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칼주안 전투 (3)
바가란을 사실상 함락했던 우레이미야 군단이 급속도로 전장을 이탈했다. 곧 학살당할 일만이 남아 있던 주민과 민병대, 정규군은 산처럼 쌓인 시신과 돌 더미 사이에서 승리의 오열을 외쳤다. 남은 것은 폐허뿐이지만 승전의 의미는 작지 않았다. 우레이미야는 그걸 잘 알았다.
“제길, 그곳만 먼저 함락시켰으면 후방에서 얼마나 달려오든 상관없이 버틸 수 있었는데.”
“그만큼 저쪽도 간절하게 달려온 거겠지. 우리가 이렇게 빨리 무너뜨렸는데도 반나절 차이로 따라왔으니.”
고삐가 찢어지도록 붙잡고 몸에 두른 패전국의 깃발을 펄럭이는 우레이미야에게 페넬로파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넸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마뜩잖은 건 검은 마법사의 최상부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여유롭게 우위를 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대체…….’
페넬로파는 자신의 운명이 반드시 승리하는 데 있다고 여겨 왔다. 의심 따위는 달리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가스파리얀이 어느 날 갑자기 비밀에 싸인 집안 내력을 밝히며 반드시 「여명의 계시」를 이뤄야 한다는 목표를 주었을 때도 말이다.
‘그 계시와 목표가 그른 것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옳다면 어째서 번번이 실패하는 거지? 왜 그 녀석은, 세상에 원한이 커야 할 녀석이 그편을 들고 있는 거고?’
알 수 없을 노릇이다. 사람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완전히 다른 속사정이 있다지만 이다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걸 칼주안에 걸어야 하는 건가. 결착을 내기 위해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인간들도 점점 태세를 갖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보단 분열책을 더 많이 썼겠지만.”
물론 이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고원의 강철과도 같다는 철위기사단을 전멸시킨 이후론 그 누구도 고블린 군단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저 상황을 반전한 것은 아주 몇 가지의 사소한, 동시에 결정적인 변화였다.
“그리고 그 핵심에 바가반드의 영주가 있다, 이거로군.”
“…….”
페넬로파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차가운 공기 중에 엄청난 양의 입김을 뿌리며 거대 오그르 족장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칼주안이다. 거기서 모든 방해물과 걸림돌들을 치워 버리겠다. 그 거슬리는 바난드의 성기사와 함께 조그만 영지의 건방진 녀석도. 넌?”
“……승리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추궁하듯 묻는 우레이미야의 말뜻은 명확했다. 옛 인연을 이런 순간에서까지 연연하겠느냐는 물음. 지극히 이 세계의 외부인 아닌 외부인, 고립된 페넬로파에게 굳이 그런 일을 묻는 건 황당한 일이었다.
“묻지 않아도 내가 직접 나서서 원호하지. 반드시 철의 관문에서 제거해야만 해. 그래야 모든 땅에서 거짓을 몰아낼 길을 열 수 있지.”
“난 그림자 속에서 우릴 이렇게 이끌어 준 그대들을 아직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해 주길 바라지.”
여전히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픽스를 채근하면서 머리 몇 개는 낮은 위치에 있는 페넬로파를 향해, 우레이미야는 남은 손을 가슴께에 대고 예를 표했다.
“우리가 배출한 최고의 제자……. 질서의 구현자인 그대가 반드시 낡은 거짓을 몰아내고 시대의 여명을 걷길.”
페넬로파는 연이어 계속된 강행군에 헐떡이는 목소리로 답례했다. 분위기는 엉망이지만 이제 곧 목표인 칼주안의 동문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처음 출발 당시 가져온 공성무기는 80%가 파괴되거나 버려졌다지만 여전히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군단은 많았다.
“더 서둘러 나아가라, 이놈들아! 우리가 승리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우오옷!
그 말뜻을 알아듣고는 있는지 전속력으로 뛰어가는 군단은 어쨌든 우렁찬 포효로 대답했다.
‘이대로 펜자르크와 합류하고 바난드를 뒤집는 것이다. 그럼 이제 남쪽에 고립된 신관 놈들과 제국군은 말라 죽는 일만 기다려야겠지. 아쇼트 왕자 같은 연합군 내부의 첩자들도 있으니…… 승리는 확고히 나의 것이다.’
이윽고 3만의 군단은 좁은 계곡평원을 가득 채웠다. 길목을 가로막은 칼주안의 성문을 마주하게 된 건 그보다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슈웅!
하늘을 수놓은 불꽃 신호와 함께 칼주안 공방전은 마침내 종반을 향해 흘러갔다.
* * *
나코르잔 시의 정부청사.
종일 민원인과 업무 인력, 지하 감옥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바로 그 곁에 마련된 사절단용 숙소도 깊은 밤이 될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죄 없이 수감된 우리 아이들을 석방하라!”
“무죄 석방!”
“밤이 되도록 잠도 안 자는군.”
대공자 바쿠란이 투덜거리며 창문을 닫고 두터운 암막 커튼까지 닫았다. 소리는 거의 차단되었지만 여전히 시끄러웠다.
“에이, 참.”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바쿠란은 소음 차단 마법을 사용했다. 보통 인간 도시에선 마법이 마나를 꼬이게 해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에 기대어 있던 아빌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마법 써도 괜찮겠어? 사용금지법은 속지가 아니라 속인주의라 너한테 적용될 텐데.”
“꺼지라 그래, 망할 속인주의. 어차피 여기는 마법을 쓰지도 않는 동네인데.”
“하긴, 알고 고발할 만한 사람도 없겠다.”
“하하.”
―끽.
짧은 비명을 내며 문의 돌쩌귀가 돌아갔다. 여관 2층 출입구가 열리며 아래층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바흐람 경, 어딜 갔었어? 저녁 먹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여긴 아직 돌아다니려면 조심해야 해.”
“죄송합니다, 공자. 본국에서 급한 연락이 몇 건 와서 급하게 조처하느라…….”
“아, 그럼 밖을 돌아다닌 건 아니었구나.”
“뒷마당에 있었습니다.”
아빌리스와 바쿠란은 나란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코르잔은 참 독특한 동네였다. 이제 인간들과 돈독한 사이를 맺긴 했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민간 교류는 거의 없었다.
[조만간 교류의 폭을 확대해야겠지만, 갑자기 교류가 개방되면 양쪽 모두 적잖이 당황할 뿐더러 잘못된 정보로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다.]
나코르잔의 공식 발표문처럼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오크’라는 종족과 그들과의 동맹 이야기는 아직도 널리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나라를 가리키는 이름조차 오르케시움, 오르체시움, 오케시움, 오체시 등 사람마다 제각각일 정도였다.
“그래, 본국에서 급한 타전이라면 우레이미야 군단이 쳐들어온 얘기겠지. 어느 정도야?”
“놈들이 이번엔 무작정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목표라고 오크 관리들도 말하긴 하던데.”
“지금 이라크시스 강 북쪽의 거주지들은 몽땅 파괴되고 대부분 남쪽으로 피난했답니다.”
“……그 정도야?”
“지랄 났군.”
공주 신분이라지만 훨씬 오래 용병으로 위장해서 자유롭게 다닌 아빌리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시의적절한 표현이니 누구 하나 태클 걸 생각도 없었다.
“지금 고블린 군단의 주력은 족장이 이끌어 바난드 경내로 진군해 펜자르크와 합류하려고 한답니다.”
“정말 멀리까지 갔네. 온 사방에 병력을 흩어 보냈다던 그저께 이야기는 그럼 고블린 별동대를 또 뿌려서 주의를 돌리려는 거겠군.”
“그렇다고 보입니다.”
사방에 거미줄처럼 퍼져 나간 옛 나샤와 군인들 위주의 「나샤와 동지회」로 위장한 정보대의 보고는 그런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에 얘기했던 대로 고블린을 꾀어내는 데는 성공했어. 그렇다는 건 지금 근 7, 8만이나 되는 군단 대부분의 전력이 이탈한 상태란 거지.”
“본거지를 뒤엎을 절호의 기회야.”
군단의 본거지인 고블린 성채. 인간들에겐 알려지지 않았어도 나코르잔인들은 알고 있었다. 꽤 먼 곳에 있는 산성 호수, 우레이미야 호를 내려다보는 험한 산자락 위, 검은 돌로 정갈하게 단장된 요새 도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바쿠란은 벌떡 일어섰다.
“지금 바로 입법의원단을 만나야겠어. 바흐람 경, 사람을 보내서 긴급 회담을 주선해 줘.”
“지금 바로 말씀이시지요.”
“그래. 저쪽에서 세계의 운명을 걸고 한판 승부를 가리려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이기든 지든, 우리도 어떻게든 놈들 등에 칼을 꽂아봐야지 않겠어?”
그 어느 곳보다도 고블린 군단의 본토와 가까운 이곳 나코르잔에서도 전쟁의 흐름은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쿵!
서쪽 벽에서의 전투가 새벽을 기점으로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동벽에서 새로운 적군이 출현한 것에 맞췄으리라는 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그림자 던전이 동벽에서 터져 나온다, 신관님들 부탁합니다!”
“예비대의 사제, 치료사, 마법사 외 누구든 남는 손은 모두 따르라!”
중앙광장에서 이제나저제나 불안하게 기다리던 일련의 무리가 급히 동쪽으로 달려갔다. 이들에게 따뜻한 물과 빵을 나눠 주던 주민들은 몹시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 뒤를 바라보았다.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왕국군은 대체 언제 지원을 오는 거람. 이미 여기가 전장이 될 거라곤 석 달도 넘게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는데.”
“온전한 승리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잖아.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봅시다.”
“아주머니는 참 인내심도 많으시군.”
“그러는 자네는 남정네가 진중하지도 못하나.”
하릴없이 맥빠진 소리가 오가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각각 동쪽과 서쪽의 굉음, 비명 한 번이 들릴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보수부대!”
―우르르!
헛된 외침이었다. 주민 3천 명짜리 마을에 석공이나 일꾼이 많아 봐야 얼마나 나오겠나. 결국 민병대를 전환해서 보수를 시켰지만 태반이 농부인 상황에서 속도나 전문성은 엉망이었다.
“성벽이 무너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놈들이 노포를 아주 집요하게 쏘아대고 있어요, 큭!”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탄환이 헛되이 여러 목숨을 앗아갔다. 튀기는 파편도 못내 날카로워 다치지 않은 병사들도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검은 그림자다!”
“신관, 신관!”
“늦었습니다, 엎드리고 구멍을 막아요!”
그림자 마나의 감염을 최대한 막고 느리게 할면 그나마 사방에 열린 신체의 구멍을 막는 게 최선이었다. 병사와 군관들이 재빨리 엎드려 엄폐했다. 치료사들은 치료를 위해 성벽 아래 대기했다.
“돌격-! 두 시간 안에 성문을 깨트리지 못하면 너희들이 모두 죽을 것이다!”
성 안으로까지 시원하게 잘 들리는 오그르 대장의 엄명이었다. 광분한 오그르 전위부대는 거대한 강철 몽둥이를 휘두르며 땅을 울리는 걸음걸이로 성벽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그림자 던전의 영향을 피해 방어군이 엎드린 지점이었다.
“이런, 측면과 성루에서 엄호하라! 발사!”
“내키는 대로 쏴라!”
발사 신호에 전방의 적을 조준했던 쇠뇌수와 궁수들이 일제히 취약 지점으로 향하는 오그르들을 집중적으로 사격했다.
“크으윽!”
“불, 불이다!”
“또 이런 비겁한 수를!”
“밀어붙여, 이런 장난질에 너희가 쓰러지지는 않는다!”
우레이미야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던 오그르를 직접 베면서 오그르들의 진격을 촉구했다.
―우오오!
마침내 용기를 되찾은 오그르 전위부대가 몸을 던져가며 피로도 높은 성벽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사람 정도는 가뿐하게 찢을 힘에 나무만 한 강철 몽둥이를 휘두른 힘이었다.
―덜컹!
성벽이 충격파에 흔들거리고 급기야 벽돌이 하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기름을 붓고 횃불을 던져!”
―쏴!
뜨겁게 가열한 기름이 쏟아지고 횃불이 연이어 허공에서 떨어졌다. 불길이 치솟고 오그르들은 딱 봐도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러나 물러설 길이 없는 이들이 더더욱 광분하여 성벽을 후려쳤다. 우레이미야는 픽스에 올라탄 채로 군단의 기를 흔들었다.
“집중해라! 노포와 투석기 모두 저곳을 집중 사격해라! 반드시 무너뜨려!”
“쏴라, 이것들아!”
오그르 대장의 채찍질에 역시 악이 받힌 고블린들도 악착같이 조준하여 탄환을 발사했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허공을 가르고, 마침내 목표에 제각기 착탄했다.
―쾅, 쾅!
페넬로파와 역시 추려낸 정예 그림자 마법사들 역시 맹공을 퍼부었다. 신관들이 이번엔 방어벽을 가동했지만 간신히 막는 것만 해낼 뿐, 공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도시의 결계는 완전히 사라진 건가?”
“그래. 마정석이 극히 부족해서 결계석까지 끌어다 전장에 내놓은 걸 테지. 성벽 무너뜨리고 진입하면 더 버티지 못할 거야.”
기다렸다는 듯 우레이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었다. 성채를 출발하여 망각의 늪 호수에서부터 꿈에 그려왔던 그 광경.
“내가 직접 무너진 벽으로 뚫고 들어가겠다.”
“후방에서 설마 누가 나타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최대한 막을 테니까.”
“역시 그림자 마법사의 적통답군. 인정하지.”
이제 커다란 창을 뽑아 어깨에 걸친 군단장은 그 한마디를 툭 던진 채 오그르들이 모여든 성벽 한구석을 향해 내달렸다.
“나를 따라서 돌파하라! 운명의 경계선을 넘는 자는 곧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해자를 간단히 뛰어넘은 우레이미야의 외침. 그리고 그 순간, 여덟 문의 노포가 날린 탄환이 기우뚱한 성벽의 중하단부를 타격했다. 요란한 먼지구름이 일어나며, 산사태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의 먼지보다 요란한 진한 흙먼지가 일었다.
“성벽이 무너진다. 안쪽 토벽이 무너졌어!”
“보수가 불가능합니다. 벽체가 무너졌어요.”
“목책 가져와, 얼른!”
“목책을 세울 나무도 없습니다!”
사방에서 온통 아우성이었다. 누군가는 하나씩 마정석이 없다, 목책이 없다, 심지어 화살이 없다, 이런 소리를 외쳤다.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무력하게 먼지에 가려진 성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너지지만 않았기를.’
그러나 근거 없는 소망이란 종종 배신을 당하기 마련. 그건 일종의 법칙과도 같이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먼지를 뚫고, 침을 흘리는 짐승과 그 위의 거대한 녹색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 야속한 법칙이 다시 한번 발동했다는 뜻이었다.
“으아아…….”
“미친.”
마치 지옥의 살풍경이라도 본 것처럼 병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창을 든 채로 위태롭게 착지한 우레이미야가 장창을 이내 들썩이며 휘두르고, 그 뒤 공간으로 오그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쏴!”
고정된 쇠뇌수는 어쩔 수 없어도 궁수들은 성벽 위에서 부랴부랴 활을 쏘았다. 그런대로 적중은 하지만 이 정도로 오그르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건 이미 많은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끝났다, 도망쳐!”
“으아아!”
멍하니 의지를 잃고 창을 떨어뜨리고 곧 목숨을 잃거나, 몇 발짝 도망하다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도 도주하고, 성루의 외로운 병력만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갈 뿐이었다.
―스윽.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혼란한 소음. 그 소음과 음산한 계곡 물안개를 가른 것은 밝은 태양의 두터운 기운이었다. 날카롭게 혼탁함을 베어낸 그 빛에 혼백이 나간 듯하던 동벽의 병사들 모두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헉.”
“뭐, 뭐지? 방금?”
“검기야!”
그 검기는 칼주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것이었다. 기사, 그것도 태양기사단이란 별칭을 갖는 왕국기사대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기사가 이렇게 사람과 적군마저 놀랄 정도로 두텁고 강한 검기를 휘두르던가? 그런 정도라면 오직 한 사람뿐이다.
“오오, 저건!”
“파브라드 단장…….”
마지막 순간에 말에서 뛰어내리며, 파드는 벼락같은 오러의 기운을 휘둘렀다. 곧게 뻗은 검의 몇 배나 되는 기운이 허공을 가르며 스산한 기운을 물리쳤다. 우레이미야는 슬쩍 오러를 흘려보내며 그 자리에 멈췄다.
“기사단 놈들이 어딜 꽁꽁 숨었나 싶었더니. 여기에 있었군. 쥐새끼 같은 것들.”
“…….”
살의를 불태우는 우레이미야의 발언. 파드는 일언반구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내 그 이유를 그 장소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두두두두!
말발굽 수백 개가 일제히 땅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칼주안의 그 어려운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파브라드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비장의 수, 태양 기사단 300기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적 군단을 분쇄해라! 쓸어버려!”
“이게 얼마 만이냐, 죽어라!”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찬란한 오러를 담은 투창 이백여 개를 날렸다. 강한 추진력을 담고 날아간 투창들이 연이어 고블린과 오그르, 픽스의 몸을 꿰뚫었다. 혼란이 이번엔 성으로 몰려들던 고블린 군단 사이에 전해졌다.
“모두 문밖으로 돌격해 가라! 적의 후미까지 일거에 분쇄한다!”
파브라드의 자살과도 같은 명령. 삼백의 기사로 삼만의 병력을 향해 들이받으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기사들은 기꺼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이 필요한 순간임을 익히 아는 탓이리라.
“간다, 이 괴수들아! 너희가 원하는 세상의 종말은 바로 이 창끝에서 만나라!”
어느 기사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창을 맞추어 성문을 향해 쇄도했다. 막 성문을 부수고 밀려들어 오는 오그르와 고블린 군단을 향해, 그 심판의 창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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