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그림자 대봉기 (1)
―휘잉.
고블린 약탈대가 변경 보루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거리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가뜩이나 한기를 돋우는 찬 바람이 잔뜩 얼어붙은 거리를 달릴 뿐이었다.
―저벅저벅.
그런 도심의 한적한 거리를 걸어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아무도 이런 혹한의 계절에 집 밖을 나서지 않았을 터였다.
“오셨습니까, 구역장님.”
“사람들은 다 모였습니까?”
“거의 다 모였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전혀 연관이 없을 법한 다른 복장의 사람들이 퍽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손에 횃불을 들고 검은 로브로 외투를 두른 것만이 공통점이었다.
“오셨습니까.”
“오오…….”
“기다렸습니다, 구역장님.”
제법 으리으리한 저택 안쪽으로 두 차례나 입구를 지나서야 도달한 깊숙한 공간. 사방으로 둘러싸인 높은 담벼락 위로 네모난 하늘만이 건물을 장식하고 있었다.
“모두 들어갑시다. 이곳의 보안은 철저하니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요.”
수십 명은 족히 될 만한 사람들은 곧 가장 서열이 높은 ‘구역장’이란 사람을 따라 실내로 들어섰다. 원탁에 사람들이 둘러앉고 곧 따뜻한 먹거리들이 나누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대지는 않았다.
“도시 안의 조장들 대부분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군. 요즘도 보초들 감시가 심한 편인가?”
“말도 못 합니다.”
구역장의 물음에 조장들은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어댔다. 헛기침과 함께 구역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조장들을 훑어보았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곧 주인이 움직일 테니. 가짜 믿음의 종족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럼…… 우리도 이제 움직이는 겁니까? 벌써 잠입한 지 석 달째입니다만 감시를 피하는 것도 슬슬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령사 부대가 가담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소인족이 중심이 된 정령사 부대는 제국의 일시적 견제가 끝나면서 점점 숫자가 늘고 있었다. 각지에서 서비스업을 하거나 각종 잡일에 종사하던 정령사들이 모여들어 물경 7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놈들이 정령을 풀어 ‘여명의 힘’을 자꾸 추적해 대니, 마법사들보다 훨씬 골치입니다. 벌써 지난 일주일 동안 몇 군데나 되는 조직이 소탕을 당한 상태입니다.”
“이제 우리 반격이 시작되면 놈들이 당할 피해를 생각해 보건대 그 정도면 약과다.”
구역장은 어느샌가 검은 구슬을 손에 올려 두고 있었다. 검은 구슬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마치 그 속에 빨려들 것처럼 한없이 깊은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씀은…….”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까, 그람 님.”
각자 자기 관할의 대표를 맡고 있는 조장들이 손뼉을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구역장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석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시간이지. 하지만 이제 그 기다림도 끝이다.”
그람이라 불린 구역장은 메마른 겨울바람과도 같은 스산한 말투로 선언했다. 그 손 위에 놓여 있던 구슬은 그람의 기운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와도 같은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군단에서 언제쯤 움직여야 한다고 합니까?”
“한 달 뒤? 일주일?”
“오늘 밤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나온 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했다. 물론 언제든 봉기를 일으킬 준비는 해 두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날이 저물고 있는데 한밤에 시작하라니, 그건 무슨 말인가?
“아니, 아무리 빠를수록 좋다지만…….”
“아직 군단 본대도 아니고 정찰대나 겨우 모습을 드러낸 것 아닙니까? 벌써 섣불리 움직여 버린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 임무기도 하다. 우리 주인의 군단이 충분히 다가올 틈을 낼 수 있도록 혼란을 불러오는 것.”
“아.”
한숨과도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곳에 설치된 ‘봉기 구역’이란 것들은 고블린 군단 본대가 무사히 고원 안쪽으로 파고드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어찌 보자면 그저 ‘자살’에 가까운 명령일 수도 있다. 그람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역시나 날이 밝기 전에 가장 어두운 법이지. 여명의 빛께서 우릴 제대로 인도하시는 게 틀림없다.”
피식, 웃음을 지으며 구슬을 손바닥 위로 굴리는 그람이었다. 그리곤 스스로 허공에 떠서 구르던 그 마정석을 꽉 쥐어 잡았다.
“계시의 완성을 위해.”
“계시의 완성을 위해!”
모여 있던 조장들은 아직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재빨리 그람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계시의 완성. 그건 전장의 일선에 나선 고블린들만큼이나, 이들에게도 진심이었다.
* * *
―펑!
―퍼펑!
심야의 차디찬 켈리도니온을 마치 열기로 달구기라도 하듯 요란한 폭음이 가득 찼다. ‘제비 둥지’라는 이름의 오손도손한 동네로선 좀처럼 겪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도심 주거지 쪽에서 폭발음이 들립니다, 아마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뭐가 잘못되어 폭발할 게 주거단지에 어딨어?”
성내 치안을 돌아다니던 병사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장교가 눈을 부라렸지만 불안한 감정은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폭음은 연이어 사방에서 더 들려왔다.
―콰쾅!
―우르르르…….
급기야 계속되는 진동에 길가의 건물에서 흙먼지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젠장, 이거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정령사님, 추적 좀 부탁드리죠.”
“맡겨 주세요.”
순찰조에 함께하고 있던 키 작은 정령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숨결을 불어내 정령을 소환했다. 역시나 빠른 움직임이 가능한 실프였다.
“실프, 잠깐 폭음이 들리는 주변 지역 좀 확인해 주겠어?”
말이 없는 바람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거리에 접한 주택들도 연이어 창문을 통해 불을 켜는 것이 보였다. 폭음이 이 정도로 컸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드륵!
연이어 창문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어 각자 무슨 일이냐고 순찰대에게 묻는 소리가 요란했다. 폭음은 여전히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왔습니다.”
“뭐랍니까, 정령은?”
정령을 볼 수는 없지만 정령사가 무어라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면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분명했다. 장교는 잔뜩 긴장했다.
―꽝!
“꺅!”
“조심해!”
집 안에서 누군가 놀란 듯한 소리. 다시 들리는 폭음과 함께 기왓장 몇 장이 순찰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정령사는 재빨리 재주를 부려 가까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 냈다.
“수상한 무리가 도시에 출현했답니다. 어두운, 그리고 녹색 빛의 오러인지 마나인지를 가득 내뿜고 있답니다.”
“그건…….”
성국에선 세 차례에 걸친 고블린 군단과의 조우를 바탕으로 자세한 ‘그림자 마나’에 대한 사례집을 배부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른 정보는 몰라도 ‘검은빛 녹색의 에너지’에 대한 경고만큼은 누구라도 기억에 깊게 남아 있었다.
[검은빛의 녹색을 감지했다면 섣불리 대응하지 말고 상부에 보고하라. 상부의 지시와 신관의 대처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섣불리 후퇴하지도, 전진하지도 마라.]
“이런…….”
길목의 양쪽 끝으로 소란스러움이 더해졌다. 말을 탄 창백한 빛의 갑옷 차림을 한 기사들이 앞장을 선 가운데 상당한 부대들이었다.
“가기크 부종정 예하의 명이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모두 동부 지구로 가라! 가서 주택지구를 봉쇄해!”
“검은 마법사들이야! 고블린 노예들이다!”
마을에선 점점 원초적인 말로 바뀌어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말초적인 표현만큼이나 충격적인 비명과 외침이 들려왔다.
“일단, 마을 사람들 함부로 움직이게 하지 못하게 단속해야겠다. 정령사님, 지금 이곳 마을을 보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해 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령사에게 장교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그때 도로를 따라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다급하게 외투를 다 챙기지 못한 기사단장 엘레나의 모습이었다. 기겁한 장교가 급히 뛰어가 맞이했다.
“단장 각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폭음은 이곳엔 아직 터지지 않았습니다.”
“주민들 안전이 최우선이야. 혼란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집에서 쏟아져 나온다면 수습이 불가능해질 거야.”
“그렇습니까.”
엘레나가 폭발과 함께 기습 공격이 시작된 아수라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아직은 안전한 서쪽 지구로 달려온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니 너희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사람들의 동요를 막고 이탈을 막아라! 그게 지금 저놈들이 바라는 소리일 거다.”
“단장, 우리도 이제 얼른 동부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점점 소리가 요란해지는 게 상황이 가라앉을 판국이 아니군요.”
곁에 버티고 선 필로칼리스나 클로루스 두 사람 모두 불안하게 동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지만 켈리도니온은 이미 하루가 시작된 뒤였다.
“정말 긴 하루가 되겠어…….”
필로칼리스의 말대로였다. 엘레나는 투구를 고쳐 쓰고 고삐를 단단히 틀어잡았다. 정말 하루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긴 하루를 보낼 마당이었다.
* * *
―벌컥!
벼락같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선 일행. 급하게 서두르느라 5구짜리 촛대에 양초조차 제대로 다 꽂지 못한 상태였다.
“바가반드 경은 어디 계신가!”
“헉! 누, 누굽니까?”
새벽의 고요한 어둠에 묻혀 잠자던 하라드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당황스러운 숨을 내쉬고 있노라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새벽의 방문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기크 예하? 여기 무슨 일이십니까.”
“마법사, 못 느끼셨소?”
“예? 뭘 말입니까?”
가기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하라드 정도로 영지에서 주목받는 마법사라면 도시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림자 마나를 모를 리가 없을 것이었다. 이내 가기크는 방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알 수 있었다.
“결계로군. 만약을 대비한 조처였는가. 어째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는지 알겠군. 하지만 이건 잠시 거둬 줄 수 있겠소?”
“예? 예, 그러지요.”
하라드는 순순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아티팩트를 끌어내려 마정석에 채워 넣었던 마나를 비웠다.
“……지금 도시 안에 고블린 술사들이 진입하기라도 했습니까? 이 느낌은…….”
“더 안 좋네. 어떤 이유, 어떤 정체인지는 몰라도 인간이야.”
“인간…….”
그 한 단어가 참으로 의미가 깊었다. 그 단어를 곱씹으며, 하라드는 잠시 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마법사님?”
“아, 예하.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나자리안 경을 찾으시던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헌데, 바가반드 경은 자리에 없군요. 설마 그새 또 어디론가 가셨습니까?”
“아, 예. 어젯밤에 성녀님과 엘레나 단장과 얘길 나누곤 신관문서고로 들어갔습니다. 확신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여…….”
“허허, 그야 좋은 일이지만 지금 도시 안에서 전투가 한창이라 지원이 시급한데.”
전투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좀 먼 곳인 신관회관 앞의 종탑에서 시간을 알리는 파루 소리가 들렸다. 해가 뜨려면 아직 세 시간 정도는 더 버텨야 할 꼭두새벽이었다.
“괜찮으면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사정이 급합니까, 지금?”
“말도 못 한다네. 지금 출격 준비 중이던 기사단까지 모조리 투입되었지만 새벽녘이라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안 되네.”
하라드는 안쪽에 가죽으로 된 갑옷을 걸쳤다. 아일라가 마법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적당한 마정석으로 무기를 막을 방어력만을 부여한 갑옷이었다. 그 위에 가벼운 로브를 걸치고 피불라로 고정시키며, 하라드는 준비를 마쳤다.
“끝났습니다. 네마냐 경에게는 따로 연락을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면 아무래도 사건 대처에 늦을 수 있으니.”
“좋소. 마침 신관문서고라니 우리 신관을 보내면 되겠군. 그럼 우리 병력과 바가반드 병력을 합쳐 움직입시다.”
“예.”
너무 급한 나머지 무기고 점검을 새벽 일찍부터 나가 있는 아일라에겐 이야기를 건넬 경황조차 없었다. 그렇게 제법 늦게까지 평화를 지키고 있던 대신관의 구역도 전쟁의 기운에 휩쓸리는 순간이었다.
“바가반드 병력 긴급 출동이다, 모두 서둘러 움직여라!”
긴급 전달을 받은 헤누크와 아일라 등이 피로가 가득한 기색으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짧았던 평화는 무자비하게 깨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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