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다가오는 폭풍 (1)
파르티즈에서 바난드의 두 내분 세력의 투쟁이 치열해진다는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갔다. 대 고블린 투쟁의 중심지인 켈리도니온의 신관회에선 공공연하게 이런 소리가 나올 정도.
“우리나 다른 제삼자가 중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계속 이런 식의 분규가 이어지는 건 좋은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마침 우리 성기사단장이 그 당사자기도 하니 불러 만류하는 건 어떻습니까?”
역시 문제의 본질에는 닿지 못하는 이야기 일색이었다. 펜자르크의 의도에 대해선 다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보니 알 수도, 알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건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일일 수도 있으니 곤란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지금 이곳과 전방에 있는 병력 역시 고블린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길.”
그렇게 애써 대범한 척하며 성녀는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기에 힘썼다. 물론 간밤에 파르티즈 주교구로부터 들어온 소식을 얘기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검은 마나라고요? 확실합니까?”
“……저도 믿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 마나 집적 수정에 불순한 기운이 연달아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운의 정체는 적마정석의 그것도 아니고 아예 오염된 검은 마나 자체였습니다.”
걱정하면서도 실체화되지 않기를 바랐던 위협이었다. 바난드는 물론 성국의 곳곳에서 검은 마나로 인한 테러가 잇따랐다. 전쟁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되긴 했지만,
‘결코 우리가 진압한 건 아니지. 언제든 놈들이 다시 준동한다면…….’
그리고 그 준동이 다시 터져 나온 것이 파르티즈였을 뿐이다. 적어도 이렇게 되면 바난드의 절반이나 되는 세력이 검은 마나의 원천인 고블린과 동맹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아쇼트 왕자의 세력은 토벌해야 하는 세력이야. 하지만 정작 아쇼트 왕자 본인은 고블린 전쟁에 참전한 상태지……. 거기다 막상 건드렸다가 대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트라야브나는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제야 네마냐와 엘레나가 대체 어떤 생각으로 고블린 전쟁을 처음부터 이끌어왔는지, 그 아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 * *
“아, 그래? 검은 마나를 썼다고?”
하지만 정작 성녀가 급히 소환한 엘레나는 곡절을 듣고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태평해도 되는 거야? 이대로라면 왕국 남부의 영지가 모조리 파괴되고 재건도 불가능해질 거야. 그 지역의 마나가 완전히 오염되어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된다고.”
“일단은 결계 방어를 갖춰 놨어. 검은 마나란 게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기라 아무리 펜자르크라고 해도 쉽게 마구 쓸 순 없을 거야. 아마도 이번의 것도 본보기성 공격이겠지.”
엘레나는 그러면서 자신들이 수립한 작전 계획을 드디어 공개했다.
“이 상황에서 오히려 고블린의 본진을 쳐야 한다고? 그게 가능하겠어?”
“쉽지 않지, 아니 어렵겠지. 그래도 지금 치지 않으면 고블린은 곧 남하할 거야.”
족장이 휘두르던 그 완전한 검녹색의 기운, 그때만큼은 죽음의 공포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트라야브나 자신의 지식으로 보건대 한때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그 힘이 틀림이 없었다.
“미처 수습하기 전에 들이치자, 이 뜻이군. 준비한 병력은?”
“성국군 3천, 바난드 8천, 타위비크 5천, 엘프기병 3천 5백, 제국군 보병 2만, 슴바트의 경보병 3천 정도가 당장 동원 가능하겠지.”
제눌트의 합의에 따라 아쇼트의 지휘권에 있는 병사 2천을 포함한 수치였다. 하지만 이미 대충 사정을 아는 성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모조리 끌어모으면 4만은 된다, 이거군.”
“성녀님, 허락은?”
엘레나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 둔 지 오래인 트라야브나였다.
“너의 뜻이 곧 나의 뜻. 그건 내가 이 자리에 서고 너를 부르면서부터 변함이 없었지.”
“변함없는 성하의 검이죠.”
그렇게 결의에 찬 웃음을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네마냐 경도 그럼 이제 슬슬 돌아와야 할 때 아닐까? 내가 보기엔 아마 이미 움직일 것도 같긴 한데.”
“맞아. 방금 통화하고 오는 길인데, 이곳 사정을 듣곤 바로 출발하기로 했어. 거기서 데려올 사람들을 모으느라 좀 늦었다던데.”
“그럼 이제 너와 네마냐 두 사람이 제국군을 설득해 움직일 차례군. 나머지야 우리와 제국군이 움직이면 기꺼이 나설 테니.”
“그렇지. 그래서 오늘 이곳을 찾아온 거기도 하고. 실은…….”
이 자리에서 파르티즈에 대한 미약하나마 한 가지 지원책, 제국군 수뇌부와의 접촉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 * *
“다들 아침 해 뜨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고 전하긴 했어? 시간이 없는데 아직도 안 오다니.”
“그, 그러게 말입니다. 이미 그저께부터 누누이, 뵐 때마다 알려 드리긴 했는데.”
네마냐는 속이 타는 기분이었다. 파르티즈에서의 검은 마나를 이용한 공성이 예상한 시점보다 훨씬 이르게 일어났다. 고블린은 이상할 정도로 어떤 움직임도 없이 고요했다.
“휴, 급하게 움직인다고 했는데도 정작 얻은 건 간신히 내통자 하나뿐이라니.”
“아! 저기 오십니다.”
“미안, 미안! 좀 늦었지.”
아일라가 허겁지겁 한껏 연장을 챙겨 넣은 가방과 검 몇 자루를 들고 뛰어왔다. 회당 안팎의 공간에 멋대로 퍼질러 앉아 불을 쬐던 병사들이 하품을 하며 일어날 준비를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일라? 어제 혹시 장인들이랑 고별파티라도 한 건 아니죠?”
“무슨 소릴. 아무리 술이 좋기로서니 이런 중요한 날까지 들이마실 것 같나.”
“그럼 다행이고요. 하도 나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라도 난 줄…….”
“그냥 가볍게 친구들이랑 반주 정도 한 거지.”
“…….”
얼어붙은 기운을 눈치챘는지 아일라는 헛기침과 함께 검 한 자루와 단검을 건넸다. 장검은 네마냐 자신이 맡긴 것이었다.
“빨리 고치셨군요.”
“고칠 건 딱히 없었지. 그보단 좀 더 검이 마나를 담아낼 수 있는 힘을 부여했어. 유연성은 떨어지겠지만 빈 마정석을 좀 더 녹여 넣었으니 오러로도 충분한 양을 전환할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이제 제대로 기틀이 잡힌 것 같군요. 기사와 병사들 장비에도 공이 많이 드셨을 텐데.”
두 사람의 너머로 늘어선 백오십 대 분량의 수레들. 수송하는 소의 숫자만 300마리, 그걸 감독하는 사람의 숫자도 거의 백 명 단위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기한을 넉넉히 줘서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었지. 공방 장인들은 여기까지 하고 다 뻗어 버렸지만.”
“역시 강철 손의 하스페다라더니, 아일라 씨는 어떻게 반주까지 하고 멀쩡한 건지.”
체력이라면 정말 강철 체력이랄까. 체질의 기준이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만.
“그게 다 난쟁이 혈통의 도우심이지. 자, 헛소리는 이만 됐고. 이제 졸병들까지 마정석 합금 무기를 들려줬으니 우리 병력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무기가 될 거야.”
“한 반년 이상 좇아왔던 목적을 드디어 하나 이루게 된 거죠. 정작 그걸로 때려잡아야 할 고블린은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게 됐지만.”
“생각할 거 없어. 그대로 들이박아 버려야지. 한 달 내내 전투할 걸 감안해서 재보급용 무기까지 다 준비했잖아. 이번에야말로 이것저것 재지 말고 확 쓸어버려, 놈들을.”
“그래야죠.”
아일라의 단호한 결의에 씩 웃음을 지은 네마냐는 곧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차로 현지 바가반드 군을 무장하고 보급품을 전달할 150대의 수레가 출발했다. 영지에 남았던 병력 일부와 에살하톤 상단 소속 용병 몇 명이 호위를 서기로 했다.
“보두앵에게도 고맙다고 직접 인사를 해야 하는데, 또 못 보고 가네요.”
“맞다. 그 사람 지금 공급 물품이 부족해서 제국 쪽 후방으로 갔다면서?”
“예. 바가반드에서 거의 2만 가까운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그 생산에 필요한 원료도 무지막지하죠. 거기다…….”
“거기다?”
“음, 사실 우리 영지와 동북부 쪽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무역로를 열려고 하거든요. 아마 다음에 보두앵이 내려오면 우리 영지로 바로 올 겁니다.”
네마냐와 보두앵이 영상 통신을 통해 결정한 건 비단 원료 공급확대뿐만은 아니었다. 무역로를 바가반드로 바로 이어지는 곳에 하나 더 개설하여 교역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 다들 안 그래도 펜자르크의 영지를 지나서 한참 험한 육로를 지나야 하는 지금 교역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이제 그 문제도 곧 해결될 테니, 앞으론 자원 부족으로 고민하실 것도 없을 겁니다.”
상단에 진 빚도 이제 대충 관리에 들어갔고, 산업은 안정되었으며 상, 관세 수입도 늘고 있었다. 이제 바가반드의 풍부한 현찰박치기라는 매력을 사방에 어필해도 좋을 때가 온 거다.
“그럼 얼른 켈리도니온으로 가죠.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거기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신나는데, 모처럼? 드디어 지겨운 공방이 아니라 뜨거운 현장에서 보내는 나날이라니.”
아마 아직도 전장을 신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일라처럼 공방이나 연구소에서 신나게 구른 사람 정도일 것이다. 네마냐는 묘한 표정으로 여전히 동쪽으로 펼쳐진 마시스, 엘자스의 산맥을 바라보았다. 두 산은 여전히 기색도 없이 하얀 구름을 품고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 * *
2월 13일.
성녀가 자고새 전신을 보내 특수한 명령을 내린 이후, 파르티즈에서의 공방전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었다. 대신 켈리도니온은 다시 바가반드 백작을 손님으로 받았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저 수레들은 다 군용 보급품들인가?”
“아, 그래. 우리 영지에 한해서라도 마정석에 특수 합금을 더해 오러 무기를 만들어 보자고 했거든.”
“한 명당 하나씩 오러…… 무기라니, 세상에.”
물론 무기 사용자 본인이 마나를 직접 불어넣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신기한 마음에 수레 위에 놓여 있던 창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힘을 불어넣으니 역시나 빠르게 창날에서 오러가 솟구쳤다.
‘이건…….’
네마냐의 눈가에 의아한 빛이 스쳐 갔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 역시 알았냐며 아일라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일이에요? 그동안 설마 실력이 훨씬 일취월장했다든가. 공방에서 두문불출하더니 그게 그런 결과를…….”
“노놉, 그럴 리가.”
네마냐의 수작을 단호하게 부인한 아일라는 옆으로 들쳐멨던 가방을 풀어 연장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건 네마냐도 일전에 본 기억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거, 예전에 프뉴마케르트에서 봤던 것 같은데, 하스페다의 손이라고 불렸다던 그 물건?”
“그래.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써 온 물건이지. 하스페다의 명망을 일으켜 준.”
금빛이 살짝 돌고 있는 물건이지만 금이 함유된 느낌은 아니었다. 저 느낌은…….
“마정석 합금이군요. 하지만 풍기는 느낌은 저한테 원래 주셨던 물건과도 비교조차 안 되겠는데요.”
“그렇지. 이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물건이거든. 순수하고 완전한 황금 마정석이 완벽하게 합쳐진 아티팩트랄까.”
‘그렇군, 그래서.’
마나의 기운을 집약해 품어낸 마정석과 물리적인 특성을 집약한 금속 물질의 조화. 문제는 현대 기준에서 싱크로율이라고 부르는 조화 정도의 차이다. 일반적인 대장장이의 기술과 연장으론 이 간단한 개념을 실현할 수 없다. 그걸 어떻게든 희미한 난쟁이 혈통의 도움으로 캐리한 아일라가 대단했을 뿐이지만.
“그래서 저까지 새로 무기를 뽑아주신 거군요, 적당히 보수한 게 아니라.”
“앞으로 더 위험한 싸움이 기다린다며. 그러면 지금이라도 장비는 제대로 갖춰 둬야지.”
“그렇네요, 잘되었어요. 덕분에 연합군도 사기가 오르겠어요.”
“자, 모두 준비했다. 얼른 출발해.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켈리도니온에서 출발했냐고 채근이 들어오더라.”
“안 그래도 오늘 출발한다고 얘기했더니 꼭두새벽부터 재촉이네, 하하.”
멀리서 미하일이 말을 탄 채로 다가왔다. 그 손엔 마치 건네주려는 듯 종이로 된 편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네마냐는 손을 뻗으며 서찰을 받아들었다.
“웬 편지야?”
“이리니폴리스에서 알마스트 경이 연락을 보내셨더라고. 이 편지를 전해 달라시더라. 급할 건 없으니 나중에라도 차차 연락을 달라고.”
“음, 그래. 제지공장이랑 상품 판로 쪽 이야기인가 보네. 나중에 따로 답을 보낼게. 영지 내부 질서에 대해선 네게 맡긴다. 보두앵이 혹시 강을 따라 영지로 올라오면 맞아주고.”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라. 네가 멀쩡해야 영지의 불온한 기운도 잠잠할 테니까. 내 휴가도 제대로 받아 내려면 네가 멀쩡해야지.”
두 사람은 웃으면서 주먹을 맞댔다. 그것으로 바가반드에서 네마냐가 보내기로 한 일정은 끝이었다. 아일라가 외투와 가방을 다시 걸치고 말에 오르니 네마냐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자, 출발! 얼른 켈리도니온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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