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대격돌 (1)
―와아!
함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 건 그람과 열두 명의 제자들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오러를 손에 집중시킨 때였다. 휘청이던 몸을 검에 지탱하던 의문의 기사가 돌연 아무 쓸모도 없을 빛을 쏘아낸 바로 직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하나가 급하게 신전의 입구로 향했다. 그람은 여전히 버티고 서 있는 기사를 향해 검녹색의 빛무리를 겨냥한 채 입을 뗐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여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갑자기 신호라니.”
“…….”
네마냐는 대답하지 않고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람은 코웃음 치며 차갑게 기사의 공적을 깎아내렸다.
“지금 구원군을 불러와 봐야 소용없다. 너만 제거하면 어차피 조무래기들 하나둘 더 와 봐야 소용없으니. 헛된 믿음의 근거인 결계는 사라지고 진실한 빛이 찾아오리라.”
“그래, 돌아가는 모양새만 보면 딱 당신 말이 맞지. 한 터럭 의심할 것도 없이.”
네마냐가 여전히 몸을 파고드는 그림자 마나를 조금 억누르고 꺼낸 대답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네마냐는 땅에 꽂은 검을 빼 들고 자신을 겨냥한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노린 게 바로 그거였단 걸 말씀드려야겠군.”
“노렸다고?”
의아한 이야기였다. 그람은 네마냐의 말을 되물으면서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중에는 자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설마 수비대가 연락하지 못한 건, 못한 게 아니었단 건가?”
“역시 알고 있었군. 그만큼 속이려니 힘들었지만 말이지. 제대로 보람을 주는군. 읏차.”
네마냐는 다시 반쯤 신성력이 비어 버린 검신으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애써 체내 유입된 검은 마나를 막으면서 동시에 막대한 마나를 써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순간적으로 심장과 각 장기가 부담으로 뒤틀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조금만 더……. 곧 끝난다.’
“큰일, 큰일입니다. 선생님!”
“이런…….”
아우성을 외치는 제자의 이야기만으로도 그람은 충분히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모를까. 자신들의 등 뒤, 신전 담벼락 너머로 들려오는 우렁찬 함성이 너무나도 귀를 울렸던 탓이었다.
“아군이다!”
“성기사단이 왔다!”
번쩍거리는 빛이 부서져 내린 청동문의 잔해 건너에 모습을 드러냈다. 켈리도니온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슨 빛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한낮도 아닌 이른 새벽에 저렇게 환한 빛은 자연광이 아닌 오직 넘치는 마나로부터 외형의 힘으로 변형된 오러였다.
“크악!”
“돌격―! 저항하는 자는 살려 두지 마라!”
떨리는 손으로 자폭용 그림자 던전을 소환하려던 마법사의 손이 잘려 나갔다. 예리한 세검에 의해 잘린 손은 잘렸는지도 모르는지, 한참 뒤에야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검은 옷의 마법사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엘레나의 군마가 곧 그 가슴팍을 걷어차듯 밟아 버렸다. 의심할 바 없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기사단, 공격!”
엘레나가 재차 외치는 명령에 두 명씩, 말을 탄 기사대가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창에 찔려 즉사하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마당이 너무 좁은 탓에 허둥대는 말발굽에 밟혀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푹!
―퍼억!
대리석으로 깔아 둔 신전 마당은 삽시간에 흐르는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말발굽이 피에 흠뻑 젖어 축축한 소리를 낼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피해야 합니다!”
“이미 코앞에 닥쳤는데 어딜 피하라고?”
허탈함에 그람은 피식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주변의 간부들과 제자들은 당황과 흥분의 감정이 뒤섞이더니 이내 분노로 얼굴이 물들어 갔다.
“이게, 이게…… 다 네 탓이다!”
“감히 우릴 이런 궁지로 몰아넣어?”
“너라도 같이 데려가겠다!”
“결계로 가는 길을 뚫어라!”
그람은 이미 소용이 없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몸부림을 말릴 기운조차 없었다. 그나마 분노로 움직이는 네다섯 명이 한꺼번에 우두커니 서 있는 네마냐에게 달려들었다.
“……한 발짝도.”
네마냐는 치켜든 검에서 다시금 빛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엘레나가 들고 있는 신성검 못지않게 찬란한 빛이 온통 검녹색 빛으로 가득한 던전의 어둠을 다시 밀어냈다.
―스윽!
가벼운 손놀림 한번. 마나를 외적인 신성 오러로 담뿍 뿜어내던 검에서 회백색의 궤적과 함께 사방으로 빛이 튀어 나갔다. 유일하게 그림자 마나와 맞서며 오염된 마나를 정화시킨다는 그 빛.
[조그리아](Zwgria)
전투 직전, 신관 사제로부터 급하게 술식을 배운 ‘소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검에 가득한 신성력이 주변의 모든 속성의 마나를 끌어모아 사방의 오염된 마나를 뒤바꾸기 시작했다.
“크헉!”
“이건, 으억…….”
달려들던 작자들은 갑작스럽게 몸속의 ‘여명’이 ‘새벽빛’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이미 수백 년 동안 그림자 던전에 익숙해졌던 이들의 몸은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우욱, 커헉―”
구멍이란 구멍으로 피를 쏟아내며 강한 부작용을 일으킨 마법 전사들은 쓰러지거나 혹은 서 있더라도 간신히 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일은 겪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그람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가득 담아 그 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상식에 비춰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류 마법학에선 술사의 노력으로 마나의 보유량을 늘린다는 동방의 개념을 부정했다. 대신 자연의 마나가 회복되는 속도를 강화해 써 왔다. ‘여명’의 자녀들이 승승장구할 수 있던 건 바로 그 원천인 자연의 마나를 성질적으로 뒤바꾸어, 주류 마법사를 그대로 독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블린의 마도술도 결국 그 연장선이었다. 신성력이 그나마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한다지만, 결국 자체 수련으로 마나 보유량을 늘린 여명의 마법사들 상대가 될 순 없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주류 마법학 개념에서조차 네 정체가 성립할 수가 없는데…….”
“드디어 물어보시는군.”
이제 주변에서 비틀거리며 피범벅인 채 쓰러지는 검은 전사나 마법사들은 상관조차 없었다. 이미 쓰러지기를 작정하고 왔으니. 다만 목적을 가로막아 버린 이 상식 외의 존재만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미처 답을 듣기도 전, 그람은 자신마저 체내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나가, 여명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너, 넌…….”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는 그람은 그제야 무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피불라. 하얀색의 평상복에 검은 망토. 그 망토를 고정하는 핀의 장식이 눈에 띄었다.
녹색 바탕에 황금 산양 무늬.
―바가반드.
“바, 바가……. 네, 네마냐.”
―푸욱!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치켜보던 그람이 일순간 경련하듯 떨리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성기사 하나가 어지럽게 펼쳐진 그림자 던전의 결계가 약해진 틈에 장창을 뻗어 꿰뚫어 버린 것이다.
“휴…….”
아직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지만 네마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검기를 실어 이번엔 검을 휘둘렀다. 흐려지는 시선을 부여잡아 보지만 이미 전신이 마비되었던 그람은 창에 몸이 꿰인 채로 그대로 머리가 분리되어 떨어졌다.
“네……마냐.”
“결국 말은 다 했군. 그래. 맞았다, 자식아.”
떨어지는 입에서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어설프게 끝났다. 몸과 분리된 성대가 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 네마냐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털어냈다.
“네마냐!”
“주군!”
다급하게 바가반드 영주를 찾는 목소리가 광장 저편에서부터 빠르게 다가왔다. 하나같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익숙함에 긴장이 탁 풀린 네마냐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엘레나…… 거기다 헤누크까지 왔군.”
“괜찮으십니까?”
“괜찮…… 아니. 좀 쑤시는데.”
“뼈마디 말입니까? 하라드 님이 오시면 치료 좀 부탁드리죠.”
헤누크와 엘레나의 시선에 네마냐는 허리띠를 애써 붙잡아 버티면서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번에도 또 쓰러질 수준은 아니었다.
‘또 공주님 안기 당하는 굴욕은 없지.’
그런 굳은 결의로 꿋꿋하게 버티고 선 네마냐를 엘레나는 한숨과 함께 바라보더니 말에서 내렸다.
“수고 많았어. 이제 신전을 노렸던 반도들은 모두 체포한 것 같아. 그나저나 도시민 중에 이런 반역자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대충 몇 명이나 있던 것 같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네마냐는 대충 짐작은 되었지만 먼저 물어보았다. 헤누크가 대신 대답했다.
“반란을 일으킨 자가 대략 천에서 천오백 명은 되었던 모양입니다. 하도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녀서 처음 상황을 접할 때는 거의 수천 명 정도는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게다가 전력의 핵심 수백 명은 처음부터 이곳 대신전을 노린 것 같고.”
“설마하니 네가 여기에 있던 게 이렇게 중요할 줄은 몰랐어. 적 주력을 일거에 섬멸하다니. 이 사람들…… 우리가 바난드에서 봤던 그 사람들이 맞지?”
엘레나의 물음엔 이미 네마냐가 알고 있는 모종의 사실에 한 발짝 다가섰다는 느낌이 묻어났다.
“이제야 우리 세계를 둘러싼 중대한 음모가 한 꺼풀 벗겨졌지. 들어와, 군주님. 내가 안 그래도 마침 문서고에서 찾아낸 결론을 말씀드릴 테니까. 아주 중요한 얘기야.”
“고블린 토벌의 핵심적인 정보겠군.”
보지 않아도 알겠다며 엘레나는 순순히 옷자락에 묻은 먼지와 핏자국을 털었다. 그런다고 유혈의 흔적이 지워질 리는 없겠지만. 네마냐는 한숨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다시 한번 눈빛을 불태웠다.
“맞아.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깊은 어둠의 뿌리까지 찾아서 뽑아낼 기회일지도 몰라.”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끝난 두 사람이 서로 복잡한 시선을 나누는 동안, 산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찬란한 햇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로 축축하고 음습하게 젖어 든 제비들의 둥지, 켈리도니온이 다시 한번 따스한 햇볕에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었다.
* * *
“맙소사, 이게 방금 왔다는 그놈들이라고? 고블린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구르간의 물음만큼이나 현 상황을 보고하는 장교도 긴장감으로 맺힌 땀에 투구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광경. 초록빛 물결이 요새화된 다르빌의 언덕 아래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고블린 놈들, 이번엔 제대로 공성을 각오하고 준비해 왔군. 우리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다.”
그가 바라보는 언덕 아래. 거의 3만은 됨직한 고블린과 오그르 군단이 전부가 아니었다. 족히 열두 개는 됨직한 공성탑과 백여 문은 될 법한 공성추에 투석기까지. 구르간 시장은 이미 그동안 고블린의 포위 공격은 몇 번 겪어 봤어도 이런 일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사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란 겁니다.”
“응? 이것만이 아니라니?”
관찰장교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구르간은 돌아보았다.
“그, 제가 아직 확실한 첩보를 손에 넣은 건 아닙니다만. 지금 우리 도시를 포위한 놈들만큼의 병력과 병장기가 이미 강을 따라 남쪽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뭐, 남쪽으로 이미 움직인 것 같다고?”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는 건 이제 놈들이 우리 병력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 본거지를 하나씩 공략하겠다는 소리겠지요.”
“허.”
구르간은 아픈 줄도 모르고 성첩을 탁 내리쳤다. 고블린 군단의 2차 대공세. 첫 번째 대공세가 일부러 공격자의 피해가 클 공성전을 피했다면, 두 번째는 기꺼이 그걸 감수하겠다는 자세였다.
“일 났군. 수만의 고블린이 일거에 고원 안쪽 평원지대로 몰려들면 요새고 성채고 남아날 수가 없을 거다, 어쩐다…….”
“바로 성국 신관회에 알려서 연합군 전체가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화염은 이미 온 바세안 평원을 휩쓸고 있습니다.”
“크흠…… 주요 도시마다 그림자 마법을 쓰는 반란자들이 말썽이라고 하더니, 설마 이런 양동 공세를 취할 줄은……. 난감하구나.”
바세안 평원. 콜라케르트의 제국총독부, 바난드 왕국, 성국이 자리하고 있는 하야스단의 핵심. 이제 막 지난 새벽에 이 주요 도시마다 난데없는 그림자 던전으로 혼란이 일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틈새로 치고 드는 고블린들에게 평원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구르간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알리지 않을 수야 없지. 곧바로 켈리도니온과 바난드, 콜라케르트로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내내 뒤를 따르던 전령이 이내 성벽에서 내려갔다. 지난 1년간 총력을 다해 방어를 준비해 왔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게 나오는 모양새였다.
“……다시 한번 명운을 걸고 싸울 때인가.”
요새 아래를 살펴보며 속삭인 혼잣말, 그 말대로 이번엔 확실히 끝장을 내기 전엔 인간, 고블린-오그르 그 누구도 쉽게 물러설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갈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든, 계시라는 것의 완성을 위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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