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다가오는 폭풍 (2)
켈리도니온에 바가반드의 전략물자와 인원들이 도착하는 데는 아무리 늦어도 사흘이면 충분했다. 하도 여러 번 드나들다 보니 이제 켈리도니온 사람들도 더는 열광에 휩싸여 병력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역시 쉽지 않다는 걸 슬슬 느끼고 있겠지. 조용하니 그래도 다행이야.’
그보다 네마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제국군의 동향이었다. 이제 불과 3주에서 2주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어떻게든 남은 시간 동안에 고블린에 대한 선제타격을 주장했지만, 그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였다.
‘제국군이 가담하지 않으면 소용없을 짓이지. 적어도 숫자만이라도 대등하게 하지 않으면 고블린 성채를 포위하는 것조차…….’
제독 니키타스가 여전히 부대를 장악했다면 혹시나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핵심 부대를 잃어버린 데다 심지어 단지 대리일 뿐인 아르미니우스 부제독으로선 과감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큰일 나겠어.”
“무얼 말씀입니까, 영주님?”
투구를 벗고 한숨을 쉬다 돌이킨 옆으로 오랜만에 보는 알리테스가 눈가리개를 올린 채 따르고 있었다.
“음, 별것 아니야. 그저 제국군이 우리를 도와 함께 움직일지 그걸 걱정하고 있었지.”
“하야스단 군만 독립적으로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요? 거의 2만 수천 명은 될 겁니다.”
“고블린 병력도 생각해야지. 우린 놈들 본거지를 쳐야 하는 입장이라고. 뭐,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간 영락없이 놈들이 더 미친 듯이 쳐들어오겠지만.”
아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알리테스로선 연이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영주가 이렇게 걱정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모르는 사항까지 헤아려야 한다는 게 마냥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바가반드 군, 바가반드 영주 계십니까!”
말을 타고 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나타났다. 그는 열심히 네마냐를 찾고 있었다.
“내가 바가반드 백작이다. 무슨 일이지?”
“아, 여기 계셨군요. 기사단장 엘레나 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엘레나…… 뭐지?”
“예. 수레와 병력은 먼저 보내고 바로 중간에 위치한 제3신전으로 오셔 달라 합니다.”
“제3신전…… 알겠어. 그리로 가지.”
“감사합니다. 그리 알고 전하겠습니다.”
“그, 잠깐. 거기엔 누가 있지?”
“성하와 기사단, 제국군과 타위비크, 제눌트 장군, 정령사와 마탑 대표 등도 모여 있습니다.”
바야흐로 암피에르 연합군의 주력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회합의 목적 역시 지금으로선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작전!”
네마냐는 알리테스에게 아일라와 수송대의 호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재빨리 말을 내달려 제3신전이란 곳으로 향했다. 확률이 가뜩이나 낮은 상황에서 참여조차 해보지 못한 채 결론이 나 버리면 그만큼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었으므로.
* * *
“불가합니다.”
“부제독!”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마디의 부정적인 어조에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말없이 앉아 서로를 노려보는 중인 정령사와 마탑 대표를 제외하고 여러 영주들은 황당한 표정을 아르미니우스에게 지어 보였다.
“지금 적을 추격해서 숨통을 끊지 않으면 놈들은 금세 다시 남하할 겁니다.”
“이전까지 놈들이 천천히 공세를 하는 쪽이었다면 이제 녹록지 않은 걸 안 이상 상황은 달라질 거요.”
나샤와 공방전 당시 고블린-오그르 군단은 공성탑과 다양한 공성 무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번 침공에서 우레이미야는 이상하게도 공성 무기를 쓰지 않았다. 아마도 연합군을 겨울에 힘입어 분열시킨 뒤 각개 격파하고 회전으로 본대를 격파한다는 뜻이었을 테다.
“그러나 그 뜻은 막히지 않았소? 적에게 이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피해를 안겼고 아군의 영지들 모두 안전하오.”
“일시적이지, 사령관. 마탑에서 사방에 보낸 감독관들의 보고로는 이미 고원 곳곳에서 마나가 감염된 지역이 많소. 이런 상태로는 우리 마법 전력조차 힘이 되지 못할 테니.”
마탑주 말카시안은 마나의 수질을 검토한 지점을 표시했다며 지도를 휙, 사람들이 앉은 원탁 중앙으로 보내고 공중으로 띄웠다. 지도에 표시된 일백여 지점 중 족히 절반은 넘는 곳이 붉은, 그러니까 마나가 오염된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어느새 이렇게나.”
“신관회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주요 도시와 촌락의 마나 응집 수정을 감독하는 건 귀 성회의 일이 아닌지요.”
“압니다. 민간의 불안을 막기 위해 모두 공개하진 않았지만 대략 60여 곳의 주교구, 사제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는 앞선 마나 측량 결과, 아니 그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곳곳의 거주지에서 다르빌, 켈리도니온으로 이어지는 마나 수집 시스템에서 적잖은 오염이 감지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만 그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성하? 오염된 마나가 도시와 마을로 흘러들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불안할 이유가 없었겠죠.”
제눌트의 질문. 트라야브나는 이미 무슨 이야긴지 알아차린 마탑주 말카시안이나 정령사 대장 소피 아슬라니아, 기사단장 엘레나와 눈을 돌아가며 마주 보았다. 긴장감 역력한 이 세 사람은 군침을 삼키거나 진땀을 닦았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제눌트가 다시 한번 물어왔다.
“오염된 마나가 유입된 것도 아니라시면, 고블린이 잠입했다든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뒤엎을 뜻을 가진 이들이 현 영지-마나 시스템에 잠입했단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고블린과 한편인 자들이 곳곳에서 늘어났다는 겁니다.”
웅성웅성.
고블린과의 결탁을 선택한 자들. 그 존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드러난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책상을 치며 분노에 찬 얼굴로 성토를, 다른 누군가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얼굴빛을 잃기도 했다.
“설마, 얼마 전 바난드 본토와 성국 곳곳에 일어났던 검은 마나 사건이 바로!”
“파르티즈에서도 얼마 전에 비슷한 사고가 있었단 소문이 있습니다. 설마 바난드의 내전에까지 고블린들이 끼어든 겁니까?”
“우리 세속 영주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성하!”
아르미니우스로부터 타위비크, 몇 곳의 가신과 소영주들까지 혼란에 빠졌다. 급기야 성녀까지 재촉할 정도였으니.
쿵.
“자중하시오, 자중!”
복잡한 낯빛의 트라야브나를 대신해 뒤에 서 있던 가기크 법관이 지팡이를 내리쳤다. 다행히도 그것으로 소란은 멈추었지만 분위기는 적잖이 흉흉했다.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트라야브나는 아르미니우스에게 요청했다.
“으음. 잠시 휴정을 하고 분위기를 바꾸지요. 부제독, 괜찮겠습니까.”
“그리하시죠, 성하. 두어 시간 정도 쉬면서 전선의 소식이나 정보도 마저 취합하는 게 좋겠습니다.”
회의의 최고위 두 사람이 결정한 이상 휴정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각자 몇 사람씩 모인 영주들은 이것저것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마탑주, 소피, 성녀와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창가에 접한 골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이제 거침없이 정보를 아는 분들은 다 모였군. 그럼 이야기를 좀 나누시죠.”
“탑주께서 순순히 오셔서 협조적인 이야길 하실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군요.”
몇 번의 충돌로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은 데다 고블린의 위협을 더 심각하게 느낀 엘레나의 첫 발언. 꽤나 가시 돋친 표현이었다. 의외로 말카시안 박사는 웃음을 흘리며 답을 주었다.
“허허……. 모르셨나 본데 암피에르 집단 방위 조약은 말 그대로 암피에르, 마탑의 수도에서 체결된 조약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그동안의 분규에서 뒤로 물러나 있는 경우가 많았죠.”
“그거야 마탑의 중론이 그러니까요. 저흰 귀하 영지들처럼 위에서 정하면 아랫것들은 따라야 하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그렇게 실없는 실랑이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차마 유치해서 못 보겠는지 가만히 있던 정령사 소피가 말문을 열었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의 일이 아니죠. 장래의 일이 문제입니다. 저희 정령사 부대도 기껏 명운을 걸고 왔더니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두 사람 싸움은 잠깐 접어 두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부터 얘기합시다. 이 마나 오염이 대체 뭘 의미할 것 같습니까?”
트라야브나의 질문.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걸 모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집적 수정 시스템에 오염 마나가 검출되었다는 건 우리 마탑에서 조사한 자연 마나 오염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란 건 확실합니다.”
“그렇죠. 집적 수정은 인간의 무속성 마나만을 모으도록 설계된 장치니까. 고블린이 직접 잠입했든, 검은 마나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도 있는지는 모릅니다만.”
말카시안은 누구나 다 알지만 선뜻 꺼내려 들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고 팔걸이를 향해 연신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까진 확실하지 않던 고블린 쪽 인간의 존재는 확실해졌고. 그럼 그자들이 지금 출현한 것도 예정된 작전일까요?”
“그럴 것이라는 예측은 여기 모인 모두가 성하와 같은 의견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레이미야가 상태가 어떻든, 다시 놈들이 재편해서 내려온다면 그땐 처절한 공성전을 감당해야 할 겁니다. 다르빌 말고 어디가 그 정도로 대비해 두었겠습니까.”
대부분의 영지는 도시와 그 도시로 각종 물자를 공급할 배후지 농촌의 구조다. 그리고 고블린들의 특기가 농촌을 파괴하고 도시를 고립시키는 유목민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반년 이상 계속된 경고에도 다르빌을 제외하면 요새 보수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엘레나는 그래도 네마냐로부터 전해 들은 낭보를 전해 줄 수라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가반드 기술부서에서 전략용 통신 체계를 마정석 아티팩트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연구하고 있단 겁니다.”
“그걸 어느 세월에 완성하겠소. 답답하지. 우리 마탑에서도 지난 60년을 연구했건만 도통 진척이 없었으니.”
“그러니 그동안에 버티기 위해 있는 것이 다르빌과 그 방어 거점들 아닙니까. 희생에 앞장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간 어째서 네마냐 경을 필두로 고블린을 선제 타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 장군의 태도를 보건대 이제 그건 힘들 것 같군요.”
소피 경의 말대로였다. 안정적으로 원정군을 이루려면 적의 대열에 맞서 버텨 줄 만한 충분한 병력이 있어야만 했다. 소위 적을 공격하는 ‘망치’, 적을 버텨 줄 ‘모루’가 있다면 훌륭한 보병대가 있는 제국군이 모루가 되어야 했다.
“아무래도 직접 책임을 질 수 있는 지위가 아닌 대리인일 뿐이니……. 제독 그 사람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성하 말씀대로 제독이 얼른 회복되어야 할 텐데 아직 오락가락하는 모양입니다. 현재 기사단과 제국군 수뇌부, 신관회가 엄중하게 치료 중에 있지만 상태가 이래서야…….”
엘레나는 그 말을 마치면서 정말 상황이 나빠진다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제독에게라도 답을 받아낼 태세였다.
“휴, 아직 제국군 거취에 대한 답이 오려면 족히 2주는 남았겠다, 답답하군요. 어영부영 시간이나 보내다가 제국군은 그대로 돌아가고 우리가 고스란히 고블린 침공을 막게 되는 셈 아닌가.”
“행여나 말씀 마십시오. 그때는 우리 마탑도 직접 원로원과 마법성에 뇌물을 보내서라도 반드시 뜻을 돌이킬 겁니다.”
물론 마탑 내부에서 차라리 고블린과 손을 잡자는 해괴한 움직임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말카시안은 애써 딴소리를 주워섬겼다. 이젠 돌아가는 사정이 너무 복잡해서 머리를 쓰는 일이라면 고원 제일을 자부하는 자신조차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일단…… 각자 내부 단속에 힘씁시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정보 오염과 변절자를 데리고 무슨 해괴한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니까. 저희 정령사들이 우선 성도 안쪽의 치안부대를 도와 마나 정화를 돕겠습니다.”
마나 정화. 변절자를 단속하고 만약 일이 순조롭게 처리되지 않는다면…….
“할 수 있겠소? 사람을 죽이게 되면 마나는 물론 정령조차 오염될 수 있어. 만약 오염의 출처가 진짜 고블린 편이라면 그림자에 휩쓸려 최악의 사고로 이어질지도 몰라.”
그림자. 암흑 마나와 검은 던전의 이미지가 겹친다는 점 때문에 마탑에서 새로 내세운 표현이었다. 그림자. 진정한 마나의 형태인 공허-마나의 흐름과 달리 무의미하며 가짜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부여한 표현이었다.
“그림자라.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죠.”
“그 점은 너무 염려 마세요. 우리 신관회와 기사단에서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게 있죠. 신성 아티팩트.”
“성하, 그건 전쟁이 격화되면 쓰기 위해 마지막으로 쟁여 놓은 비축물자…….”
엘레나는 너무 펑펑 써 버리면 안 된다며 만류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채 마무리를 짓기도 전에 트라야브나가 손을 들어 막았다.
“지금이야말로 그 비축물자를 모두 동원할 생각을 해야지. 이미 놈들이 무슨 수를 쓰기 시작한 이상 우리도 전력으로 맞서야 해. 처음은 몰라도 두 번째는 놈들도 전력으로 나올 건 틀림없으니까.”
“휴, 젠장할.”
말카시안은 동여맨 로브의 모자 끈을 여미며 나지막하게 비속어를 뱉었다. 물론 아무도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긴장감이 가득한 방 안에 조금 생동감이 돌기 시작한 건 바깥의 복도에서 지나가는 누군가의 말이 들려온 덕분이었다.
“바가반드 경이 도착했답니다. 미리 단장님께서 전하신 대로 지금 바로 제3신전으로 오시는 길입니다.”
“알았다. 가서 도착하시면 바로 모셔오도록. 나는 단장님을 찾으면 보고할 테니.”
“네마냐 경이…… 왔군요.”
그 이야기에 자리에서 어두운 표정만을 짓던 사람들도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어쩌면 소영지의 이 젊은 영웅이라면 이 어두운 전망에서도 뚫어낼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와 함께.
“모두 마찬가지 생각인 것 같군.”
말카시안은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그 한마디와 함께 자리를 박찼다. 아니,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로부터 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만은 모두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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