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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192화 (192/200)

192화 칼주안 전투 (2)

―쾅!

―와르르!

한동안의 공방이 이어진 뒤에도 포탄은 계속해서 성벽으로 날아들었다. 몇 번이고 공세를 버텨 낸 돌벽도 연이은 공격에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보수 부대!”

“우측 성벽과 7번 탑이 무너졌다, 출동!”

미리 편성해 놓은 대장장이와 석공 출신들의 보수부대가 황급하게 자재와 연장을 실은 수레와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다. 무너진 성벽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순 없지만 얼추 싸울 만할 정도로는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좀처럼 그만둘 생각을 안 하는군. 벌써 밤이 깊었는데 잘 생각도 없고.”

“몰아치고 싶겠죠. 고블린이 먼저 들어오면 이곳을 빼앗은 공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왕국 전체를 고블린들에게 뺏길 참이니.”

“대체 뭘 믿고 고블린이랑 그런 계약을 덜컥 맺어 버린 건지, 쯧.”

혀를 차는 파브라드에게 그것도 모르느냐며 놀란 듯 너스레를 떠는 기사.

“모르셨습니까? 권력욕이란 건 제가 보기에 어지간한 오러보다도, 마법보다도 훨씬 강렬한 모양입니다.”

“아주 정치 논평가가 나셨군, 그래. 죽을 자리라고 이제 말은 거르지도 않고 하기로 했나?”

비꼬는 파드의 말에 기사도 질세라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엄한짓에 정말 필요한 때를 위해 만든 기사단이 헛되이 소모되고 있으니 드린 말씀입니다. 왜, 저들 중에도 왕국기사단 소속이었던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입맛이 또 쓰다. 한때 태양기사단의 일원이었고 고블린을 상대로 모든 지원을 받아 전력투구하던 동료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영락없이 서로 칼날을 대야 할 판.

“아악!”

“어서, 들것을 가져와!”

“서쪽 야전병원으로 데려가야 해, 동쪽은 모두 찼어!”

그 와중에 붕괴 지점을 수습하고 다친 병사를 옮기는 소란이 지나갔다. 이따금 불덩이를 안은 포탄이 밖에서부터 날아와 엄한 주택가 골목에 불을 지르고, 분노에 찬 포병들의 대항 포격이 잇따랐다. 오늘은 잠을 자긴 영 글러 버린 모양이었다. 파드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물러가라고 했다.

“동쪽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그쪽엔 비번인 기사 두어 명을 보내서 민병대의 경계를 돕도록.”

“고블린이야 마음만 먹으면 곧 바쿠란도 제치고 이곳으로 달려올 텐데, 그때면 지탱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벌써부터 그림자 새끼들 때문에 신관이고 마법사고 나가떨어지는 판 아닙니까?”

그 말대로였다. 이미 파견 신관들의 비밀보고론 칼주안 내부에 비축한 마정석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불과 하루, 첫 공방전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병력 피해를 줄이는 건 좋지만 그 원동력인 아티팩트가 너무 빨리 줄었다.

“아낄 땐 아껴야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나마 다행인 건 구원군이 온다는 거다.”

“그 구원군이라고 해도 엘레나 전하와 바가반드 병력을 합쳐 5천이 될까 말까 할 겁니다.”

“허허……. 너도 참 성격이 문제다, 문제.”

“누구 영향을 받았겠습니까? 단장님이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셨죠.”

“건방지긴…….”

파드의 말을 피하기라도 하듯, 투구의 눈가리개를 덮어 버린 기사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덕분에 이제부터 동문 쪽에 대해선 잠시 생각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턴 말 그대로 시간 싸움이군.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 누가 최대한 버티느냐. 우리가 좀 더 유리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성벽 너머로 집채만 한 돌덩어리가 날아오고, 비명이 골목마다 메아리쳤지만 파브라드는 눈을 감으며 버티기 모드로 진입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더.’

그렇게 전장에 있는 누구에게나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퍽!

“크아아아!”

“죽을 때도 잠자코 죽는 법이 없군, 죽어!”

구시렁거리는 기사의 창이 말발굽에 걷어차여 쓰러진 고블린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너머로는 기사 여러 명이 빛나는 황금빛의 오러를 두른 채로 각기 검과 창을 휘둘렀다. 급격한 말머리 돌리기가 이어져 말들도 비명을 질렀다.

―히히힝!

보통의 창검으론 흠집조차 나지 않는 오그르는 사방에서 치고 빠지는 기사들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그어어억! 이 비겁한 놈들!”

훨씬 교활하고 잔인성이 높아진 종족이기에 위압을 주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언어를 배우게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의 포효는 그저 우위를 잡은 노련한 기사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어디 더 웃어 봐라, 꼬마야!”

“영락없이 심술쟁이군. 이런 놈들한테 사람들이 집단으로 놀아나다니.”

―푹!

재차 두어 개의 창날이 붉게 물든 오그르 대장을 농락하듯 찔러 들어갔다. 이를 악문 오그르 대장은 두 손으로 창날을 틀어잡고 잡아당기려 했다.

“어딜!”

그러나 보통의 병사나 수습 기사도 아닌 오러를 전문으로 하는 왕국 기사였다. 오러가 들어간 창은 오그르의 팔마저 꺾어 버린 채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내부의 장기마저 완전히 망가져 버릴 그런 움직임이었다.

“크억……!”

“흐흐, 이제 좀 죽음의 공포가 느껴지나?”

“사냥만 하다 사냥감이 되어 보니 어떻냐?”

“그으으! 아무리 발광을 해도 너희들은 결코 계시의 빛을 이기지 못한다, 여명의 빛은……!”

―서걱.

최후의 승리 선언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툭, 묵직한 소리와 함께 오그르 대장의 목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미 사방의 바닥은 더 칠할 수도 없을 정도로 피로 낭자해 미끌미끌했다.

“전하! 아직 더 분풀이를 해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죽이십니까.”

“맞습니다. 이놈들은 이미 마을 여러 개와 주민 수천 명을 쳐죽인 놈들입니다. 이대로 쉽게 죽여선…….”

“자중해라. 언제부터 너희가 전사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었나? 너희가 할 일은 이미 이른 대로 최대한 빨리 바가란까지 가는 것이다.”

엘레나는 휘두른 티도 나지 않고 선혈도 묻지 않은 검을 휘두르며 검집에 넣었다. 창백한 빛이 일렁이더니 곧 가라앉았다. 한창 열광에 차 있던 기사들도 금세 이성을 찾았다.

“자, 자! 남쪽 도로로 넘어온 고블린을 처치했으니 당분간 이쪽은 괜찮을 것이다. 나머지 잔당은 근처 보루 감시대에게 넘겨주고 우린 계속 이동하자!”

네마냐의 지시를 받은 대로 헤누크가 임시로 통솔대장을 맡아 출발 명령을 내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기사들은 곧 평상시로 돌아가 행군 대열에 끼어들었다.

“휴, 자꾸만 충돌하게 되네.”

“괜찮아. 고블린들만 마주치면 다들 날 서고 마음이 비참해지는 건 마찬가지니까.”

엘레나의 토로에 네마냐는 어깨의 갑옷 부분을 토닥였다. 쇠사슬 장갑을 쓴 채로 토닥였으니 금속이 부딪치는 절그럭 소리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이해하는 게 맞겠지만, 저렇게 분노에 차는 건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맞지, 맞아. 오염된 그림자에 쉽게 휩싸일 수 있는 조건이 감정적인 분노 상태니까. 더군다나 정교한 오러를 사용해야 하는 기사니.”

물론 기사들이 어째서 고블린을 상대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잔혹해지는지 이유를 모르는 두 사람은 아니다. 이들도 대부분 농촌 출신이고 가족들이 현재 이리저리 전쟁에 휩싸이고 있었다. 고향에서 피난 자금에 한 푼이라도 보태 달라고 오는 간절한 편지에 눈물을 적시지 않는 기사가 없을 정도였으니.

“이건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완벽한 승리로 일거에 끝내는 수밖에.”

네마냐는 고삐를 따라 몰면서 다시 한번 완벽한 승리를 이야기했다. 아무리 다른 이야기로 돌고 돌아도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전에 승리를 끌어내야 해…….’

상태창의 여러 효과도 마지막 전투에서 펼치기 위해 최대한 아껴 둔 상태였다. 이번에 적 주력을 확실히 궤멸시키면 이제 막 달성한 징병 퀘스트의 시너지까지 입어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끝낼 수 있을 터였다.

“보고드립니다!”

“바가란에서 오는 전령이야.”

엘레나의 속삭임. 꽤나 격렬한 전장이었는지 이것저것 풀떼기 위장에도 불구하고 피가 낭자한 전령이었다.

“보고 받겠다. 바누라트 섭정과 접촉했나?”

엘레나가 손을 내밀어 인장 반지를 보이고, 전령은 거친 호흡으로 손에 움켜쥔 수정석을 가까이 가져갔다. 아주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있고나서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어떤 문제도 없던 전령이 맞았다.

“바누라트 섭정과 접촉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접촉하기로 되어 있던 콜루아는 이미 고블린들에 의해 초토화된 상태입니다.”

“콜루아가? 지금 그쪽은 어떻게 된 거지?”

네마냐가 어느새 끼어들어 전령을 다그쳤다. 벌써 우레이미야가 그곳까지 다다라 성을 넘었단 말인가? 엘레나와 심상찮은 시선을 나눴다.

“그렇습니다, 각하. 우레이미야가 이끄는 본대가 지난 낮에 벼락같이 모습을 드러내고 콜루아는 예상 외의 공세에 무너졌습니다. 섭정께선 지금 바가란에서 잔병을 모아 저항 중이십니다.”

“바가란……. 상황이 그 정도라면 숙부께서 직접 나서셔도 어렵겠는데.”

“예. 이미 그 지역 전체가 포위당한 상태고, 소수의 아군이 민병대와 함께 근처 운하와 강둑에 참호를 파고 겨우 저지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칼주안으로 가려고 한다는 거야, 틀림없어.”

확신에 찬 네마냐의 음성에 엘레나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거의 3만이나 되는 대병력으로 기껏 간다는 게 그 좁은 협곡이라고? 보급조차도 하기 힘들 텐데. 그보단 역시 바가반드에 보낸 병력처럼 왕성을 위협해서 우릴 혼란시키려는 게…….”

“그건 다 눈속임이 틀림없지. 적 주력은 단 한 번도 나누거나 흩어진 적이 없어.”

바가반드에 잔류한 미하일로부터 오그르 부대의 침공을 알리는 서신이 왔을 땐, 네마냐 자신도 약간 혼란을 느꼈다. 우레이미야가 정말 펜자르크와 힘을 합쳐 바난드부터 섬멸하는 게 아니라, 사방팔방을 일거에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었나?

꽉.

주먹을 굳세게 쥐었다.

‘그럴 리가 없다. 소수로 나뉘면 우리나 저쪽이나 불리하긴 마찬가지야. 더군다나 숫자로 우위를 점하는 놈들 특성상…….’

현재 군단의 핵심 전력인 오그르는 불과 수천 정도. 고블린 따위야 수천 정도는 쉽게 떼어 양쪽에서 공세를 돌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미하일이 보낸 급전에서도 ‘고블린 부대’만이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수신인: 미하일 바드란 경]

[발신인: 네마냐 나자리안, 바가반드 백작]

[경의 의견은 확인하였다. 현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 주력의 섬멸이다. 정황을 검토하건대, 바가반드 영지에 침입한 적은 우리의 눈길을 돌리려는 고블린 별동대로 보인다. 그 정도라면 현재 영지 체재 중인 우리 병력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조치를 바라며 달려온 전령에게 내어준 것은 편지 한 통이었다. 그나마 영지에 잔류한 전 병력과 민병대 동원권을 위임하여 새로 건축한 타티온 관문을 틀어막으란 지시가 네마냐가 내어 준 지시의 전부였다.

‘지금 병력을 조금이라도 빼돌릴 순 없어.’

네마냐는 한층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비단 바가반드만이 이런 상황은 아닐 것이다. 타위비크는 물론이고, 경보병 전력을 파병하려던 미크라야크에서도 내침한 만 단위의 고블린과 싸우고 있었다.

“다른 영지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 앞의 적을 무찔러야 해. 그러려면 더 빨리 바가란으로 가서 섭정과 합류해야 하고.”

“……괜찮겠어?”

“그 정도도 각오할 수 없다면 진작에 이 전쟁 따위를 하려고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다른 사람에겐 결의를 다지는 정도로 평가되겠지만, 네마냐 자신에겐 뜻깊은 소리였다. 자신이 30년의 고생 끝에 죽임을 당했는데도 망각 속에 가라앉지 않고 기어코 다시 돌아온 이유? 그게 뭐겠나.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터전. 소중한 기억과 소중한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

오직 그 약동하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제야 간신히 그 목표가 손에 잡힐까, 말까 아니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위험? 기꺼이 감수하고도 남을 그 감각이야말로 이제는 네마냐의 몸에 완전히 정착한 서준의 결론이었다. 물론 그런 세세한 사정까지 엘레나나 주위 인물들이 알 리는 없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뜻을 소중하게 받도록 하지. 모두를 구하려면 오직 이 길뿐이란 것을.”

“어서 바가란까지 더 달려가시죠.”

“이제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어서 목적을 이루러 가시죠.”

행군하고 있던 기사들도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다. 두 사람은 마저 힘을 내어 속도를 높였다.

“이틀 길을 하루처럼 달려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바가란에 닿는다!”

―우우!

화답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보병대까지 급한 대로 나귀를 공급한 덕분에 속도를 높일 수 있어 내린 결정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들녘을 그렇게 1만 2천 명의 바난드 왕국군은 쉴새 없이 내달렸다.

* * *

―사아아!

모래성의 모래가 쏟아지는 소리. 성벽을 이루고 있던 각종 구조물이 덧없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밤중까지 전투가 이어져 신관들의 경계가 무뎌지자, 그림자들이 벌인 기습적인 공세였다.

“성벽이 돌파당한다! 참호 병력들은 반격하라!”

바누라트가 종일 먹지도 쉬지도 못했지만 반쯤 쉰 목소리로 재차 호령했다. 성루 위의 병사들이 일제히 빛의 마정석을 담은 화살을 쏘았다. ‘예광탄’이라고 바가반드에서 공급한 아주 특수한 화살로, 바난드 사람들은 신성한 빛이라며 소중히 여겼다.

“보인다, 놈들이!”

“전군 돌격!”

“으라아아앗!”

이제 바가란을 둘러싼 미로 같은 참호는 몇 군데 남지 않았다. 도시와 인근 촌락의 장정과 소년, 여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7천 명의 민병대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챙!

“죽어랏, 이 괴물 같은 놈, 제발!”

“크르릇!”

“아이쿠!”

민병대 대여섯 명이 조를 짜서 쇠스랑이나 가래로 오그르나 고블린을 막으면 정예병과 소수의 기사가 처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예비병력도 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정예병들마저 지쳐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각하, 각하!”

“무슨 일이냐?”

전령이 급하게 자신을 찾는 소리에 덜컹 속이 가라앉으면서도 바누라트는 검댕 묻은 얼굴로 미약한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구원군이……. 물론 그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놈들이 북문 성벽을 폭파했습니다! 그쪽 병력 다수가 그림자에 오염되어 무너집니다!”

“신관은? 그쪽에 치료사들도 있지 않았나?”

“마정석도 없고 모두들 탈진 상태입니다. 북문 수비장이 기습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며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다급한 요청이었다. 북문은 전투에서 가장 안전하게 동떨어진 지역이었지만 바누라트는 가장 믿음직한 심복을 보냈다. 자신이 전혀 북문을 도와줄 여력이 없으니 최대한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낸 것이다. 섭정은 고개를 저었다.

“여길 보아라, 여기 어디에 예비병이 있나? 누가 누굴 돕겠나.”

“하지만 지금 북문으로 놈들이 쏟아져 들어오면 바가란은 함락입니다!”

“그래, 끝인 게지. 너도, 나도, 이 도시도.”

그리고 이 나라도. 차마 그 마지막 말만큼은 심중에 삼켰다.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는 아무리 분명한 운명이라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포탄이 날아옵니다, 조심!”

“으악!”

작열하는 불길을 안은 포탄이 성루에 명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마비되어 버린 귀에선 끊임없이 이명이 들렸다. 눈앞은 환하게 타오르는 불로 온통 뜨거운 세상이었다. 지옥에 벌써 도착한 것일까. 넝마가 된 지휘봉을 부여잡고 바누라트는 다시 일어섰다.

“부관, 부관! 살아 있는 군관은 없느냐!”

“…….”

불타오르는 성루는 반쯤 무너지고 사방은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은 도망치지는 않았다. 바로 이곳이 자신들이 지켜야 할 고향이고 가족이 등 뒤에서 지금도 떨고 있었다. 그저 겁에 질린 채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자신의 무기를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전군, 흔들리지 말고 대오를 갖춰라! 해가 뜰 때까지만 버티면 우리 군대가 온다!”

“으아악!”

허망한 외침이었다. 그나마도 쏟아지는 그림자 공격에 오염된 병사들의 비명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충격과 함께 섭정도 그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충격이 전해졌다. 늙은 몸이 받아들이긴 너무 힘든 압박이었다.

“이건 오염……. 끝이로군. 결국 여기서 끝인가? 하하하…….”

피가 입가로 흘러내리고 곧 사방의 시야가 온통 빛이 바랜 누런색으로 덧칠되기 시작했다.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옆에 세워둔 깃발에 의지했다. 그리곤 여지없이 부러지는 왕실의 깃발.

“절대…… 군기는 떨어뜨리지 않는다.”

마지막 힘을 모아 바누라트는 떨어지던 초라한 키메라 깃발을 붙들었다. 덜덜 떠는 몸으로 키메라 문양의 깃발을 몸에 둘렀다. 마치 키메라의 힘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기적적으로 발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그 눈 앞에 펼쳐진 광경.

―펑!

“끄악!”

“후퇴하라, 참호 병사들 모두 성안으로!”

“멍청이들. 헛수고인 줄도 모르나, 킬킬! 너희 성은 이미 무너졌다고.”

날렵한 오그르들은 대오가 무너져 버린 민병대들은 아예 밟아 뭉개며 기사와 병사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매 순간 한 명이 소중한 전력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다. 명령 통제도 무너졌고, 이제 누구 하나 초주검이 된 섭정을 신경 쓰는 이도 없었다. 아니, 엉뚱하게도 하나는 있었다.

* * *

“저기 성루 위에서 깃발 휘감고 있는 놈. 저놈은 누구냐?”

아직도 부상이 낫지 않았는지 몸을 꽁꽁 싸맨 우레이미야가 재밌다는 듯 불타는 성루 위에 버티고 선 노인을 가리켰다. 페넬로파가 부채를 걷어 눈을 찡그리더니 확인해 주었다.

“바난드 국왕의 동생. 바난드 중앙길드의 수장이자 현재 섭정인 바누라트. 왜, 관심이 좀 생겼나?”

“그럼. 저런 늙은 인간이 저 정도로 버티고 있는데 내 관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있나.”

“하지만 멍하니 살려 둬 봐야 전투만 길어질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빨리 끝내고 가야지.”

“물론. 뒤에서 귀찮은 거머리들 따라붙었다는 걸 모를 리가.”

재미는 거기까지였다. 전령을 부른 우레이미야는 곧바로 저 성루 위의 노인이 사령관이니 죽이고 얼른 도시를 점령하라고 전했다.

“알았다, 군장!”

고블린이 씩씩하게 대답하곤 달려갔다. 이내 예비병으로 두었던 오그르 돌격병 한 부대가 쿵쿵 소리를 내며 성문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꺄, 오그르 떼다!”

“성문이, 성문이 위험해!”

“허허…….”

자신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오그르 부대를 보며 바누라트는 자신을 기다리는 숙명을 알 것 같았다. 이미 피할 수도 살 수도 없는 몸. 적어도 적 족장이 원하는 기쁨을 줄 순 없다. 어둠이 깊이 내린 계곡은 도시의 매서운 불길을 그저 품고 있었다. 그 고요함에 더는 돌이킬 수 없단 걸 느꼈다.

“여기까지……군. 부디 내 죽음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하하.”

반쯤 이가 나간 칼을 들고 마비된 다리를 끌며 노인은 성루의 난간까지 다가갔다. 오그르들이 거의 문을 부수기 직전이라 시간이 없었다.

“내 목은 가져가도 혼은 어쩌지 못하리.”

서릿발 같은 눈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희미하지만 오러를 주입한 검. 자신의 목과 함께 에너지가 농축된 불의 마정석을 폭파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일렁이는 마나에 오그르들은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코웃음을 치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야압!”

바누라트는 칼을 절정의 높이에서 내리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려 했다. 동쪽에서부터 하늘을 가르는 서광과도 같은 빛줄기를 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쑤아아아아!

하늘을 찢어발기는 요란한 소리.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건네는 그 빛.

[에드라미 파오스]

“빛의 사신이다!”

“저기…… 태양 빛이 빛나는 검기야!”

“태양기사단이다!”

“우리 군대가 도착했어, 했다고!”

울부짖으며 서로에게 외치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곧이어 하늘을 닥치는 대로 수놓은 빛 화살들의 향연. 이쪽에서도 아직 정신이 있는 병사들이 쏘아 올린 빛의 궤적이었다. 곧이어 네마냐의 ‘사자후’가 실린 외침이 고요한 계곡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진동시켰다.

“돌격―!”

“이런…… 놈들이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우레이미야는 여유롭던 태도는 잃고 부랴부랴 고삐를 서둘러 휘어잡고 채찍을 휘둘렀다.

“후방의 고블린들, 너희들이 반드시 저지해라! 목숨을 걸고 놈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막아! 죽을 때까지! 이게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하아악!”

살 가능성은 아예 없는 명령. 그러나 고블린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악다구니 같은 조그만 고블린들 수천이 동쪽 계곡 입구를 향해 달렸다. 바가란으로 몰려들던 고블린, 오그르들도 썰물처럼 물러났다.

“꿱!”

“끄억!”

“다 뒈져 버려라, 이 새끼들! 으하하하!”

고블린들의 저항은 부질없었다. 작정하고 원한을 쌓아 달려온 기사대의 창과 검, 혹은 시야를 파악할 수 없어 대충 꺼내든 메이스와 손도끼 세례가 쏟아졌다.

―쨍강!

“우, 우왓, 내 검이……악!”

“어딜 고블린 따위가!”

밝은 검기가 서린 그 일격에 허술한 무장의 고블린 따위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하루 내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던 고블린 포대도 그대로 무너졌다. 뒤늦게 도망치던 놈들은 그대로 학살되었다.

“해냈구나, 엘레나. 그리고 바가반드 경.”

비몽사몽하는 정신에서도 바누라트는 용케 그 두 사람을 떠올리며 엉망진창인 얼굴 위로 눈물을 흘렸다. 생존. 이제 그건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후배들의 대반격 뿐일 터였다.

“이제, 공은 그대들에게 있군.”

우레이미야 군단의 주력이 급히 칼주안 관문으로 향한 것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파브라드가 버티고 있을 그곳에 짐을 떠넘기는 기분으로, 바누라트는 거친 숨과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 19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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