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칼주안 전투 (4)
삼백여 명의 기사들은 단장에게서 떨어진 마지막 명령을 받들었다. 제법 떨어진 중앙광장에서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 기마대는 속도를 점점 올리며 성문의 너비에 맞추어 4열로 줄을 맞추기까지 했다.
―두두두!
점점 말발굽 소리는 커져서 어느 순간엔 그 일정한 리듬에 고블린들이 긴장되어 꼼짝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군단에서도 이에 대한 대비가 없진 않았다.
“고블린 장창 부대, 저지하라! 오그르 전위대는 그 뒤에서 기다려라!”
무너진 성벽 쪽에선 인간 기사단장이 오그르 족장과 그 뒤의 오그르 부대를 막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문으로 방금 들어온 부대는 오직 좁은 성문 구역만 방어하면 될 것이다. 고블린 장창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다. 그런데…….
“와!”
“기사단을 돕자!”
“하찮은 것들이, 감히.”
민병대와 동문의 수비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일대일 대결에서 오그르에 비교는 안 되겠지만 기마대가 달려들 때까지 진영에 혼란을 주기엔 충분했다.
“꺼져, 이놈들!”
“겁먹지 말고 버팁시다, 여러분! 단 삼십 초만 버티면 다시 밀어낼 수 있소!”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걸 따져가며 행동하기엔 칼주안의 방어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벽이 무너졌을 때의 자포자기심은 곧 무모한 돌격으로 돌아왔다.
“크윽…….”
“원수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리하게 몸을 들이밀며 목숨을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덕분에 고블린 장창병들은 제대로 대열을 펼치고 창을 겨눌 수 없었다. 게다가…….
“던져!”
“개수작들!”
선두에 선 기사의 호령에 다시 수십여 개는 됨직한 투창 여러 개가 몇 회씩 나뉘어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오러를 실은 막강한 힘이었다.
“큭.”
“크악……!”
“창을 놓치지 마라, 죽어도 버텨!”
“안 된다, 그건.”
헛된 명령과 부질없는 항의가 터져 나올 뿐, 고블린들은 효과적인 대응을 내놓을 수 없었다. 죽었거나 충격에 빠진 장창병들이 대오를 무너뜨리고, 그 순간 심판의 순간이 다가왔다.
―콰직!
―콰드득!
―푸욱!
말발굽에 어딘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무기, 고블린, 오그르 할 것 없이 깔리거나 창에 찔려 쓰러졌다.
“모든 걸 무시하고 정면으로! 이대로 성 밖까지 뚫고 나간다!”
“후!”
탄식과도 같은 강한 입소리와 함께 기사단은 땀이 어린 손으로 더욱 말을 재촉했다. 발에 밟히는 고블린과 그 장비가 많아질수록 기사단 중에서도 잘못 찔리거나 발을 헛디딘 말이 쓰러지는 일이 생겨났다. 하지만 멀쩡한 기사들은 그대로 대오를 지켰다.
“……얕은꾀를 부리는구나, 기사단장. 그런다고 너희가 이기는 일은 없을 거란 걸 모르는가?”
“나는 너희의 수작을 잘 아는데? 여길 손에 넣기만 하면 왕국을 네 편으로 만들어 쥐락펴락하겠다, 이런 심산이었겠지.”
우레이미야는 파브라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검을 휘둘렀다. 파브라드는 황금빛이 가득한 검격으로 역시 파괴적인 위력을 막아 냈다. 몇 번의 짧은 충돌 끝에 허점을 찾지 못한 우레이미야는 잠시 도검을 거두었다.
“제법이로군.”
“너야말로.”
“건방지긴, 쿡쿡. 인간이 내 검을 받아 낸 것만으로도 놀랍지만 이미 몸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오러 따위론 새벽의 빛을 이겨낼 수 없으니까.”
사실이다. 마나가 오러로 전환되면 물리 타격이 강해지고 시각으로 드러난다. 그 대신 하위 변환인지라 마나와 쌍소멸하는, 즉 대등한 그림자 마나엔 불리할 수밖에 없다. 파브라드 역시 충돌하는 순간마다, 몸에 무리가 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부족한 마나로나마 쌍소멸시켜 가며 버틸 뿐이었다.
“하지만 버티기엔 충분하지.”
“허, 이기는 것도 아니고 버틴다? 성문이 부서지고 병사들이 난입하는 걸 보고서도?”
다시 몇 합의 부딪침이 있고 난 뒤 우레이미야와 파브라드는 각각 다섯 걸음 정도를 물러났다. 처음에 비해 조금 느려진 움직임으로 파브라드 단장은 검을 들어 올렸다.
“내가 자란 고향에선 괴수를 잡을 때 사냥꾼들이 직접 미끼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지.”
차가운 바람에 몸이 식으며 입김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긴장감 때문인지 우레이미야도 마나를 갈구하는 가쁜 숨으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이번 경우엔 내가 그 미끼로 너희를 잡아 준다고 쳐 주지.”
“아니……. 여기선 네가 그 괴수고, 내가 그 미끼가 되는 거지. 모르겠나?”
검에 다시금 차오르는 태양빛 오러. 하지만 지금은 파브라드가 직접 채운 것이 아니었다. 맞서던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곁으로 돌렸다. 태양. 3월 초하루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아라, 네가 두려워하던 순간을!”
“멍청한 놈, 바가반드와 공주의 군대가 오기 전에 네놈과 군대는 가루가 될 것이다!”
각자의 빛을 신념으로 삼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녹색과 태양빛이 어린 두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이 주위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쿠궁…….
묵직한 진동이 주변 수 킬로미터까지 퍼져 나가며 사람들의 경악을 자아냈다.
* * *
같은 시각, 정반대 바가란으로부터 동문으로 향하는 계곡의 어느 지점.
―퍽!
고블린들은 달려드는 족족 기사들의 창에 꿰이거나 말발굽에 차이며 유명을 달리했다. 아무리 높이 봐주더라도 고블린으론 잘 훈련된 기사대의 발목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다음 부대 투입! 모두 그림자로 병사들의 힘을 보태 줘라!”
[루악스 식키시스](Ruaks Suykusis)
혼돈의 급류가 재차 여러 마법사의 손에서 펼쳐졌다. 검은색 구름을 이리저리 녹색의 기운이 휘감은 불길한 기운이 재차 힘을 내어 고블린, 오그르 전사들의 머리맡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위치한 바가반드 군의 최선봉으로 향했다.
“그림자가 몰려온다, 모두들 그것을 준비해라!”
“방패병, 앞으로!”
일사불란한 외침에 적당한 손도끼와 커다란 방패를 든 방패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첫째와 둘째 열을 채우던 창병, 궁병들은 뒤로 물러섰다. 방패수들은 적당한 거리를 띄운 채 방패를 땅에 박고 비스듬하게 버티고 섰다.
[카스트라 투 가이아](Kastra tou Gaia)
병사들은 방패 안쪽에 마나의 힘으로 새겨놓은 문자를 힘차게 읽었다. 그건 곧 그곳에 각인된 힘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했다.
“저, 저건 뭐야!”
―스르륵!
놀랍게도 마법이라곤 일자무식한 농부에 불과했을 보조병들은 결계를 구현해냈다. 아주 기초적이라지만 마나로 형성된 장벽 자체는 흠잡을 데 없이 순수한 땅의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버텨라!”
―지직!
네마냐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흙의 이미지가 갓 만들어지자마자 그림자가 충돌해 왔다. 병사들은 당황하긴 했지만 크게 흔들리진 않았다. 이내 그림자와 흙의 장벽은 함께 사라졌다.
“저게 대체 뭐야……. 놈들이 대체 어떻게 저런 결계를?”
“마법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에게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단 거지?”
놀라는 그림자 마법사들. 단순히 그림자 진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마법 비전문가를 보는 전문가의 놀람이었다.
“이게 된다고?”
“맙소사, 이거 봐! 우리가 마법을 일으켰다고!”
“으하하, 이거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농민이나 광부 출신들이 대부분인 방패수들은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희열에 찼다. 속수무책으로 막연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파괴적인 마법.
“알고 보면 별것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준 뒤에는 훨씬 더 담대해지지.”
마법 공학의 산물. 그림자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네마냐가 준비한 보조 수단이었다. 현재 기존 방식대로 신관이나 성기사가 신성 마나로 대처한다면 그다음, 그림자 마법사 자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들이 다시 준비가 오래 걸리는 신성 마나를 모을 때면 그림자 마법사들이 두 번째 공격을 시작할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선빵필승을 놈들이 자꾸 시전하겠다면 우린 카드가 두 개를 내세우면 그만이야.”
“선…… 네?”
“먼저 치면 반드시 이긴다는 뜻이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되묻는 알리테스에게, 곁에서 불쑥 나온 아일라가 대신 답했다. 이미 며칠 내내 싸우느라 피곤함과 빛바랜 핏자국이 잔뜩 묻었지만, 눈빛만은 선명했다.
“지금이야, 하라드, 소피!”
아일라는 이내 손을 들어 근처 구릉 위에서 내려다볼 하라드와 소피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입니다, 소피 경.”
“마법과 정령이 오늘만은 나란히 적을 섬멸할 겁니다.”
하라드와 소피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언덕 위에 늘어선 정령사와 마법사들에게 일제히 신호를 보냈다.
“우리의 세계를 위협하는 저자들은 우리가 반드시 제거한다!”
“고원의 주인, 소인족의 후예여, 이 세계의 적을 향해, 공격!”
[노움이여, 계약에 의거해 소환하노니. 대지를 뒤엎어 눈 앞의 가공할 적을 섬멸하라!]
[아스파라테이아 코스모소티라]
페넬로파가 지휘하는 군단 후미가 버티고 선 토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군단이 파 놓은 참호가 밭이라도 가는 것처럼 뒤엎어졌다. 안쪽에서 창을 바깥으로 빼놓은 채 무조건 버티려던 고블린 부대들까지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땅 위에 그들이 드러난 순간, 하늘 높이서부터 칼날처럼 스산한 바람이 고블린들을 덮쳤다. 말 그대로 얼음장 바람에 고블린들은 두 동강, 세 동강이 나며 쓰러졌다.
“우리도 시작하자, 공격!”
“기사대, 엄호받는 동안에 전속 전진!”
신관들을 뒤로하며 왕국기사단의 전력 800여 기사가 속도를 높여 전진하기 시작했다. 엘레나의 신호를 알아챈 네마냐는 곧바로 직접 싸우고 있는 바가반드 진영에 알렸다.
“네 명당 가운데 두 명은 측면으로!”
“공간을 내어라!”
초록색 깃발이 올랐다. 훈련대로 기사대가 언제든 돌격할 공간을 내어주는 방법이었다. 기사대와 호흡이 잘 맞아야만 피해 없이 공간을 낼 수 있었다.
“적 방패수 진영이 옅어졌다, 공격!”
[엘리게 아나칼레오](Hliyh Anakalew)
‘내가 그림자를 부른다’라는 주문. 그림자 던전을 직접 소환하는 주문은 오랫동안 제국과 그 영향력이 미치는 세계에서 잊힌 주문이었다.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겁도 없이 던전을 소환한다고?”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신관들 반격!”
“마법은 소용없으니 마나를 소모하지 않도록 하라, 정령도 물러서도록!”
그림자 마나를 활용한 마법 자체는 어찌어찌 쌍소멸 형태로 맞대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 자체가 뿜어져 나오는 소환 시설이라 할 던전 자체는 어쩔 수 없었다. 마나의 원천에선 무한하게 힘이 뿜어져 나오니까.
[카타리조 알라스기마](Katarizw Alasyima)
마나의 불순한 오염을 제거할 때만 볼 수 있다는 정화의 빛이 반구의 형태로 사방의 지상을 뒤덮었다.
“으앗…….”
“씁, 보지 마! 눈 다친다.”
영지 병사들은 신병들이 눈을 감도록 하고 기사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두두두!
기사들은 던전 자체가 곧 회색빛으로 변해 사라지자 더욱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시, 신성 기사대!”
“너무 많다! 우리 죽는다!”
칼주안 관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지만 어느새 고립되어 버린 3백의 기사와는 숫자부터가 달랐다. 거기다 계속된 고블린의 지연전을 헤쳐오느라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기사들이었다.
―퍼퍽!
―콰득!
바가반드 군대가 내어준 틈새로 기사단이 쇄도했다. 정령 노움이 뒤집었던 참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기사대의 진격은 불가능했겠지만, 정령사들이 땅을 평평하게 다져 버린 뒤였다.
“저기, 고립된 아군 기사들이 보입니다!”
“그래, 나도 확인했다. 왕국 기사단까지 합류했으니 저곳까지 한 번에 돌파한다.”
최선두에 선 엘레나의 옆에서 클로루스와 필로칼리스가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그르를 물리치며 나란히 달렸다. 쐐기꼴로 진영을 짠 두 기사대의 혼성부대는 각기 황금빛과 창백한 흰 빛의 두 가지 오러를 휘두르며 거침없이 진영을 내달렸다.
“회복되는 대로 던전을 계속 소환해, 놈들의 전진을 어떻게든 차단해야 한다!”
고블린들이 무의미할 정도로 몸을 던져 조금이라도 전진을 늦추는 사이, 검은 마법사들은 코앞까지 다가온 기사대를 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던전을 불러냈다.
[엘리게 아나칼레오](Hliyh Anakalew)
“두 번째 창조의 빛을!”
검은 옷 세 명이 불러낸 던전을 곧이어 페넬로파가 합쳐서 거대 던전으로 변모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부턴 이전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던 압도적인 기운이 쏟아졌다.
“조심!”
“으, 으앗!”
클로루스의 경고에 급하게 방향을 틀었지만 몇 명의 기사가 급격한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지거나 창에 꿰이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몇 명은 노도와 같은 그림자의 기운에 그대로 기운을 빼앗긴 채 말라 죽었다.
“눈 돌리지 말고 계속 전진!”
두려웠다. 매번 죽음의 전열 앞에 서기를 자처하며 죽음을 반려자로 여기는 자신이지만 엘레나는 그걸 외면하며 달려야 하는 자신이 다시금 낯설었다.
―푸욱!
갑옷이 두꺼워서 부상을 당하진 않았지만 기사 하나가 또 말에서 떨어졌다. 온갖 무기를 든 고블린들이 달려들어 타작을 하지만, 찔려 죽는다기보단 두려움과 구타로 사망하는 편에 가까웠다. 2백 하고도 60명. 성문 밖까지 공성부대 몇 개를 밀어내며 거의 1천여 오그르를 섬멸한 칼주안의 기사대는 벌써 40명가량이 전사했다. 적을 계속 밀어붙이긴 했지만 이젠 돌파 능력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
“이제 끝이군……. 모두 하마하라! 모두 대오를 갖춰서 여기서 끝까지 적을 막는다!”
“어차피 곧 지쳐서 쓰러지겠지만, 그래야지.”
후방으로부터 들린 큰 폭음. 돌아보지 않아도 그들은 단장 역시 최후를 맞이했으리라고 여겼다. 적 군단과 펜자르크의 결합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불과 십여 분 사이에 끝장이 난 셈이지만, 기사들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돌이킬 순 없으니, 할 일을 합시다.”
“음.”
말에서 일사불란하게 내린 기사들은 메이스류의 둔기로 무기를 바꿔 들고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밀집 진형을 짰다. 그리곤 다가오는 고블린들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팍!
―으득!
으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에 온갖 타액과 갖가지 색의 피가 낭자했다. 하지만 이내 밀려났던 오그르들까지 후방에서까지 모습을 드러내며 삽시간에 기사단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계속된 총공세로 오러도 거의 바닥이었다.
‘마지막이 온다면 자폭해야 하는가.’
애써 목에 건 강력한 아티팩트를 잡은 채, 부단장은 연신 검을 휘둘러 동료를 구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그때.
―부우우!
오그르들로 어두워진 하늘 사이로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익숙한 그 소리란. 그리고 삽시간에 강렬한 빛이 그림자를 물리치고, 산과도 같은 오그르의 몸들을 꿰뚫었다.
―퍼퍽!
―그억!
그 빛이 어떤 뜻인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원군. 칼주안으로 온다던 원군 역시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다다른 것이다.
“원군이다!”
“연합군이 왔다!”
힘을 되찾은 기사대는 메이스를 휘두르며, 오히려 방어를 제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뒤에선 기사대가 무섭게 오러를 날려대며 압박하고, 앞에선 피에 흥건하게 젖은 광기의 하마 기사대가 도끼와 메이스를 들고 달려들었다.
“적이 무너진다, 계속 파고들어라!”
“사제들이 따라붙으면 검은 던전도 무력화될 거야, 우린 기사대 병력으로 돌파하자!”
어느샌가 아일라와 함께 말을 타고 따라잡은 네마냐의 다급한 음성. 기사대가 여기까지 나와 고립당했다는 건 이미 칼주안 동문은 무사하지 못하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래, 멈추지 말고 계속 돌파한다! 칼주안 성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마라!”
“아일라 씨, 그동안 여길 부탁할게요.”
“내가? 여기 맡길 기사도 있는데?”
군 계급도 없는 아일라이기에 당연한 물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마나 무기를 쓰는 데 전문가인 아일라였기에 네마냐는 기꺼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이내 아일라도 망설임을 제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후방에서 병력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버티고 있어요.”
그리곤 이내 말을 몰아 앞서나간 엘레나의 기마대를 뒤따랐다. 아일라는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곤 스트레칭을 하며 벼락같이 망치를 꺼내 들었다. 신으로부터 직접 일족이 받았다고 전해지는 황금 망치.
“그럼…… 어디 한판 붙어 볼까.”
어느새 기사대가 몰려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을 뿜는 그 무기가 오러의 빛을 품었음을 눈치챈 것이다. 아일라 역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무기에 힘을 불어넣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덤벼, 개새끼들아아아아!”
누구보다도 무서운 입담을 뽐내며, 이 인간-소인족의 혼혈 기술자는 기사도 아닌 몸으로 기사대 선두에 서서 오그르 부대로 달려들었다.
* * *
―좌르르!
돌무더기가 무수하게 흘러내렸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집의 벽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대폭발을 감당하느라 힘이 급격히 소진된 파브라드는 반쯤 파묻힌 상태로 신음을 삼켰다.
“흐흐……. 후방의 기사대도 이젠 조용하구나. 이젠 정말 끝이다. 저 알량하게 버티는 서벽 따위야 우리가 모습만 보여도 없어질 테지.”
“퉷, 후우……. 그래 봐야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고원의 모두가 바난드의 위기를 들으면 곧 달려올 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이지 못한 뜻이 위기랍시고 모일 수 있겠나? 죽지 못한 망령이 아직도 헛된 바람을 품은 게지.”
고블린과 오그르들은 족장이 이긴 모양새에 환호하며 마을 안쪽으로 짓쳐들어 갔다. 마을 안쪽 광장에선 날카로운 비명과 무언가를 부수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으론 기껏해야 주민들 외에 전사자와 부상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읏…….”
부서진 파편 조각들을 치우고 일어나며 파브라드는 마지막 싸움을 준비했다.
“닥치고 얼른 죽을 준비나 하자고, 괴수 놈. 내 마지막 오러로 데려갈 동료는 아무래도 네가 될 모양이다.”
“흐……. 제대로 받아 주지. 싸우다 죽는 건 너희 기사에게도 명예일 테니까.”
처음과도 같이 다시 선명한 검녹색의 기운. 흐릿한 초점으로 이미 반쯤 부러진 검에 미약한 마나로 오러를 빚어 불어넣는 파브라드는 마지막으로 숨을 골랐다.
‘이것이 내 마지막 일격, 후회는 없다.’
“으랴아아아!”
흘러내린 피로 시야가 반 이상 가려진 기사단장의 마지막 일성. 부디 헛된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는 소망이었다.
“때로는 죽음이 찾아오기도 전에 일생의 소망이 이뤄지곤 하죠.”
“으……어?”
귓속에 파고드는 따뜻한 목소리에 파브라드는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높이 떠오른 태양을 등에 지고 바라보는 어둑한 얼굴. 말없이 지켜보는 뒤편의 엘레나와 지긋이 웃어 보이는 네마냐까지.
“내가 죽은 건가? 그래서 벌써 저세상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군요.”
네마냐가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을 펼치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비켜 주었다. 반쯤 부서진 서문과 성벽, 반파된 마을과 수습된 고블린 시체의 산까지. 이런 광경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뿐이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왕국기사단장 각하.”
네마냐의 선언.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으로 비로소 파브라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예정된, 그러나 동시에 기적적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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