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익숙한 감각이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느껴지는 이 익숙하지만 공허한 감각. 박율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실어나르는 구급대원들, 쏟아지는 핏물을 막아보려 애쓰는 사람들.
이미 한 번 겪었기에 그는 알 수 있었다.
상처가 너무 깊은 탓에 소생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죽음이라는 두 번째 겪는 불가사의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쯤 그는 한지원을 보았다.
그는 조금 더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콰직!
날아간 망치가 커다란 악마의 머리를 깨부쉈다.
골짜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악마들이 박율을 본다.
그는 상당히 지친 모습이긴 했지만, 온몸에 보이던 상처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벌써 일어나시면...!”
수술대에서 일어나려던 박율을 본 간호사 하나가 말했다. 박율은 그녀의 만류에도 일어났다.
시간은 6시, 역시 예상한 그대로 악마들이 나타났다.
어쩌다보니 계획이 조금 틀어지기는 했다만 아직 위태로운 수준은 아니었다.
“후...”
박율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악마의 정수를 꺼내 흡수했다.
이전의 악마들에게서 추출한 것보다 배는 더 큰 악마의 정수.
정수가 증기가 되어 몸으로 흡수되자 몸의 피로를 불태우며 검은 불꽃이 살아났다.
박율은 고개를 들어 악마들을 보았다.
덩치로 보나, 성인 하나 들어갈 법한 크기의 심연에서 넷이나 올라 온 것을 보나 그들을 지능이 없는 고기 방패 역할의 9급 하급악마들이다.
박율은 망치를 불러들였다.
그를 보는 악마의 시선은 마치 동족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박율은 이미 악마를 하나 죽인 몸. 악마들이 움직인다.
박율은 그에 맞춰 발을 굴렀다.
콰직!
오른손의 망치가 측면에서 달려드는 악마를 때린다.
망치에 얻어맞은 악마의 안면이 찌그러졌다.
왼쪽에서 달려드는 악마 하나.
박율은 왼손의 검은 불꽃에서 기다란 검을 소환했다.
불꽃 속에서 피어오르는 검이 악마의 심장을 파고 들어갔다.
푹!
악마의 움직임이 멎는다.
차악!
검을 뽑자 악마의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악마의 검과 지옥불, 그리고 성유물의 조화.
악마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박율은 그들이 방심하는 사이 몸을 낮추고 달려들었다.
쉬잉!
왼손의 검이 악마 하나를 베어내고, 반동을 이용해 몸을 비틀어 백핸드로 망치를 휘두른다.
콰작!
움직임 하나에 악마 두 마리가 쓰러졌다.
“후... 나쁘지 않은데.”
어제 그 섬광의 영향일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듯 몸이 가볍고, 힘이 넘쳤다.
슈퍼히어로가 된 기분이랄까.
남은 두 마리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박율에게 달려들었다.
박율은 다시 몸을 비틀어 두 마리의 공격을 대응하려 했지만, 발을 잘못 디뎌 중심을 잃었다.
“잠깐...?”
쨍!
귀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악마 하나가 박율과 함께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것의 뒤로 의자를 들어 올린 의사가 보였다.
바닥에서 악마와 눈을 마주친 박율은 재빨리 망치를 들고 악마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그리고 그의 위를 덮치는 나머지 악마 하나. 박율은 검을 뻗어 악마의 복부에 찔러넣었다. 하지만 악마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박율을 죽이기 위해 발버둥쳤다.
박율은 검을 비틀었지만, 악마는 개의치 않는다.
악마의 아구가 박율의 머리를 향했다.
그 순간 날아든 실을 꿴 바늘이 악마의 머리를 꿰뚫었다.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얀 불꽃 속에서 실을 내뿜고 있는 한지원이 보였다.
그녀는 제가 한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박율은 악마들이 전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후...”
박율은 거친 숨을 고르며 악마의 정수를 추출해 흡수했다.
쌓인 피로가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네...네?”
한지원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여기는 맡길게요. 저는 일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봬요.”
“네...?”
박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악마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었다.
움직여야 한다.
박율은 충격에 휩쌓인 사람들을 뒤로한 채 밖으로 향했다.
역시나 이미 바깥은 혼란스러워졌다.
사방에서 악마들이 날뛰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함은 그들은 굳이 권능이 없더라도 제압할 수 있을 9급 이하의 졸개들이었고, 권능을 개방한 이들은 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어차피 저것들을 잡아봐야 바뀌는 건 없다.
박율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마신 안드라스의 제 3 군단장, 토머.
사실 지금 그의 힘으로 그것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죽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서울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직 그만이 그것의 약점을 알고 있다. 본래의 역사에서 그것은 서울 일대를 파괴하고, 수백의 사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번엔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다.
박율은 서둘러 움직였다.
“유...율아...!!!”
병원을 나오자 마침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향하려던 백봉기를 발견했다.
그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악마들 사이에서도 다행히 무사한 듯했다.
“형이 왜 아직 여깄어요?”
“이...이게 다 무슨 일이냐.”
“마침 잘 됐다.”
“뭐?”
“형 차 좀 빌려줘요.”
“뭐...뭐?”
“지금 빨리 서울로 가야하거든요. 원래 같았으면 벌써 서울에 갔어야 했는데.”
“이...이 상황에 서울을 간다고!?”
“빨리 가야 돼요. 형.”
“이렇게 위험한데...!”
그 순간 첨예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형 숙여요...!”
박율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백봉기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재빨리 반응하지 못하자 박율은 몸을 던졌다.
콰곽!
날아든 창 하나가 그들을 넘어 땅에 박혔다.
날아온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하늘을 부유하는 악마가 보였다.
그것은 창을 되찾기 위해서인지 박율을 노리려는 건지 날아오고 있었다.
박율은 다시금 검과 망치를 소환했다.
그러자 날아들던 악마가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공중에서 멈췄다.
박율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박율은 고개를 내려 검을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손에서 피어난 지옥불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아하...”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박율은 씨익 웃었다.
악마는 인상을 팍 지은 채 창을 회수하기 위해 박율 쪽으로 날았다.
그리고 악마가 창을 집었을 때 박율은 망치를 휘두른다.
콰직!
악마의 머리가 산산조각나며 부양하던 몸이 바닥에 처박힌다.
“형 병원 안으로 들어가요. 지금으로선 저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어요.”
“...”
“시간이 없어요.”
백봉기는 충격에 빠진 눈빛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달리했다.
마치 전쟁터로 아이를 보낼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 면허도 없잖냐.”
“면허 없어도 차 몰 수 있던데.”
“내가 어떻게 너를 혼자 사지에 내몰 수 있냐.”
백봉기는 공포에 목소리를 떨면서도 입을 열었다.
“에?”
“태워줄게.”
“네? 형 위험해요!”
“네가 가는 데 나라고 못 가겠어?”
“형 진심이야?”
“빨리 타라.”
백봉기는 먼저 차에 올라서며 소리쳤다.
박율은 멈칫 고민을 하지만, 결국은 차에 올라탔다.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돼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교통 상황은 이미 마비가 된 상태였다.
박율은 초조한 얼굴로 창문 위 어시스트 핸들을 잡은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씨... 이러면 나가린데...”
빠앙!
길을 비키라는 경적이 사방에서 울렸다.
이대로 가다간 악마를 처치하긴커녕 내일 아침에야 서울에 도착할 듯 싶었다.
“형 안 되겠어요. 차라리 뛰어가는 게...”
“꽉 잡아라.”
백봉기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후진 기어를 넣었다.
“어어...? 어어억...!”
두 사람이 탄 SUV는 중후한 배기음을 내뿜으며 뒤로 급발진을 했다.
그리고는 차들 사이 빈틈을 찾아 그대로 차를 밀어넣었다.
드드득!
차와 차끼리 긁히는 쇳소리가 귀를 때렸다.
“혀...형...”
“이 상황에 차가 무슨 소용이냐. 뒤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백봉기는 엑셀을 밟았다.
* * *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서울 한복판에 박율이 찾는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형 일단 여기서 기다려요.”
박율은 서울중앙박물관 앞에 도착하자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백봉기를 내버려 둔 채 뛰었다.
“역시...!”
이미 근처는 악마들로 포위된 상태였다.
박율은 몸을 숨겼다.
암만 졸개들이라도 혼자 그들을 상대할 순 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쯤은 예상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전날 그의 테러가 먹혔는 지 박물관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박물관을 지키는 인력들 역시 사방에 즐비했다.
아직 악마들이나 군인들이나 대치만 할 뿐 그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 이쯤에서 계획을 실행시켜볼까.”
박율은 슬며시 전날 설치해둔 폭탄 근처로 움직였다.
그리고 하나를 터트린다.
펑!
엄청난 굉음이 터져 울렸다.
동시에 폭탄이 도화선이 되어 악마들이 움직이고, 그들의 움직임에 군인들이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폭탄이 터진 곳을 중심으로 난전이 벌어졌다.
이런 난전이 벌어지면 보안에 구멍이 생긴다.
삼엄하던 경계가 풀어지고 그들은 악마들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폭탄.
펑!
고막을 찢을 듯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하얀 섬광을 내뿜는 폭탄은 달려들던 악마들을 섬멸했다.
박율이 예상한 대로 악마들이 움직여 주었기에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박율은 탐색을 사용해 빈틈을 찾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움직인다.
“후...!”
무사히 건물 안으로 진입한 박율은 그제야 숨을 골랐다.
나머지는 시간 싸움이었다.
바깥에서 군인들이 악마들을 막는 사이 유물을 찾아 나간다.
그리고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를 한다.
악마들과의 전쟁, 그 초석을 위한 전투였다.
“할 수 있다.”
박율은 혹시 모를 경우를 위해 망치를 불러들였다.
“...어라?”
예감이 틀리기를 바랬건만 그의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전쟁기념관으로 향하던 그가 찾은 것은 두 남자였다.
아무리봐도 평범한 인물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황자총통(黃字銃筒), 쉽게 말해 이동식 화포였다.
그가 알고 있는 바론 이 박물관의 몇 안 되는 잠든 성유물이었다.
박율은 몸을 숨긴 채 조용히 그들을 응시했다.
“군인들 사이에도 악마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문만 막아두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던 오판이었다.
“쳇.”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놔둔다면 저 유물은 악마들의 손에 넘어간다.
이 시기에 저 무기만큼 성가신 것도 없고, 효과적인 무기도 없다.
그렇기에 이번 역사에서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이대로면 뺏기는데... 그냥 싸워?
하지만 딱 봐도 그들은 이미 인간의 몸을 완벽하게 차지한 마인들이었다.
하나였으면 몰라도 둘이라면 정면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박율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그의 왼손에 머물렀다.
도박수가 떠올랐다.
“...한 번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