 차에 올라타고, 운전석엔 박율이 앉았다.
“다...다치지 말어. 율아.”
“당연하죠.”
“성함이 율 씨?”
“네 박석훈 씨.”
“근데 면허는 있으...세요?”
“아뇨?”
“예?”
박석훈은 화들짝 놀라며 토끼눈을 했다.
“안 죽어요. 이래 봬도 운전 많이 해봤어요.”
“그...그런...!”
박석훈은 창문 위 어시스트 핸들에 온몸을 맡기듯 꽉 쥐었다.
“갑니다.”
박율은 힘껏 엑셀을 밟았다.
* * *
고작 5분 거리의 위치한 전쟁기념관이었지만, 박율의 차를 탄 세 사람은 죽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내려요.”
“우웩!”
뒷좌석에 탄 김진목이 토사물을 뱉어냈다.
“어우 드러.”
“아니 뭐 운전을 그딴 식으로...우웩!”
뒤따라 차영훈이 토했다.
“아니 뭐 그 정도로 구토를 해요. 평범한 거지.”
“그쪽 앞으로 절대 운전대 잡지 마요. 나 화낼 거 같아요.”
박석훈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엄살들은. 자 다들 움직입시다. 시간이 없어요.”
“잠시...우웩!”
김진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내 입을 닦고 일어났다.
“하...”
“김진목 씨는 이제 그 무기 가지고 남산타워 쪽으로 가서 사방에 불을 좀 질러주세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부...불이요?”
“어차피 그 무기로 쏘는 불은 악마들만 태워요. 막 질러도 돼요.”
황자총통을 악마들이 그렇게 탐냈던 이유?
비단 그것의 위력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히 위력만 본다면 차라리 활을 성유물로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일 수준이었다.
하지만 황자총통의 파급력은 그 어떤 무기도 따라잡지 못한다.
방화.
말 그대로 불을 지르는 일에 특화된 무기였다.
쉽게 말해 화염방사기라고 할까.
이전의 과거에선 성유물을 타락시킨 악마들이 저 무기를 가지고 곳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당시 박율은 저 무기가 인간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저 유물을 이용해 사방을 불바다로 만든다면 귀찮은 졸개들은 알아서 죽을 터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박율이 쓰다가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차영훈 씨는 김진목 씨를 보조해주고.”
그리고 박율은 박석훈을 보았다.
“저...전요?”
“따라와요.”
박율이 그를 이끌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전쟁기념관.
역시나 이곳에 보이는 악마들이나 다른 이들이 없다.
그럴만도 한 게 지금 화력은 중앙박물관과 남산 타워쪽에 집중되어 있을 터였다. 아니, 이젠 남산 타워 쪽이겠지.
박율이 찾는 성유물은 원래 있던 역사에서도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버려진 성유물이었다.
이 성유물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전무 했으니까.
하지만 박율은 알고 있다.
이 유물의 정체를.
박율은 서둘러 움직였다.
문을 넘어 그 안 쪽으로.
역시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율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그 무기.
“찾았다...!”
작품 설명에는 발해 활이라고 적혀있다.
보기 흉할 정도로 다 녹슬어 있는 활.
그가 찾던 무기였다.
박율은 유리를 깨기 위해 망치를 들었다.
“저...저기!”
박율이 망치를 내려찍으려던 순간 박석훈이 그를 불렀다.
“예?”
“이래도 돼요?”
“뭘요?”
“이거 범죄...아니에요?”
“아 이거요? 음... 굳이 따지자면 범죄죠?”
“근데...”
“뭐 어쩌겠어요. 지금 아니면 이거 가져갈 기회가 없어요. 나중에는 적어도 5년이나 지나야 받을 수 있을텐데. 5년 일찍 받는 거라고 생각하죠. 뭐.”
“에?”
“그냥 뭐 그렇다고요. 복면이라도 드릴까요?”
“아뇨 그건 아닌데...”
박율은 그가 대답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시관의 유리를 깼다.
챙!
부서진 유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박석훈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박율은 개의치 않고 활을 들었다.
“후...”
이 활은 앞으로 있을 전쟁들을 위한 초석이었다.
일명 코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무기.
“근데 이러면 저희 걸리지 않아요?”
“그런 거 걱정하는 거에요? 의왼데?”
“그...그건 아닌데.”
“괜찮아요. 여기 불 나간 거 보이잖아요. 악마들이 그렇게 생각이 없진 않거든요. 마인들이 많아서 이런 건 걸리면 안되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그런 방법이 있어요.”
“근데 그거 너무 낡지 않았어요...?”
“맞아요. 이걸로 지금 쥐새끼도 못 잡을걸요?”
“네...? 그게 무슨...?”
“뭐 나중에 보면 알아요. 그땐 너무 늦게 알아서 문제였지.”
우리, 인간들이 이 유물의 진가를 알게 된 때는 바알의 군대와 맞닥뜨린 이후였다.
이미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이 성유물은 새로운 희망이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 유물의 진가를 알았음에도 다음으로 처들어오는 바알의 군단을 우리는 막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이 무기를 알았다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박율은 이 무기를 알고 있다.
이번엔 늦지 않는다.
“율 씨? 어디가요?”
“잠시만요. 마지막 작업을 할 시간이라.”
박율은 주머니에 있던 점토 인형을 꺼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나타난 박율은 비장한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