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대격돌 (3)
고블린-오그르 군단이 파상공세를 펼치며 바세안 평야로 밀려들어 가던 그때. 어쩐지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전장과는 머나먼 나코르잔(Nakorjan)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오체시움의 수도 나코르잔은 귀한 손님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방이 흔들리고 있지만 귀국만은 그래도 흔들림이 없는 듯하여 안심입니다.”
사절의 맨 앞에 선 인물은 회색빛의 눈동자에 꽤나 단단한 인상을 주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맞이하러 나온 험상궂은 오크족 대표에 못지않게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별말씀을. 첫 교전 이래로 인간 연합에서 충실히 잘 막아 주고 있어 우리도 안심하고 적극적으로 힘을 모았습니다.”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경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제 소개를 잊고 있었군요.”
높다란 깃털을 꽂은 삼각형의 모자. 그걸 벗은 회색 눈동자의 음침한 남자는 눈은 무표정한 채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흐람이라고 합니다. 바흐람 아르투니.”
“역시 바흐람 경이었군요. 영주께서 미리 보내신 통신에서 중량급 인물을 보내신다더니 정말로 정보대 수장을 보내실 줄이야.”
“중량급이라니 그냥 하신 말씀입니다. 정보대가 아무리 커 봐야 그저 도구일 뿐이죠.”
말을 마친 바흐람은 매고 있던 짐을 풀어 서류를 꺼내 들었다. 사절임을 확인시켜 줄 신임장이었다. 오크 관리는 두 손으로 정성스레 서류를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라드의 도움을 받아 네마냐 영주가 신성력을 펜에 입혀 서명한 부분이 중요했다.
“맞군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확인되었다는 듯 이내 오크 관리는 신임장을 말아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마나는 이미 그림자 마나의 길로 깊이 빠져든 고블린이나 검은 마법사에겐 치명적이었다.
“예. 얼른 오크족의 수뇌부 여러분과 이야길 나누고 싶습니다만.”
“그럼요. 나자리안 영주께서 연락을 보내신 뒤로 저희 입법의원단이 자나 깨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대하던 말씀입니다.”
“후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들어가시죠. 아예 식사 시간도 되었으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시면 좋을 겁니다.”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바흐람을 보면서 사절단의 수행원 겸 고문 역으로 따라온 바쿠란이 몸서리를 쳤다.
‘세상에, 저 목석같은 자식이 저렇게 얼굴을 환하게 보일 줄이야. 회색빛 눈동자가 저렇게 간사스럽게 보일 수가 있나?’
바쿠란은 사절단의 수행원 및 얼굴마담으로 따라오면서 바흐람과 나름 관계를 트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 무뚝뚝함 그 자체인 정보대장은 뭔 소리만 하면 기밀 엄수, 비밀사항이라며 말을 끊기 일쑤였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다니. 그러면서도 눈은 웃지 않는다는 게 더 소름이지만.’
나름 친화력이 있는 정상인이라 자부하는 바쿠란은 도대체 바가반드에서 나온 것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거나 너무 비범해서 탈이란 인상을 확실하게 느꼈다.
“이런, 타위비크의 공자께서도 오셨군요. 저번에도 이곳에 오셨지요.”
“두 번 만에 벌써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오체시의 총사령관은 건강하게 지냅니까?”
따뜻한 표정을 짓는 바쿠란의 친근한 질문에 오크 관리도 고개를 조아리며 과연 그렇다고 화답했다. 이내 바쿠란의 손에 입을 맞춘 관리는 곧 안쪽으로 향하라는 손짓을 했다.
“어서 드시죠. 오늘은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드시죠, 공자.”
“음.”
바흐람이 다시 그 무색무취한 표정으로 마저 권하니 바쿠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열려 있는 도시의 문으로 들어섰다. 전방에서 목숨 바쳐 싸우는 전사를 위해서나, 후방에서 불안에 잠긴 주민과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사절단은 반드시 예정한 목표를 달성해야만 할 터였다. 그런 비장함만은 다르지 않은 다양한 사절들은 오크족의 수도로 발을 들였다.
* * *
2월 17일. 켈리도니온 북방의 어느 언덕 위.
혹한의 바람은 약해지긴커녕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오늘은 눈발이 날리지 않아 햇살이라도 조금 비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지금쯤이면 나코르잔에 바흐람 등이 닿았겠지.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 할 텐데. 현장에서 부딪치는 것만으론 영영 끝내지 못할 수도 있어.’
보온석을 가지고 있음에도 몸을 으슬으슬 떨던 네마냐는 이내 자신의 곁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년보다 날이 훨씬 추운 것 같습니다, 엣취! 옷을 몇 겹을 껴입어도 춥네요.”
“그렇군. 그래도 견딜 만하긴 한데. 알리테스, 보온석은 못 받았어?”
의아한 듯한 영주의 물음이었다. 알리테스는 두 손을 모아 바람을 불곤 홍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주일에 세 개 정도를 나눠 줍니다. 하나당 다섯 시간 정도 가면 꺼지니, 막 쓸 수가 없더군요.”
“일주일에 세 개라……. 아직 수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모양이군.”
“어쩔 수 없어. 워낙 마정석이 수요가 높아야지. 전쟁에다 각종 아티팩트까지 상품으로 개발돼 버리니까 제일 급 낮은 제품들도 공급이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이야.”
역시 곁에서 조용히 따르던 아일라가 덧붙였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치였다. 바가반드 영지에 모든 하야스단 고원과 저지대, 외국의 마정석 수요를 감당하면서 생긴 일이기도 했다. 전쟁도 터지고 각종 아티팩트가 개발되면서 현재는 아무리 저급한 마정석이라도 구하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아일라 씨 말대로 어쩔 수 없는 문제긴 하죠. 그래도 군대에 납입하는 물량만큼은 채웠으면 하죠. 인구를 세 배나 늘어나고 광산도 대거 확장하고 있으니 해결될 겁니다.”
“그러겠지. 몇 달은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통신구로 오늘 저녁에라도 미하일과 연락해서 배분량을 조정하라고 얘기해 두죠.”
미하일로선 영지의 재정 수입을 악화시킬 수 있는 지점이라 구시렁구시렁 말이 많겠지만, 당연히 이건 네마냐의 지시대로 하는 것이 맞을 수밖엔 없었다.
“자, 일주일 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그때까진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영주님께서요? 하지만 영주님도 마찬가지로 보급량이 많지 않으실 텐데.”
“채워 주면 되지.”
씨익 웃어 보이니 아일라나 알리테스 모두 당황한 낯빛이었다. 네마냐는 대충 이제 자신의 특이한 체질을 이용하는 방법에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종류와 속성이 다른 마나가 유연하게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 암흑 에너지 덕분이었다.
[이면의 에너지]
[공허 혹은 암흑 에너지는 세계 질서의 본질이라는 마나가 형태를 갖추지 않은, 창조 이전의 빛입니다. 그 기운이 직접 노출된다면 밝은 회백색의 따뜻한 빛이 비칠 것입니다. 이 에너지의 특징은 마나와 그림자 마나를 비롯하여 모든 마나의 상위 호환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모든 마나의 사용이 가능하며 궁극적으론 상호 교환 역시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론 지금까지 역사적인 대마법사 알레시아만이 자유자재로 해당 에너지를 쓴 것으로 전합니다.]
‘별일이지. 내가 왜 이런 에너지를 갖게 되었냐는 것도 모를 일이고.’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의 언덕 아래론 울창한 수풀이, 그리고 그 너머로 다시 울창한 고블린의 녹색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어쨌건 장관이군. 고블린 군단이 저렇게나 정연하게 대량으로 늘어선 장면이라니.”
“저놈들이 고블린-오그르 군단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공성탑에 투석기에……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대열의 맨 앞, 벼랑에 면한 언덕 끝까지 다가섰던 아르미니우스가 고개를 흔들면서 돌아왔다. 엘레나는 병력의 배치를 막 마쳤는지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런 엘레나를 향해 네마냐가 물음을 던졌다.
“성기사단장님, 지금 적의 병력은?”
“다르빌을 포위한 놈들만 족히 3만은 된다고 봐야겠죠. 그중에서도 거의 1만 가까이는 오그르들이고.”
“그리고 영내로 진입한 놈들의 숫자도 거의 3만은 된다고 했지. 어딜 생각해도 어렵겠군.”
“부제독, 후방 총독부에 타전은 보내셨습니까? 총독부 병력이 얼마 없을 테니 신속한 움직임이 필요합니다만.”
“그건 과히 염려 마시오. 지금쯤은 총독이 청야 작전으로 이르카시스 강 남쪽으로 병력과 자원을 옮기고 있을 테니.”
인간 연합이 고블린에 맞서기 위해 준비한 작전은 철저한 방어전 위주였다. 이미 그림자 군단이 침공하면서 선수는 내줄 수밖에 없었으니 가능한 한 그 기세를 꺾는 게 먼저였다.
“이르카시스 강변의 얕은 구역마다 감시초소를 세워 놨으니 혹시나 모를 불상사는 없을 겁니다. 다만 문제라면 바가반드나 바난드 본토가 걱정되긴 하는데.”
“그렇군요. 병력 대부분이 출정한 상태니 정작 영지 본토의 방어가 어려울 테죠.”
아르미니우스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블린 진영을 흘낏 바라보았다. 엘레나와 네마냐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제눌트의 시선이 그사이 빠르게 오갔다. 아쇼트도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막대한 고블린의 숫자에 놀라 거기에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차였다.
“흠,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군도 별동대를 만들어 운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별동대?”
네마냐의 제안에 부제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다. 고블린-오그르의 군단은 이대로라면 곧 바난드 영내로까지 진입할 터, 그렇게 되면 지금 거의 2만에 달하는 바난드의 병력이 갈 곳을 잃게 됩니다.”
“그럼 병력을 빼내어 후방의 적을 틀어막자, 그 소리군. 바세안 평원 안에 놈들을 가둘 수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장점은 물론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다. 엘레나 휘하의 병력을 차출해 후방 바난드의 문제를 처리한다는 건, 곧 펜자르크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던 일이기도 했다. 후방에서 왕국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건 고블린 문제보다도 제가 보기엔 왕국의 내전에 개입하려는 음모 같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음모?”
부제독의 표정에 다시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바난드의 내전. 애써 이 갈등을 봉합하고 전쟁에 온 힘을 쓰자는 입장인 제국군은 작전이 툭하면 내전의 수단으로 쓰이는 게 아닌지 걱정하던 차였다.
“그렇습니다. 여기서야 대의가 있으니 서로 공존합니다만, 제 누이 엘레나 공주는 저에게 합당한 영유권이 있는 왕위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킨 상태입니다.”
“헛소리가 제대로구나, 아쇼트. 네가 자질이 안 되어 부왕께서 자리를 거두어가신 걸 왜 내 탓을 하는 거지?”
“거짓말 마! 겉으론 왕위에 미련을 두지 않고 혈통 계승을 돕겠다더니 차근차근 준비해서 동생의 것을 빼앗으려 들다니.”
두 사람은 으르렁대며 마침내 다시 맞붙었다. 제독은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네마냐와 제눌트는 각각 엘레나, 아쇼트를 말리는 척하며 상황을 가라앉혔다.
“휴……. 여러분, 이래저래 충돌이 많은 건 알겠소이다. 하지만 3만이나 되는 강한 적을 앞에 두고 이래서야 어찌 되겠소. 좋은 생각이 혹시 없겠소, 나자리안, 제눌트 경?”
‘좋았어. 기회가 왔다.’
네마냐는 군침을 삼켰다. 엘레나와 제눌트와 다시 한번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 그동안 허락했던 불편한 공존을 끝낼 시간이 도래했다. 본격적으로 누군가와 척을 지는 일이니 막상 쉽게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휴……. 갈라서야 한다면 지금이 기회지.’
네마냐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바로 이때만을 위해서 이리저리 준비해 온 것이기도 했다.
“제눌트 장군과 제가 아르미니우스 제독 대리께 연명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르미니우스는 뭔가 일이 커진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제눌트를 무겁게 쳐다보았다. 제눌트 역시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쇼트는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어리둥절하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제눌트! 이게 무슨…….”
“조용히 들어 보십시오.”
전에 없었던 차가운 목소리. 아쇼트는 마치 고블린을 맞닥뜨렸을 때처럼 말을 잇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아쇼트 왕자의 군대는 제독 대리께서도 아시다시피 펜자르크의 병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펜자르크는 얼마 전 파르티즈를 공략하면서 그림자 마나와 던전을 사용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그때까지 극비리로 유지되던 사실이 처음으로 공표된 순간이었다. 작전의 명목상 총지휘부인 제국군 수뇌부조차 파르티즈에서 그림자 마나가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주변을 둘러싼 펜자르크의 봉쇄가 완강한 탓이었다.
“거짓말입니다! 이들이 엘레나를 돕기 위해 파르티즈로부터 거짓 증언을 들은 겁니다. 더군다나 확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 확신할 만한 증거는 있소? 그게 없다면 나로선 이걸 다시금 새로운 ‘정쟁’이나 ‘내전’으로 이해할 수밖엔 없는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보신다면 생각이 많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네마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짐을 풀곤 뒤적거린 끝에 서찰 하나를 꺼냈다. 직접 가져온 종이에 성녀 트라야브나, 대신관 가기크의 필적을 받은 편지였다.
“고원의 마나 순수성을 감시하는 것이 성국의 애초 목적입니다. 그리고 파르티즈 교구로부터 의심의 여지 없이 펜자르크군 점령지에서 그림자 마나가 검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음을 확증하셨습니다.”
“대종정, 부종정 두 분이 모두 그런 결론을…….”
“거짓말입니다,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엔 성녀라고 할지라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형 마법을 무턱대고 그림자로 착각한 겁니다.”
“너는 지금 성녀와 대신관까지 마법과 마나조차 구분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거니?”
엘레나는 조롱이라도 하듯 톡 쏘아붙였다. 지케르니아의 거룩한 신관회가 중심이 된 나라는 고원 내외의 넓은 존경을 받는다. 그 권위를 무시하는 자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
“이익……. 중요한 건 지금 신관회의 공식 의견도 공정하지 못하단 겁니다. 제 누이는 지금 현역 성국 기사단장이고, 성녀와도 돈독한 사이 아닙니까! 이건 제삼자가 판단해 주지 않으면 불공정한 이야기입니다!”
“이상한 말이로군요.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그걸 입증하면 됩니다. 신관회는 성녀나 대신관 1인 정도가 움직일 수 없는 ‘전원합의체’란 것도 모르십니까, 왕자는?”
성국의 결의는 회귀 전의 경험을 더듬어보건대 그때도 숱한 의심을 받았다. 누가 특정 신관과 불륜관계란 음모론부터, 성녀가 어느 마탑이나 제국의 후원을 받는다든지 하는 문제까지. 심지어 성녀가 제국군 장군과 불미한 관계란 막 나가는 소리도 나왔었다.
‘그러나 신관회는 수십 명 회의체의 만장일치에 따라 의견을 결정하지. 사적 이익이 섞이지 않도록 무작위로 선출한 신관들로. 여기에 음모론을 섞는 것 자체가 무가치한 일이지.’
애초에 파르티즈에서 사용이 금지된 적마정석은 물론 그림자 마나, 던전의 존재까지 확인된 상태다. 언제든 이건 사태가 정리되는 대로 제국의 마법성에서 검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시급한 건, 군내의 불안요소를 없애는 겁니다. 펜자르크가 정말 여러 보고대로 불측한 일을 꾀하고 고블린과 노선이 일치한다면, 아쇼트가 여기에 군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 그런……. 제눌트, 당신도 여기에 모두 동의하는 건가? 연명이라고만 하지 말고 당신도 의견을 말해 보시오.”
아르미니우스의 재촉, 분노한 아쇼트의 눈빛. 제눌트는 한숨을 쉬더니 미리 꺼내 두었던 두루마리 문서를 펼쳤다.
“이건 이르카시스 백작, 펜자르크로부터 보름 전쯤, 아쇼트 왕자에게로 왔던 서찰입니다.”
“네놈, 감히 기밀문서를 어디에 유출시킨…….”
“맞지요? 아쇼트 왕자께서도 친히 인증하신 확실한 서찰입니다. 그리고 여기엔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고블린과 한 패거리인 자가 제국군 후방에서 마음껏 횡행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에 당당하게 병력까지 파견했다. 아르미니우스는 그 모든 일을 깨닫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고블린 군대와 머지않아 힘을 합쳐 칼주안의 관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파르티즈에 이미 여명의 빛이 퍼지기 시작했으니, 바난드에 머지않아 계시가 퍼질 것이다. 모쪼록 아쇼트 왕자는 엘레나와 제국군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가능한 정보를 캐내어 우리에게 전하도록 할 것. 그래야 고블린 군단의 움직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그건 누군가 가필한 게 틀림없습니다. 제가 읽은 원문이 아닙니다!”
아쇼트가 말까지 더듬어가며 조작을 외쳤다. 하지만 이런 모든 세세하고 확실한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믿는 것보단, 음모가 있었다는 걸 믿는 게 훨씬 신빙성 높은 행동이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은덕을 저버리고 뒤에서 비수를 꽂을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장군, 아니 제독! 제 말씀을…….”
“아쇼트, 너와 네 휘하의 모든 군 지휘권을 총사령 대리의 이름으로 박탈한다! 모든 일이 확실해질 때까지 너희는 연금하겠다!”
“저희가 신관회 소관 건물에 구류해 두겠습니다. 맡겨 주시죠.”
엘레나의 이야기에 부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이전보다 신뢰감이 올라간 표정이었다. 병사들이 우악스럽게 소리치는 아쇼트와 부관들이 말을 끌어 저편으로 사라졌다.
“음, 부탁하겠소. 이제야 모든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것 같군. 지금이라도 내 눈이 뜨여서 다행이야.”
“제눌트 장군에 관해서는 제가 달리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마냐의 말에 아르미니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담아듣겠다고 답했다.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인 네마냐는 제눌트를 아쇼트의 병력의 지휘를 주어 엘레나 아래로 두자고 제안했다.
“바난드의 하코브 국왕께서 군 지휘권을 둔 것은 어쨌든 엘레나 단장이었으므로, 형식상이라도 그렇게 복원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이제 곧 출발시킬 별동대 구성이나 펜자르크 백작 토벌에서도 혼선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네마냐의 발언은 바로 직전까지도 고블린과 검은 마법사까지만으로 한정되었던 전선을 일시에 고원 전체의 전쟁으로 끌어올렸다. 바난드 없이는 하야스단을 구할 수 없고, 하야스단 없이는 바난드 역시 무사할 수 없는 그런 구도로 말이다.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겠군.”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아르미니우스 부제독은 몇 분 만에 결론에 다다랐다. 네마냐는 제국 정계가 일으켰던 철병론마저 뒤엎을 강력한 명분을 제시했던 것이다.
“제국을 위협했던, 그림자 던전의 세력. 그 후손이 다시 제국을 위협하기 위해 돌아온 겁니다. 이 논리를 세운다면 제국군 철병과 작전 중지, 모두 돌이킬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그간 내내 수세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네마냐가 터뜨린 첫 번째 반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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