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빈집털이 (2)
칼주안 동문에서 일어났던 전투에 대한 소식은 신나게 서벽을 두드리던 펜자르크의 귀에도 들어갔다. 물론 자신이 예상하던 대로 우레이미야의 전령이 전하는 승전보와는 차이가 다소 있었다.
“여기, 이걸 찾고 있었느냐?”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 위로 상처투성이인 파브라드가 오르더니 어느 거대한 오그르의 목을 들어 보인 것이다.
“썩 가져가거라, 펜자르크. 네 반역죄와 대죄에 대한 징벌은 바로 지금부터다!”
―툭.
거대한 녹색 바탕에 이것저것 알록달록한 천이 뒤섞인 머리였다. 하도 훼손이 많고 온갖 피로 더럽혀져 있어서 대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이게 뭐야?”
“그냥 오그르 수급 아닌가?”
“아니야, 이건……. 우레이미야다.”
“고블린 군단의 족장은 오늘 칼주안에서 죽었다! 그 몸뚱이가 비참하게 죽어 넘어졌다!”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서쪽 성벽의 병사들이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비어 있는 채로 방치 중이던 곳곳의 구역에 대거 새로운 병사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그건 바로 우레미이야의 죽음.
“우레이미야가 죽었다고?”
“그럼 결국 고블린 군단인 끝난 거야?”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빠르게 동문 전투의 상황과 결과에 관한 이야기가 최전방으로부터 후방 기지로도 퍼졌다. 소식을 들은 펜자르크 쪽 병사들을 단숨에 패닉에 빠졌다.
“전쟁에 졌다!”
“그걸 놈들이 알려 줬다는 건 연합군이 이제 우릴 노린다는 거잖아!”
“우린 죽었어!”
“진정해라, 진정! 맥없이 무너지면 학살만 당할 뿐이다, 진정해!”
오시야칸이 휘하 군관들과 함께 병사들 입단속에 나섰지만 이미 퍼져 버린 소문은 어쩔 수 없었다. 이를 악문 장군은 서둘러 펜자르크에게로 달렸다.
“주군, 우레이미야가 당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병사들이 흔들립니다. 직접 왕림하셔서 그 소문을 없애고 결전을 조속히…….”
“이런 일이.”
오시야칸이 뭐라고 말하든 펜자르크는 멍하니 머리가 놓여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레이미야의 죽음. 그리고 그 머리가 자신의 운명 역시 알려주고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백작님. 지금 우리 측 영주들이 멋대로 군을 빼내어 이탈합니다!”
“당장 군관들 보내서 막아! 이제 와서 흩어져 버리면 모두 각개 격파당하고 만다.”
“예!”
부랴부랴 곁에 있던 군관들을 대거 내보내고 오시야칸은 답답한 마음에 펜자르크에게 다가갔다.
“주군, 지금 정신을 차려서 부대를 통제해야 합니다. 흔들리는 것을 노출시키면 끝입니다!”
“군단이 패하다니. 이기지 못할 순 있어도 저렇게 끝났을 리가 없어, 아니야.”
“개자식…….”
이야기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멋대로 절망으로 도피한 주군. 그 면전에 대놓고 욕설을 뱉는 장군이었다. 결국 공황에 빠진 펜자르크를 근위병들에 맡겨 영지로 돌아가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근위병들과 내 말을 듣는 군관들은 모두 나를 따라와라. 소속과 편제는 엉켜도 상관없다. 지금 당장 무너지는 아군을 막아야 해.”
그러나 오시야칸과 부하들이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 성벽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강철 성문 세 개가 일제히 열린 것이다.
-부우!
그리고 연거푸 들려오는 우렁찬 나팔소리. 한동안 멈춰 있던 적의 노포와 투석기에서 발사된 포탄이 동요하던 병력을 두드렸다.
“왕국 기사대다!”
“오러 기사들이 쏟아져, 도망쳐라!”
“으악!”
오시야칸은 재빨리 대열의 중앙으로 뛰어들어 도망치라고 외치던 병사 하나를 베었다. 그리곤 희번덕이는 눈길로 흔들리다가 굳어 버린 병사들을 노렸다.
“어서 무기를 들어 적을 막아라, 명령이다.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면.”
“으아, 으아아…….”
반쯤 협박을 받은 병사들이 부랴부랴 창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햇볕을 닮은 오러가 가득한 기사대는 성문을 빠져나와 쇄도하고 있었다.
“뭐냐, 저 숫자는?”
“우리가 보낸 아쇼트 왕자의 기사단까지 합류한 것 같습니다. 저 청색 깃발을 든 우측 부대에 우리 영지 기사들이 있습니다!”
머리가 띵 하는 강한 충격이 오시야칸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흩어졌던 왕국기사단이 모조리 합류했다면 여기서 방어선을 기껏 세우든 말든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충성에 제 한 몸 불사른 게 결국 이리 돌아오는군. 하하.”
“놈들이 온다!”
수십에서 백 명 정도의 장창진으론 이런 특수 기사단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라크시스와 일곱 반란 영지의 병사들은 찬란한 빛에 이내 묻혀 버리고 말았다.
* * *
강철의 관문의 동서 양쪽에서 한 번에 벌어졌던 칼주안 전투가 끝났다. 기사단 병력 절반이 오시야칸의 죽음을 확인하고 이라크시스 영지를 포위하기 위해 출발했다.
“나머지 영지들의 군대도 앞다투어 도망치다 대거 죽었거나 항복했습니다. 남쪽에서 우군과 대치 중인 카르시 영주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곳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전도 이걸로 일단락인가. 아쇼트 녀석, 대체 자기 힘으로 통제도 못 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데리고 있었는지.”
엘레나는 이라크시스를 점령하러 나간 필로칼리스 대신 클로루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어쩌면 펜자르크가 이라크시스로 바로 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일단 내 직속 정보대에 적당히 얘기해 뒀지.”
“그래……. 지친 데다 보병이 대부분일 테니 기사대가 직접 달려갈 이라크시스 영지로는 갈 수 없겠지. 부탁할까, 그럼.”
“처분은?”
어떻게 할지 네마냐는 이미 지침을 내려 둔 상태였지만, 그래도 명목상 결재권자인 엘레나의 동의가 필요했다. 엘레나는 잠시 망설이는 티를 내더니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지 한참 된 느낌.
“섣불리 영지의 박탈이나 귀족의 처형 문제를 결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이번처럼 대역죄일 뿐만 아니라 마나의 오염을 선도한 극악무도한 경우라면, 결단을 내려야지.”
곁에 배석한 가신단이나 원정에 참관한 이웃 국가들의 장교들도 그 결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다투어 동의를 표했다.
“펜자르크 전 백작의 행위는 선을 넘었습니다. 아무리 귀족을 존중하는 것이 법도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법도를 굽힐 수밖에 없는 힘든 고민이었을 테니, 허허…….”
아주 그럴듯한 연출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겠지만 고민하는 척 연기하는 실력이 일품이라는 네마냐의 감상. 불과 내전 직전만 하더라도 그런 연기 자체에 회의적이던 사람이 엘레나 아니었던가.
‘그렇게 군주의 삶에 익숙해지는 거지. 원래 그런 자질이 충분한 덕분이겠지만.’
이쪽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일단락이다. 네마냐로선 아무래도 바난드의 내전은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블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내 집 앞마당의 불은 꺼야 할 테니까. 해결되었다면 내가 여기 더 있을 이유도 없을 거고.’
전투가 끝나자마자 안 그래도 파브라드로부터 보두앵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교역로를 개통하러 떠났던 그 녀석이 왔다면, 제국에서 바가반드로 이어지는 직통 교역로가 뚫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부턴 제국, 바가반드, 바난드가 서로 수월하게 교역할 수 있겠지. 재건 속도도 빨라질 거고. 녀석이 바쁘게 떠나서 만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칼주안의 재건이나 바난드의 뒤처리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맡아줄 것이다. 네마냐는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할 차례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코르잔의 친구들도 열심히 하고 있겠죠. 이제 저는 슬슬 그쪽으로 가 볼까 합니다.”
“벌써 말입니까?”
“강행군에다 우레이미야와 직접 맞붙으셨으니 피곤하실 겁니다.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연합군과 함께 움직이면 만사가 순탄할 겁니다.”
연합군 고문단뿐만 아니라 엘레나도 혼자 움직일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이제 적 주력은 이 근처에서 흩어졌으니까 본거지 공략은 문제도 아닐 거야. 그러니까 적이 뭉치지 못한다는 게 확실해지면 바로 나랑 출발합시다.”
“아닙니다. 지금 적이 마비되었을 때 가야 합니다. 고블린 군단은 마비되었지만 검은 마법사들 세력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검은 마탑, 그림자 마법사들. 그들의 존재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자 다들 말을 멈추었다. 그래, 고블린이 그동안 문제의 원흉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문제의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미 수백 년 전의 토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지금 잡지 않으면 놓칠 겁니다. 더군다나…….”
“더군다나?”
검은 마법사들의 정체를 알고 나서 내심, 네마냐는 기쁨의 환호를 외쳤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제국에서도 거의 잊히긴 했지만 제국에 강한 적개심을 갖고 한 차례 멸망시킬 뻔했던 이들. 그것이 바로 검은 마탑이었다.
“제국이 과거 현자 알레시아스가 실종되고 난 뒤로 그 정도로 집착해서 없애 버리려고 했던 자들은 없을 겁니다. 그걸 지금도 이어받은 게 현 제국과 제국의 마법성 아니겠습니까.”
“나자리안 경 이야기대로면 지금쯤은 마법성 장관 각하에게도 이야기가 들어갔겠죠.”
“전하, 그 말씀은!”
중간 즈음부터 들어와 가까이 앉은 파브라드가 이야기를 쭉 듣더니 감탄을 내질렀다. 네마냐는 그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제 제국군도 철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원로원이 아무리 군부를 견제하려고 해도 원로원에 못지않은 마법성이 강하게 주장하고 나서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초기 아카데미아라는 민간 철학 교육기관으로 시작한 마나 연구. 제국에선 마법을 위험한 대상으로 보고 탄압했다. 네마냐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 ‘공허 마나’ 개념을 만든 알레시아스가 그 탄압 도중에 실종될 정도였다.
‘정작 던전 전쟁으로 자기들 멸망시킬 뻔했던 검은 마탑은 놓쳤군.’
공허 마나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네마냐가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예 써 보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하니 더 분통이 터질 노릇. 어쨌거나 그런 제국의 터부를 건드렸으니 제국은 앞으로도 하야스단을 섣불리 버리지 못할 것이다.
‘단 10년에서 20년만 하야스단이 안전하게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되면, 그땐 더 이상 남의 보호를 바랄 필요도 없게 될 거다.’
자립. 앞으로는 점점 더 이웃 나라들의 질시와 먼 외부의 침공은 잦아질 것이다. 그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가난을 벗어나는 건 물론 통일도 이뤄내야 할 것이다.
“양해해 주신다면 제가 먼저 빠르게 나코르잔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오크족 정부와는 이미 협의가 끝났겠죠?”
“물론입니다, 전하. 거기다 오체시움과의 통상협정 관련 문서도 부탁하신 대로 진행했습니다. 바누라트 섭정에게 원본이 들어갔으니 왕도에 가시는 대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제국 방면으로부터 물자를 들여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유일한 수급 방식. 그러나 이제 먼 동방의 물산을 수출입하는 오체시움과 통상교역을 맺게 된다면 제국에 휘둘릴 일도 없을 것이다. 보두앵도 이 소식을 듣곤 ‘상권 확대의 기회’라며 기꺼이 찬성했을 정도. 이야기를 들은 엘레나는 기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우린 여기서 고블린과 오그르를 마저 토벌하고 잡아들이겠습니다. 전후 처리도 어느 정도 해야겠고.”
“맡겨 주십시오. 이번 기회에 하야스단과 그 강력한 영유권자인 바난드를 넘볼 수 없다는 걸 사방에 떨쳐 보이겠습니다.”
하야스단의 운명을 바꿀 네마냐의 움직임 역시 이제 거의 마지막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 * *
잠시 후, 바가반드군 천막. 기사단으로부터 감사의 뜻으로 술과 음식을 받은 아일라가 부대에 후하게 나눠주어서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고 오그르 놈이 무기를 휘두를 때 내가 머리를 샥, 숙여서 피하곤 곧장 그놈의 허벅다리를 그냥……!”
“허풍도 아저씨 정도면 병 아니오?”
“와하하!”
오랜 작전 끝에 이젠 평화가 가까웠다며 모닥불 앞에서 잔뜩 흥이 오른 병사들. 한참 멀리서부터 기뻐 양몰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일라, 오늘은 술 안 드세요?”
천막을 걷고 들어선 영주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따뜻한 고기를 리필해 주겠다고 주방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 왔구나.”
“다시 뵙네요, 바가반드 경.”
“아, 소피 님도 계셨군요.”
찬 바람을 뚫고 오느라 얼굴이 창백하면서 뺨은 상기된 네마냐가 김을 뿜어내며 들어섰다. 따뜻하게 막 조리한 고기 냄비에 아일라와 소피가 모두 환호성을 냈다. 역시 아일라의 친구라면 음식 취향도 비슷한 걸까. 그렇다는 건 역시 당당한 주당이란 소릴 텐데.
‘술은 조금만 마시고 탈출해야겠어.’
가벼운 마음으로 네마냐는 주안상의 주인공인 고기와 술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고기!”
“고기야!”
“아니, 저보다 고기를 더 반기는 것 같은 건 제 착각인가요?”
네마냐가 쓴웃음을 지으며 꼬집으니, 두 사람은 못내 체통을 지키는 척하며 얼른 앉기를 권했다. 못 이기는 척 합석한 네마냐는 빠르게 잔을 나눠 채우고 건배를 제안했다.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야 뭐, 할 줄 아는 거로 열심히 한 거지. 젊은 영주님이야말로 맨바닥에 헤딩하면서 풀어낸 게 대단하지.”
“하긴, 정령의 성채에서 우릴 구출해 주실 때의 그 멋진 모습을 다시 얘기해 보면…….”
“아아, 이제 그만 하죠, 그만!”
네마냐는 놀리려는 두 사람의 뜻을 모를 리 없고 당해낼 수도 없으니 아예 딴소리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따뜻하게 덥힌 잔을 한 번에 비운 네마냐가 입을 열었다.
“저는 내일 바로 떠납니다.”
“나코르잔으로 가는 건가? 고블린 성채라……. 아마도 이번 전쟁은 그게 끝이겠지.”
성공적으로 조용해진 세 사람이 술잔을 나누는 가운데 아일라가 그나마 꺼낸 말이었다. 소피도 자못 걱정되는지 이것저것 얘기를 건넸다. 네마냐는 웃으면서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이제 지난 1년의 결산을 낼 시간이 왔을 뿐이니까. 그간 여러분이나 저나 열심히 해 왔고, 그만큼 더 안전한 하야스단이 만들어질 겁니다.”
아일라가 다시금 채워 준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네마냐는 배갈을 떠올리며 그 잔을 마저 비워냈다. 뜨뜻한 기운이 차가운 몸에 찌르르한 온기를 전했다.
―탁.
잔을 내려놓으며, 네마냐는 한파를 뚫고 나코르잔으로 갈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각오해도 검은 마탑과 고블린 본진에서의 대결은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쓸모없는 희생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낭보를 전할 때까지 기다려 줘요.”
3월 초에도 스산한 하야스단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봄이 찾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 19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