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칼주안 전투 (5)
―쿠르릉!
반쯤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칼주안 동문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은 벽 위에선 여전히 생존한 병사들이 활을 날리고 기어오르는 고블린을 내려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성문은 훤히 무너진 상태.
“이런. 늦어 버린 건 아닌가?”
“기사대 말로는 이제 십여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니까. 전투가 아직 이어지고 있다면 아직 막을 수 있어.”
절망한 듯한 엘레나의 말에 네마냐가 고삐를 당기며 힘을 북돋웠다. 페넬로파가 이를 악물고 자신들을 막으려 했다는 건 아직 군단이 펜자르크와 합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가 끝난 건 아니란 의미다.
“어서 가자!”
선봉대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성으로 향하는 고블린 부대를 볼 것도 없이 깔아뭉개며 전속력을 문을 통과하는 그 순간.
―깡!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막 성문을 들어오던 엘레나의 머리맡 바로 위로 무언가가 날아갔다. 성루에 부딪힌 그 무언가가 떨어져 살펴보니 반으로 부러진 검, 특히 기사에게 주어지는 오러 전용 검이었다.
“파브라드!”
엘레나는 말에서 창을 든 채 대번에 뛰어내리곤 눈앞의 광경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엔 몇 주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오그르의 으뜸가는 대장, 일인자, 우레이미야가 있었다.
―쨍!
“흐흐……. 빨리도 왔구나. 하지만 늦었다. 이제 곧 이곳은 우리가 점령하고 너희의 옹졸한 이 나라는 내가 고스란히 삼켜 주지.”
“헛소리!”
“과연 그럴까? 지금쯤이면 다르빌에서 위장했던 우리 군대가 성도까지 점령했을 것이다.”
처참하게 당한 파브라드. 검술을 가르쳤던 선생의 상태에 이를 악문 엘레나는 더욱 오러를 불어넣어 더 빠른 검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우레이미야는 곳곳에 생긴 자상으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크하하, 간지럽구나. 허나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야 어림도 없지.”
“윽!”
―퍽!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주고받던 두 상대의 충돌. 허점을 잡은 듯 눈매가 날카로워진 우레이미야는 순간 앞으로 몸을 밀어붙이더니 검 손잡이로 자세가 흐트러진 엘레나의 명치께를 후려쳤다.
“전하!”
“단장!”
“내가 대신하지. 대신 전하를 부탁하네.”
말에서 내려 파브라드를 급히 수습한 네마냐는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검을 뽑아 들고 난전으로 뛰어들었다.
―캉!
마나를 얼마 주입하지 못해 완전하지 않은 검신으로 충격을 받아 냈다. 손목이 저리는 감각에 눈이 아찔해지며 네마냐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 그때 봤던 겁 없는 애송이로군.”
아주 유창한 말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배운 듯한. 하긴, 고블린 군단이란 것 자체가 세계를 뒤엎으려는 그림자 자손들의 정교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것이니. 네마냐는 삭풍에 시린 두 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끝났다, 너희는.”
“아직도 허세를 부리나. 너희는 곧 너희 뒤를 쫓아올 우리 군대에 앞뒤로 포위될 거라는 걸. 용케 여기까지 쫓아온 건 대단하다만.”
“아직도 아쇼트를 기다리고 있나? 그들만 도착해서 우릴 앞뒤로 누르면 충분히 전세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거기까지 말한 뒤 네마냐는 한 손으로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제눌트가 건네주었던 ‘병력 동원’을 요구하는 우레이미야의 친서였다.
“그건…….”
“놀아난 거야, 인마. 너희를 도우러 올 마지막 카드는 이미 간파됐다고. 아니, 벌써 파훼까지 끝났지.”
“……그렇다는 건.”
아쇼트의 병력을 펜자르크가 일종의 미끼처럼 썼다지만 우레이미야는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펜자르크의 편지로 위장한 자신의 친서를 전해 엘레나의 군대가 출격하면 바로 뒤를 따라와 포위하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미 그 군대는 우리에게 합류했다는 걸 알았어야지. 없는 지원을 기다리던 너희 후위대는 이미 우리에게 궤멸당했다.”
“…….”
분위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이 관문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모든 일이 풀릴 것이라 생각했겠지. 우리가 오히려 여기로 너를 몰았다는 건 몰랐을 테니까.”
“……상관없다. 여전히 군단의 핵심은 이곳에 있으니까.”
더는 듣지 않을 기세로 매섭게 달려드는 오그르 대장의 도검. 온몸으로 팽팽하게 느껴지는 긴장감으로 네마냐는 온 힘을 다해 금속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동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오러와는 다른 순수한 마나 그 자체였다.
“건방지긴.”
“오러 검기를 상대할 때와는 느낌이 다를걸. 제대로 느껴 보라고.”
―쨍!
―태앵!
언제고 검이 부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충격파가 부딪칠 때마다 요란했다. 하지만 파브라드의 경우와 달리 오러가 아닌 마나로 채워진 특수합금은 아일라가 장담한 대로 멀쩡했다. 아주 정밀한 순도라며 자랑할 만한 강도였다.
“받아라!”
검술 수업을 제대로 받았던 적도 없었지만, 마지막 징병 퀘스트를 받아 모조리 검술에 집어넣은 건 유효한 선택이었다. 적어도 무기의 휘두름을 따라가지 못해 죽을 일은 없으니까.
―후웅!
“읏.”
물론 어처구니없이 죽을 일이 없다는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선구자’와 ‘고블린 학살자’의 칭호까지 모조리 낀 상태에 능력치도 모조리 전투 쪽에 쏟아부었는데도 대결은 아슬아슬했다.
“인간이 아무리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들며 실력을 키워도 기본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지.”
“각하, 도와드립니까!”
뒤에서 클로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끼어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검에 오러가 가득 실려 있었다. 네마냐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동문 주변의 고블린 부대는 모두 제압된 상태로 오직 우레이미야만이 남아 있었다. 필로칼리스는 기사 몇 명과 함께 역시 위태로운 서쪽으로 달려간 상태였다.
“곧 끝날 거야. 조금만 기다려.”
말을 마친 네마냐는 편지를 내던진 뒤, 왼쪽 넷째 손가락에 끼워 둔 반지에 검을 든 오른손을 가져다 매만졌다.
[휘풀론 프로 리자이스](Upoulon pro Rizais)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이 그저 조심스레 개인적인 지식으로만 남겨 두었던 지식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주변의 기사들이나 신관 그리고 우레이미야조차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게 무슨 주문이지?”
“글쎄. ‘공허의 네 뿌리에게로 돌아가라’라니. 그게 무슨…….”
“…….”
네마냐와 우레이미야가 노려보는 사이에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잠시 긴장했던 군단의 족장은 코웃음을 흘리며 아무 소리나 지껄인다고 주문이 되는 게 아니라는 훈계를 남겼다.
“이제 헛짓은 다 했으니 죽을 각오는 되었겠지. 이번의 내 날카로운 도검은 결코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모르면 되었다! 문답무용!”
우레이미야는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지켜보던 기사들과 제압당한 고블린들이 오금이 저리는 걸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재차 그 선명한 검녹색 기운으로 도검을 치켜들었다. 원래의 물건 자체의 여덟 배 정도는 족히 커져 있는 무기였다.
“……?”
“뭐지?”
순간 도검을 들어 올린 자세에서 멈춰 버린 우레이미야. 기사들도 어딘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위압감이라던가 불결한 마나의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클로루스의 적절한 한마디. 그 소리에 죽은 듯 조용하던 정적이 깨졌다.
“맞아. 지금 저건 그냥 날붙이를 휘두르는 느낌인데? 놈이 힘이 다한 건가?”
“그럴 리가? 파브라드 단장이 저 지경이 되었을 때도 전혀 타격이 없던 놈인데.”
“으으……. 시끄럽다, 인간 놈들!”
우레이미야는 당혹감에 찬 표정을 우선 지우고 그대로 도검을 휘둘렀다.
―채앵!
똑같은 충격음이라 하겠지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저 온전히 순수한 근력만이 부딪친 느낌이었다.
“마력! 여명의 빛이, 사라졌다고?”
“그림자가 없어졌다니?”
“그래,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느껴지던 그 느낌이란 게 다름 아니라…….”
“이것 봐, 내 검의 오러까지 사라졌어!”
혼란. 모두가 이내 네마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누군가 무슨 일을 저질러서 그 효과가 생겼다면 그 후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지, 대체?”
“글쎄. 나는 마나에게 스스로의 뿌리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한 것뿐이다.”
“뿌리?”
마나의 뿌리.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인간이 그 존재를 파악한 두 가지 마나는 모두 원래는 하나의 에너지로부터 기원한 힘이었다. 네마냐가 읽었던 그 공허마나 교과서에도 적혀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히 그걸 아는 게 대수는 아니지. 쌍소멸이라고 부르는 그거, 결코 너한테 유리한 게 아니야.”
“헛소리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진 몰라도 결국 여기에 닿는 순간 너희들은 일개 잿더미로 돌아갈 뿐이지.”
―깡!
우레이미야가 다시 도검을 부딪쳐왔다. 이제는 힘이 다 빠졌으므로 여유롭게 네마냐는 검을 휘둘러 막았다. 부딪칠 때마다 검에 깃든 힘은 점점 더 빛을 뿜어냈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래두.”
“말재주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다!”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군.”
고개를 저은 네마냐. 어차피 설득이 되리라 여긴 적도 없고, 설득이 되어 봤자 골치 아픈 말썽거리만 될 게 뻔하다. 돌연히, 모든 마나가 모습을 감춘 주변에서 유일하게 네마냐의 검이 찬란한 빛으로 빛났다.
―촤악!
아주 간단하고 검술의 기초가 되는 찌르기. 간단한 것이 최선의 것이라지만, 다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웠다.
“아…….”
가장 빠른 소감은 찌르기 한 방에 몸통의 상당수가 소멸해 버린 대군장, 우레이미야의 입에서 나왔다.
“세계의 땅거미니, 여명이니 같은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결국 한 태양으로부터 나온 빛이었을 뿐.”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며 네마냐는 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집어넣었다. 번쩍하는 빛이 사람들의 눈앞을 스쳐 사라졌다. 그리고 모두에게서 느껴지던 이상한 느낌도 사라졌다.
“어……우, 으아?”
“휴, 대체 이건 뭔지.”
“끝났다는 건 확실하군.”
소란스럽던 와중에 오그르의 제일인자, 군단의 수장이었던 우레이미야의 몸뚱이였던 것이 쓰러져 있었다.
‘후, 그때 의문의 저택에서 그 주문을 눈여겨봐 두길 잘했지. 공허 마나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게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리라곤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의 가장 긴급한 국면을 지나간 것이었다.
“고생했어. 방금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해 주어야겠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엘레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은 네마냐의 어깨를 짚으며 건넨 한마디. 피식 웃으며 네마냐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와아!
―만세!
동문 밖 먼 곳에서부터 승리를 외치는 함성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여전히 최소 1만은 될 법한 고블린과 오그르들을 무질서하게 사방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리는 확실했다.
“드디어, 이런 날이 왔구나.”
“승리입니다, 전하!”
“적의 주력을 일거에 섬멸한 겁니다, 단장!”
제각기 다른 소속이라지만 기사들은 서로 얼싸안고 바깥과 마찬가지로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여러 전투의 승리와는 달리 약간의 울먹임이 포함된 울부짖음이었다.
“연합군의 승리다!”
“살아남았어, 엉엉…….”
그 어느 곳보다도 격렬했을 칼주안의 공성전에서 생존자인 주민 보조원들과 민병대는 자제함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하, 드디어 가장 하기 꺼렸던 일을 해치웠어. 정말 지랄 맞게 어려웠지.”
“하지만 해내고 나면 이만큼 속 시원한 일도 없을 테지요. 그렇잖습니까, 바가반드 경?”
클로루스가 다시금 감탄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손수건을 건넸다. 이런. 또 한 번 부담스러운 선망의 눈길에 한동안 시달리게 생긴 건가. 그래도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단 것 자체가 살아남음이란 것이 남기는 선물이겠지.
“그래. 아직 할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지만.”
“할 일이요?”
네마냐가 눈을 들어 동쪽, 먼 곳의 보이지도 않을 산맥을 쳐다보았다. 클로루스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두들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뭐라 말하지 않아도 누구든 최후의 과제는 알 것 같았다.
[고블린 성채의 진압, 저주받은 전쟁의 끝]
“내친김에 고블린 본거지로 들어가서 몽땅 다 쳐죽입시다!”
“그리고 지금까지 놈들이 칼로 빼앗고 누린 부는 몽땅 우리 인간들이 다시 향유하는 겁니다, 하하하.”
네마냐는 대꾸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아마도 이들의 바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황은 흐를 것이다. 전쟁이란, 그렇게 전혀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을 일상이 되게 만드는 법이거든.
“우선, 지금은 좀 쉬자. 파브라드 경도 돌봐야 할 테고. 무엇보다도…….”
네마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상태창과 임무를 다시 한번 살피는 것이지만 모두들 그 진지한 태도의 진의를 알 수 없으니 진지하게 경청했다.
“우리의 친구들이 준비를 마칠 시간은 줘야지.”
이제 공은 칼주안, 혹은 칼주안 너머에서 무너질 일만 남은 펜자르크 따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코르잔의 ‘남은 자’들에게 넘겨져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이 손수 끝내야만 할 것이었다.
‘어쩐지, 마지막엔 해결되지 않은 세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
빠르게 식어 버린 전투 현장의 핏자국을 말리는 삭풍이 다시 골수를 파고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네마냐는 그저 모든 문제의 근원을 확실히 뿌리 뽑으리라, 그렇게 다짐을 굳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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