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다가오는 폭풍 (3)
점심시간도 지나가고 약 2시간의 휴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한 사람, 바가반드의 영주가 더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 달라진 것 없는 구성원으로 회의 재개를 선언했다.
“오전에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대부분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고블린을 지금 당장 토벌한다고 해도 제국군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녀가 토로하듯이 말을 꺼내 봤지만 휴정 전이나 이후나 아르미니우스의 뜻은 달라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뭐, 다들 느끼셨겠지만, 아르미니우스 부제독은 출병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을 지키는 데 집중한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가반드 경이 곧바로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제독 어른이나 특사경 어른을 통한 지시가 아닌 이상 저는 군대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실로 완강했다. 이미 엘레나뿐만 아니라 제눌트까지 물밑에서 원정에 관해 설득했다. 아니, 사실 애초에 아르미니우스부터가 군부의 입지 때문에 오히려 이쪽에 원정 동행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게 무슨 무책임한 말입니까? 원정에 동행을 요청한 것은 애당초 귀국의 군대, 아니 장군 본인이 아니었던가요?”
“으음…….”
부제독은 뭔가 난처한 듯이 입을 열려고 하다가도 곧 다시 다물어 버렸다. 네마냐는 부제독의 권한을 넘어서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온 게 틀림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사경으로부터 내려온 지시입니까? 그래서 사령관 대리께서 그렇게 곤혹스러워하시는 것이라면…….”
“휴……. 역시나 금방 눈치를 채는군. 그렇소. 제독의 부상 소식이 중앙에 알려지면서 우리가 움직일지도 모른다며 난리가 났소. 원로원에서 사령관과 원로원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출격을 금지했소이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더군다나 이번에 가로막은 산은 변경 사람들이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막강한 원로원. 불과 당장이라도 고블린이 남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2주 뒤 거취도 불분명한 제국군의 손발까지 묶인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어떻게 합니까? 그럴 거라면 우리 나머지 연합군 2만 4천으로라도 북진을 하는 게…….”
“적의 병력이 아무리 줄어도 6만은 된다는데 그 병력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답답한 듯 북진을 주장하는 바쿠헨이었지만 곧 제눌트 장군의 반박에 부딪혔다.
“고블린이 움직이길 기다리면 그 6만이 10만이 될지 누가 압니까? 그나마 적고 사기가 꺾였을 때 쳐야 상대가 되는 겁니다. 우리 엘프 궁기병과 타위비크의 중보병대가 앞장을 선다면 전황을 바꿀 수가…….”
―탁.
“그랬다가 잘못되어 밀리기라도 하면 본인들 영지도 불바다가 된다는 걸 모릅니까!”
아르미니우스가 계속된 원정 타령에 답답했는지 책상을 치며 꺼낸 단어, 불바다. 그 이야기에 사람들 표정은 굳었다.
“불바다라니, 말이 조금 지나치시군요.”
“이 고원이 불바다가 되길 바라는 겁니까?”
“그래서 드리는 경고 아닙니까! 헛되이 전력을 소모할 생각을 말라는 겁니다.”
끝이 없을 소모전 같은 논쟁이었다. 네마냐는 이런 쓸모 없는 이야기에 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재개된 연합군 수뇌부 회의였지만 모처럼 많은 영주들이 참여했음에도 역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휴, 골치로군요. 가까스로 타위비크와 엘프 중왕국의 지원군까지 와서 승리를 일구는 기반을 만들었다 여겼는데.”
“중요한 변곡점이긴 했죠. 다만 이후 어떻게 상황을 이끌어나갈지, 그게 문제니.”
성녀, 엘레나와 함께 회의가 끝나자 휴게실로 이동했던 네마냐가 말을 하면서 동시에 망토를 두르고 영지의 상징인 산양을 박은 피불라로 몸에 고정시켰다. 누가 보더라도 나간다는 걸 알아차릴 옷차림이었다.
“겨우 오셨는데 또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그래. 잠시라도 좋으니 여기서 성내를 안심시키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건 여기 계시는 분들이 훨씬 잘하시겠지. 더군다나 정령사들까지 들어간 이상 틀림없을 테고. 저는 그 사이에, 니콜라스 특사에게 어떻게든 상황을 돌이켜 볼 방법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일지……. 결국 특사경도 황제의 대리일 뿐, 군 통수권이 있는 건 아니라 방법이 없을 거예요.”
트라야브나의 정확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언제든 국경지대에 적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니까. 네마냐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래도 이대로 상황을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미 너무 늦어졌어요.”
자신이 처음 꺼냈던 구상대로면 아직 바가반드에 자신이 있었을 때 원정은 결정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북진했어야 했다.
‘설령 지금 당장 제국군 출병 동의를 얻어낸다고 해도 이미 늦었을 것 같지.’
군의 배치를 재편성하고 그에 따라 제반 준비를 하는 데만 수일이 걸린다. 가뜩이나 지금처럼 각지의 치안 유지를 위해 병력마저 분산된 상황이라면 그 시간은 끔찍하게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결국은 이곳 고원에서 버티는 것밖엔 방법이 없겠구나. 정말 원하지 않았던 방법인데.’
네마냐 자신이 직접 지켜봐야 했던 것처럼 30년 뒤까지 황폐한 전장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례없는 피를 흘리는 것 역시 피할 순 없겠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도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보겠습니다. 성하께서 허락해 주시면 통신구로 타협을 한번 열어 보겠습니다.”
“그래요,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똑똑.
가벼운 두드림이 휴게실의 문을 두드렸다. 영주 중 누군가 찾아왔나 싶어 세 사람은 잠시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그저 클로루스일 뿐이었다.
“클로루스, 무슨 일이지?”
“단장님, 다르빌 자유국으로부터 긴급한 연락입니다. 고블린 약탈대가 다시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입니다.”
“약탈대가, 벌써?”
황당하게 쳐다본 엘레나가 다른 두 사람과 화급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속도가 빠를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네마냐는 망토를 마저 매만지다 말고 클로루스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적의 구성은? 혹시 후방에 군단 족장이 이끄는 대병력이 있는 것 아닌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방에선 적의 대규모 침공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놈들, 우리 태세를 살펴보려고 남하하는 것 같아. 우리가 북진할 것인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네마냐 네 말대로였으면 지금쯤 국경 너머에서 막 교전했겠지만.”
“선수를 잡히겠군, 이대로라면.”
첫 대규모 침공에 이은 두 번째 침공마저도 선수를 빼앗기게 생겼다. 엘레나의 말대로 예정대로였으면 미처 준비를 마치지 못한 고블린에게 기선을 잡는 건 자신들이 되었을 터. 이제 조금만 있으면 고블린 군단은 상황을 파악하고 남하를 준비하겠지. 네마냐에게서 까드득, 이를 꽉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지. 공세는 관두고 다시 요격 태세를 취해야겠어.”
“요격?”
군사의 일에 대해선 잘 모르는 트라야브나는 요격과 공세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엘레나가 친절하게 그 두 가지의 차이를 설명했다.
“공세는 우리가 원정을 간다는 뜻이지만, 요격은 우리 영토 안에서 적의 공세에 대항한다는 뜻이지. 의미가 달라.”
“많이 다른 건가?”
“물론입니다.”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세 작전으로 재편을 하게 되면 요격에 비해 실제 전투에 참여할 병력 위주로 정교하게 진형을 짜야 한다. 식량 소비에도 신경 써야 하고, 행군에도 미리 주의를 해서 길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요격이 되면 우리 측의 자원 사용에 제한이 없어지고 동시에 출정에 있어 원로원의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죠.”
제국 원로원이 금지한 것은 ‘원정’ 형태의 진격뿐이었다. 요격 작전은 2주의 제한이 있을 뿐 묶여 있지 않았다. 이만하면 부제독은 물론 니콜라스 특사도 막을 이유는 없다.
“그렇구나. 원정으론 움직이는 것도 어려우니 차라리 요격으로 옮겨서 대응이라도 제대로 해 보자는 뜻이군요.”
“정확하십니다.”
“잘되었어요, 그럼.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제가 준비해 둔 것처럼 철저하게 대비하는 게 좋겠죠.”
그러면서 성녀는 한 꾸러미의 열쇠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두 사람에게 들어 보인 뒤, 그것을 엘레나에게 전해 주었다.
“요전번에 여러분도 읽었을 총력전을 선언하고 물자를 대거 징발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보상할 것을 약속하고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분류해 대형창고 열두 개 분을 채웠으니 그 열쇠는 단장에게 전해 두죠.”
그리곤 목록을 담은 장부도 곧 넘겨주겠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주로 식량이나 쇠붙이 무기 같은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창고 열다섯 개 분량이다. 여러 희귀한 장비도 상당히 들었을 것은 분명했다.
“큰 도움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적어도 다른 영주들이 싸우는 동안에 우리도 기사단 외에 달리 더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야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세요.”
“예, 그럼 감사히 마다하지 않죠.”
엘레나는 열쇠뭉치를 자신의 허리띠에 묶으면서 클로루스를 돌아보았다.
“가서, 기사단에 출전 준비하라고 일러라. 본부 소속 쇠뇌와 발리스타 포도 최대한 준비하라고 하고.”
“그럼, 저희도 출전하는 겁니까? 성내 그림자 마나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그래. 우리 같은 정예는 여기 틀어박혀서 반란군 놈들 상대하느라 시간을 보내느니 애초에 날뛰지 못하도록 그 뿌리를 잡는 게 나을 거다.”
“알겠습니다, 다들 기뻐할 겁니다!”
어지간히 성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무료하다 생각하고 있었는지, 클로루스는 기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곤 복도에서 외치고 다녔다.
“신성기사단, 출정 준비! 고블린 침략군을 다시 요격하러 나간답니다!”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보인 듯 신전 전체에 뛰어다니는 발소리, 고함이 요란했다. 서둘러 기사단 본부로 가려는 듯 뛰는 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정말 좋아하는군.”
“좀이 쑤시는 건 자신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말 위에서 기창을 들고 적을 꿰는 것이 훨씬 속 편하지. 주민들의 비싼 세금으로 생계가 유지된다는 걸 아는 데서 나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란 으레 그런 것이거든.”
아르미니우스 부제독을 비롯해서 각 제후들 전원에게 고블린 약탈대의 출현, 공세 작전을 취소하고 요격 작전으로 전환한다는 발표가 전해진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소식지 등을 이용해 빠르게 일반 대중에게도 이 소식은 전해졌다.
[고블린, 다시 남하하다!]
[우레이미야, 과연 죽지 않았는가?]
[연합군의 대응에 대한 분석 : 한 달의 여정]
[과연 2차전은 어떻게 될까 : 심화 분석]
이런저런 얘기가 다시 쏟아지니 물가가 다시 오르고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두 차례의 망각의 늪 전투와 기만 작전으로 간신히 풀렸던 위기의식이 다시 살아났다.
“오, 영주님 왔어?”
“오셨군요, 주군.”
“미하일만 빼곤 다들 모였군요. 거기다 아슬라니아 공까지 와 주시다니.”
도시에서 나온 소식지들을 모조리 모아 놓은 원탁 주위로 하라드, 아일라와 헤누크 그리고 아슬라니아까지 앉아 있었다. 일어나려던 사람들을 애써 말린 뒤, 네마냐는 비어 있는 의자 하나를 찾아 앉았다.
“정보지들을 읽고 계셨군, 다들. 도시 안의 사정이 또 흉흉해진 모양이야.”
“작전을 앞으로 공세가 아니라 요격으로 바로 바꾼다면서? 놈들의 침입은 기정사실인 거야?”
하라드가 쉴 틈도 없이 물어왔다. 헤누크는 헛기침을 하며 균형을 잡으려는 듯했지만 궁금하기로는 이 젊은 마법사 못지않은 모양이다.
“저 역시 궁금합니다. 아직 고블린 약탈대만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압니다만.”
“이제 더는 고블린이 우리보다 열등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갖고 노는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 지금까지 우리가 싸운 걸 생각해 보면 고블린을 우습게 볼 사람이 어디 있어?”
정확하게는 고블린보단 오그르겠지만, 어쨌든 군단으로서 이 둘은 하나이니 상관없다. 그리고 역시나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때 정령 성채에서 뵈었을 때만큼이나 오히려 위기에 당하여 확신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역시나 전력을 다해 함께하기로 한 데는 의심이 들지 않는군요.”
“아슬라니아……. 믿어 주어 고맙군요.”
연이은 강행군으로 살짝 광대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수척해진 네마냐는 눈웃음으로 감사의 뜻을 함께 전했다.
“휴, 그럼 이제 곧 머지않은 곳에서 싸우겠군. 나도 준비해야지, 슬슬. 병사들도 모조리 신무기에 기뻐하는 모양이더라. 역시 숙련병도 연장을 잘 타고 나야 잘 나오는 법이라니까.”
마침 조상의 연장을 찾아 진정한 숙련장인으로 거듭난 경험자의 진심에서 우러난 표현. 네마냐는 검의 손잡이를 꼭 붙든 채, 자신의 앞에 있는 네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최후의 전장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마지막까지 동행을 부탁합니다. 이제 머지않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간절한 바람은 굳이 네마냐가 말로 꺼내지 않더라도 그 자리, 아니 전쟁에 임박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이야기였다.
‘이번엔 부디 끝을 볼 수 있기를.’
그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해 하야스단의 모든 사람들은 기꺼이 전사의 이름을 내걸고 기꺼이 몸을 던질 마음이었다. 이윽고 기다리는 이들의 시선 안쪽으로 수면을 들썩이는 대폭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 18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