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쥐덫, 파르티즈 (3)
이라크시스의 백작령으로부터 높은 고갯길을 대여섯 번쯤 넘으면 펜자르크 백작령과 파르티즈 영지의 경계가 나타난다. 이곳부터는 주변의 식생이 푸르다기보단 갈색으로 바뀌어 위치가 달라졌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영주님!”
이미 경계선을 넘어서 있었기에 언제든 전투가 일어나도 이상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펜자르크는 제법 여유롭게 전령을 받아들였다.
“그래, 파르티즈의 자칭 수호자께선 어찌하고 지내시더냐.”
“파르티즈의 병력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한 농성 자세를 유지할 모양입니다.”
“전방 사령관의 관찰에 따른 판단이냐?”
“그렇습니다.”
쯧, 하고 혀를 차는 펜자르크는 더 말을 잇지는 않은 채 콧수염을 매만질 뿐이었다. 보통 고민에 잠길 때 그가 보이는 습관 중 하나다.
“음……. 케시번, 카르시의 두 영주도 시간을 맞추어 진군하겠다고 했으니 지금쯤 적진에 부딪혔겠지.”
“우리 선봉도 이제 적 요새를 하나씩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새라, 후…….”
6백의 요새를 가졌다는 요새의 영지. 다 부수지 않을뿐더러, 공격군의 출발지는 파르티즈의 후방이라 상대적으로 작전은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족히 2백 곳은 넘는 요새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금 저 산 밑의 요새가 첫 공격을 받아 방금 함락되었고, 그 옆 능선의 요새를 공략하는 중입니다.”
“저 첫 번째 언덕을 넘는 데만 열대여섯 군데는 되어 보이는구나. 어느 세월에 넘는다.”
“그렇다고 하나라도 게을리 넘길 순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놈들은 언제든 우리 보급대를 공격할 겁니다.”
영지의 병력을 이끄는 오시야칸(Oshyakan) 장군은 파르티즈의 황량한 환경을 지적하면서 펜자르크의 주의를 환기했다.
“그렇지. 아마도 그러하니 엘레나 그 녀석이 일부러 우리 측 영주들에게 이 땅을 내어줘 버린 거겠지.”
영지 전체를 요새로 도배한 것의 이점은 분명했다. 만약 적이 공격을 한다면 모든 요새를 일일이 무너뜨리도록 강제한다.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그 살아남은 곳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후방을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이곳을 버리는 것도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오시야칸. 그래서 네가 여기에 나를 보필하며 온 것이다.”
파르티즈를 아예 고립시킬 수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주변 영지들과 싸움이 붙은 상황. 이 상태로 왕성 아니를 향해 진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파르티즈의 그 바크탕이 기꺼이 군대를 몰고 후방을 칠 것이다.
“끙……. 그때 어떻게든 영주놈들을 제압했어야 했을 것인데. 이제 별수 없이 덫에 걸리게 생겼군. 함정이고 도발인 걸 알면서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염려 마십시오, 주군. 우리 병력이 앞장서서 길을 뚫겠습니다. 지금 저렇게 말입니다.”
펜자르크는 오시야칸의 그런 이야기에 다시 남쪽의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을 올려보았다.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돌산 언덕 위 곳곳의 성채에선 이따금 소란스러운 소리, 짙은 연기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 * *
“그래, 기어코 이라크시스 놈들이 시작했구나. 그쪽은 지금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나?”
“보고에 따르면 가장 먼저…….”
“제가 대신 보고를 드리죠.”
“바스마지안!”
바크탕의 공간에 들어온 건 북쪽으로 소수의 기사와 정찰을 떠났던 바스마지안이었다. 채 투구의 끈도 벗지 못한 기사단장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그걸 눈치채고 투구를 벗었다.
“빨리도 다녀 왔군. 놈들을 보고 온 건가?”
“숨길 생각마저 없더군요, 놈들. 정면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요새를 부수고 있습니다.”
“정공법인가. 정직하군.”
요새를 하나씩 부수고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전략은 솔직하면서도 가장 힘들다. 하지만 성과만큼은 분명하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확실한 방법이 되겠지. 그렇다면 시간이 넉넉지 않은 펜자르크로선 바보짓이다. 그 순간, 30년 전장의 감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뭔가 놈들이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려나? 전에 듣기로는 검은 마나가 어쨌느니 한 것 같다만.”
“글쎄요, 아직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뭣보다 그런 방식을 처음부터 써 버리면 대번에 아쇼트 왕자의 지지만 잃을 것 아니겠습니까.”
내내 듣기만 하던 가신 하나가 설마 그렇게까지 나오겠느냐며 한마디 했다. 바크탕은 달리 대꾸를 하진 않았다. 바스마지안이 바로 반박하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펜자르크는 이미 상황이 녹록지 않지. 안 그래도 왕성의 절반을 날려 버렸다고 이미 추궁받는 상황에서 검은 마나를 쓰지 말란 법 있나.”
“그 말대로다. 인구 3천 명 이하의 작은 요지는 아직 결계주가 설치되지 못했으니 여전히 검은 마나는 위험한 대상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기사단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정말 위험하다면 자살이라고 해도 돌격을 시켜야겠죠.”
“궁정 마법사들도 준비시켜라. 그들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하오나 궁정 마법사들은 이곳 본성의 결계를 강화하고 마나의 순수한 본질을 지켜야만 하는…….”
바크탕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놈들이 검은 마나를 쓰게 되면 그냥 마법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만약 그게 도시나 마을이라면 학살이 되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권력을 바라는 욕망이란 그래서 무서운 법이지. 친구는커녕 부모 자식 사이조차 갈라놓는 무서운 독약이야. 달콤한 독약…….”
십수 년 전을 마지막으로 펜자르크를 보았던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더 그리했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지우는 바크탕은 문득 몸을 들썩였다.
“휴, 날이 추우니 늙은이는 정말 힘들군.”
“어쨌거나 기사와 마법사들에겐 내일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잿빛 수염의 영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운이 좋다면 주민들의 피해도 어떻게든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이곳 파르티즈 한 곳에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대량의 사체, 낭자한 피와 비린내.
익숙한 그 감각이 어째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걸까. 이 불안한 예상 아닌 상상을, 바크탕 변경백은 애써 억눌렀다.
* * *
“발사!”
―슝!
―슈웅!
이름 모를 작은 성채들의 반항은 끈질겼다. 때로는 서로 어깨를 마주한 것처럼 마주한 두 성채에서 일제히 서로를 위해 노포를 발사하기까지 했다.
“뭣들 하느냐, 얼른 투석기로 성벽을 허물어 버리지 않고!”
“무리입니다, 주군. 놈들과 우리의 높이 차이가 커서 우리 투석기의 사거리 안에 성벽이 들어오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것이냐, 공격해!”
아니나 다를까, 펜자르크는 천천히 근처의 망루 요새를 점령해 가며 포위해 항복을 받아 내자는 작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채 하나씩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 놓고 있으면 설사 내년 겨울이 오더라도 뚫지 못할 것이다. 차지할 수 없다면 불태우는 한이 있어도…….’
“공성탑을 밀어붙여라, 명령이다!”
“에이 씨, 이 언덕 위로 공성탑이라니 젠장!”
“까라면 까야지, 에이 참.”
이라크시스의 병사들은 열심히 돌산의 높은 경사 위로 공성탑을 굴리기 시작했다. 투석기도 급기야 거리를 한층 더 좁혀 성벽까지의 거리를 확보했다.
“놈들이 다급해졌군. 지금이다, 쏴라!”
“불붙인 통나무를 굴려!”
“쏴!”
두 곳의 요새로부터 일제히 돌을 곱게 깎아 만든 둥그런 포탄과 각종 돌멩이, 불붙은 통나무가 언덕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경사로를 올라오던 공성탑과 병사들, 사정권 안의 투석기들이 그 목표였다.
―쾅!
―우르르릉!
“끄악!”
“불붙은 통나무다!”
“무너지는 탑에서 떨어져!”
단 한 번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공성탑이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 뒤를 이은 통나무들이 닿을 때마다 나무로 된 공성 무기엔 불길이 치솟았다. 애써 불을 끄려 달라붙은 병사들은 특수기름으로 만들어진 불에 오히려 몸을 피하기 급급했다.
“놈들의 저항이 정말 완강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더더욱 항복하려 들지도 않겠습니다만.”
“오시야칸. 안 된다고 얘기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라. 이걸 쓰면 바로 손에 넣을 수 있을 게다.”
“아니…… 이걸 제게 주시다니.”
오시야칸의 손에 들어온 것은 까만 눈동자처럼 한점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검은 돌. 붉은색의 마정석을 활용해 끌어낸다는, 가장 무시무시한 마나 수정석이었다. 그 기운은 무척이나 꺼려지기론 전쟁이 평화보다 익숙한 오시야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방법 아닙니까? 만에 하나 이 무기를 썼다는 사실이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내가 결정한 일이다. 왈가왈부하지 마라. 여기서 엘레나군의 힘을 꺾지 못하면 동부의 영지와 가신들조차 굴복하지 않을 테지.”
“하…….”
오시야칸은 깊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검은색의 구슬은 어서 자신을 쓰지 않고 뭐하냐고 추궁이라도 하듯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그 현란한 유혹에 넘어갈 판이었다. 장군은 그 이상야릇한 느낌에 그만 구역질마저 느꼈다.
“제기랄.”
그러나 방법이 없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지금 계속되는 공세에도 이르카시스의 군병들만 무력하게 피해를 입는 상황처럼.
―쿠구궁!
―쾅!
요새에서는 쉴 새 없이 투석기 5문과 노포 18문의 사격이 이어졌다. 각각 인구 3백 명, 4백 명인 두 마을 요새 최고의 화력이었다. 마법사 같은 몸값 비싼 인재를 모실 수 없는 가장 현실적인 전투였다.
“중지, 사격 중지하라! 놈들의 움직임이 다시 보일 때까지 사격을 중단하라!”
두 마을의 사령관은 재빨리 측면의 마을 요새로 향하는 다리에 전령을 보내며 명령을 전했다. 곧 두 요새의 포격이 멈췄다. 커다란 구름이 연달아 피어나던 산허리는 불어오는 바람에 금세 시야가 깨끗해졌다.
“대장, 아래쪽에 놈들이 드디어 잠잠합니다.”
“벌써? 지레 지친 모양이로군.”
대장의 말에 병사들도 벌써 작은 침략을 하나 물리쳤다며 기쁜 낯빛을 지었다.
“역시, 이라크시스라고 해서 겁을 먹었지만 별 것 없었구나.”
“그럼 그렇지, 놈들이 어떻게 영주께서 갈고 닦으신 이곳을 점령할 수 있겠어?”
“아마 시간 좀 보내다가 돌아갈 거다. 너희들도 너무 헛되이 명예에 집착해서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지는 말고.”
대장이 그렇게 타이르며 막 병사들에게 밥을 내어오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르르
“어, 엇! 저게 뭐지? 이 진동 소리는……?”
“우와악! 성이 흔들린다, 대지가 흔들려!”
거센 지진이라도 온 듯 성벽과 마을 전체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이런 지진은 파르티즈엔 거의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건축물이 진동을 버티지 못하고 연달아 쓰러지기도 일쑤였다.
“맙소사, 저건……!”
그리고 그 진동의 리듬에 맞추어, 산허리 아래쪽 펜자르크군의 시신이 산같이 쌓인 곳. 모든 빛이 사라진 검은 구멍이 허공에 생겨났다. 그것이 오늘날 하야스단에 얼마나 유명한 것인지, 이 산골의 주민은 물론 병사와 대장조차 알지 못했다. 이런 낙후한 곳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저, 저 검은 공인지 구멍인지가 점점 커집니다, 대장! 우리 쪽을 향해 오는 것 같소!”
“제길, 놈들이 마법사를 데려왔나. 겁먹지 말고 마법사가 있을 만한 곳을 집중 타격해라!”
“투석기, 노포들 모두 발사!”
화급한 발사 명령을 뜻하는 붉은 깃발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당황한 노포와 투석기 사수들도 일단 되나마나 준비되는 대로 탄환을 쏘아댔다.
―퉁, 투퉁!
닥치는 대로 조준도 안 하고 쏘아댄 탄환들이 땅에 튕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니, 사실 엇맞거나 직격하는 경우도 적진 않았다. 그러나 경험 넘치는 사수들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탄환은 이 검은 공에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었다. 이 느려 터지고 맞추기도 쉬운 거대한 공은, 그 표면에 닿는 모든 물질을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스르륵!
“아, 아니 저럴 수가!”
“검은 마법이 다가옵니다, 300보!”
“모두 은폐해라! 주민들은 신전으로 옮겨!”
“대피해라!”
그러나 극심한 혼란에 빠진 성벽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소식이 전달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성벽 위의 병사들만 혼란이 가중되었다.
“으아아, 200보…… 아니, 150보!”
“속도가 점점 빨라져……부딪친다!”
“제기랄! 발사!”
겁먹은 궁수까지 합류하며 쏠 수 있는 모든 것을 검은 물체를 향해 발사했다. 역시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무력함을 직접 확인한 병사들은 숫제 무기를 내팽개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겁먹은 누군가는 성가퀴를 붙잡거나 땅바닥 위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50보…… 부딪친다, 으아악!”
“꽉 잡아!”
―쿠르르릉!!
거친 폭음이 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 같이 와르르, 도시의 기반을 이루는 돌산이 모래처럼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진동을 느끼면서 주민 7백 명과 그 고향은 한 줌 재로도 남지 않았다.
“……항복하지 않는 놈들에게 이곳이 아주 절절한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오시야칸, 그 아티팩트를 잘 보전하고 에너지가 모자라거든 내게 오거라. 언제든 채워 주마. 항복하지 않는 놈들은 망설이지 말고 존재를 소멸시켜 버려.”
펜자르크가 내린 명령은 바로 그것뿐이었다. 승리, 점령, 지배. 따르지 않는 자에겐 존재마저 허락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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