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쥐덫, 파르티즈 (2)
“그래, 영지로 돌아간 동안에 조용해서 뭘 하나 했더니 또 한 건 하고 있었던 거였네.”
“그렇게 됐지. 뭐 그래도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한 닷새나 됐나.”
전장에서의 하루는 일상의 한 달이나 마찬가지라고 엘레나가 쏘아붙였다. 네마냐는 어쩐지 이 성기사 대장이 조금 초조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초조한가 보군. 파르티즈 때문에?”
“……잘 알면서 그러는 거지?”
“흐……. 걱정이 참 많아. 아무렴 우리가 갈 때까지 파르티즈가 버티지 못할까 봐?”
마치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한 네마냐의 지적에 엘레나는 쓴웃음을 한입 베어 물었다. 안 그래도 오늘 제눌트가 비밀리에 찾아와 다짜고짜 자신에게 따져 물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으므로.
“뭔가 이미 한바탕한 표정인데. 제눌트 장군?”
“그래. 아쇼트를 묶어 놓고 언제든 회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더라고. 물론 우리 편으로 말이지만.”
“휘유, 그거 대박인데. 적의 3할을 없애면서 동시에 우리 군사로 만들어 버린다니. 하지만 제눌트가 그렇게 빈번하게 왕래를 해도 누구 하나 눈치 재지 못하는 건가?”
아주 시의적절한 이야기였다. 엘레나는 마침 어제 점심, 뜻밖에도 자신의 동생이 방으로 들이닥쳤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쾅!
거친 소리와 함께 기사단 본부 1층 입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훈련이 끝난 기사들이 나간 상황.
―웅성웅성.
아래층에서 누군가의 시끄러운 고함과 연이어 달려드는 소리들로, 조용했던 기사단 본부가 혼란스러웠다.
“무슨 난동이지?”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필로칼리스가 마침 갈아입은 훈련복을 내려둔 채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아래층으로 근위기사가 내려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1층의 떠들썩한 소란은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자리를 옮겨 2층 입구가 있는 계단을 향해 다가온다.
“……뭐지?”
필로칼리스를 내려보냈는데도 해결은커녕 오히려 시끄러워진 느낌이었다. 클로루스가 엘레나의 눈치를 보곤 손을 들어 자신이 나가 보겠다고 나섰다. 엘레나는 잠시 기다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란의 원인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냐. 기다려.”
“하지만 이래서야 소란스러우니…….”
“저 소란의 목적은 이곳일 테니. 걱정할 것 없어. 휴, 좀 쉬나 싶었더니.”
읽던 책을 덮고 내렸다. 소란 사이로 들리는 불안하고 낭랑한 목소리. 저 목소리의 주인공만큼은 엘레나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남매로 태어나 같이 지낸 것만 족히 15년은 될 테니까.
―쾅!
마침내 소란은 계단을 올랐고,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앞선 자리엔 울긋불긋 화려한 색상을 지나칠 정도로 덕지덕지 바른 청년이 서 있었다.
“놔라, 이것들! 일개 기사들이 일국 왕자의 발목을 이렇게나 붙잡아도 되나?”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소!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
“에이, 시끄럽긴. 누님! 내가 왔소!”
클로루스를 비롯해 여러 기사들이 만류해도 소용없는 철부지가 들어와 있었다. 엘레나는 그 천진난만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쇼트…….”
“누님, 어떤 재주인진 모르지만 용케도 제눌트, 그 인간을 구워삶으신 모양이군. 신성 기사의 이름을 달고도 부끄럽지 않으신지?”
충격.
이 소리가 튀어나오자마자 기사들도 소곤거렸다. 필로칼리스가 서둘러 기사들 입단속을 시켰지만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 될 터였다.
“아쇼트, 또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난리를 치는 거냐. 내가 대관절 제눌트 남작과 무슨 이유가 있어 모의한다는 거고.”
“당연한 것 아니겠어? 누님이 나를 엿먹이고 어떻게든 왕위계승의 권리를 빼앗아가려는 수작이겠지.”
너무나 정확한 지적이었다. 평소의 아쇼트가 도저히 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설마 이대로 손에 넣는가 싶었던 펜자르크의 군대가 그대로 우리 병력에서 이탈하는 건가 싶었다.
‘설마 제눌트가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아니면 우리 쪽이 비밀을 흘리기라도 한 걸까.’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아쇼트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어디서부터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답이랄 만한 지점은 떠오르지 않았다.
“흠, 일단 손님이 왔으니 허투루 대할 순 없겠군. 앉아라. 클로루스, 차를 좀 부탁하자.”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자리를 비워 줘. 그리고 필로칼리스는 기사들 입단속 시켜 놔.”
―탁.
“자, 문이 닫혔으니 어디 누님의 그 잘나신 인재 채용 방침을 들어보실까.”
“너, 왕족이야. 그따위로 말을 쓸 거라면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하, 어차피 왕이 되기만 하면 내 방식이 곧 왕의 방식이 될 건데 뭘.”
“이 자식이…….”
원래부터가 제멋대로긴 했지만 한 차례 고블린 전투의 대망신을 겪은 뒤로 아쇼트는 조금 더 달라진 듯했다. 마치…… 미숙하던 녀석에게 광기가 한 점 묻어 버린 느낌이랄까.
“용건을 잊을 뻔했군. 대체 누님은 제눌트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바가반드 백작 이후로 계속 인재 영입에 성공하는군, 백전백승이야.”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릴…….”
일단 둘러대는 엘레나를 보며 아쇼트는 한껏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거짓말 말라고. 요즘 제눌트가 누님과 접촉이 잦다는 사실을 내가 언제까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허, 연합군 회의가 있었고 작전 정보를 공유해야 하니 회의 시에 이야기하긴 했지. 그게 접촉이니 음모니 거품을 물 일이야?”
“그렇지. 누님은 결혼을 빌미로 얼마든 필요한 동맹자를 끌어들일 수 있잖아? 내 충성스러운 장교들이 경고하더군. 그렇게 제눌트만 일단 구워삶아 버리면 그를 조종해서 날 병신 취급해 버릴 수도 있을 테고.”
일단 개인적인 접촉이 있었다는 건 새어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상대측 충성파 장교와 가신들이 작전 회의 자리에서 제눌트와 엘레나의 사이가 개선된 것을 수상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성도의 정보망을 내가 쥐고 있길 다행이군. 저런 의심도 할 줄 아는 놈이 있었다면 다른 도시에선 반드시 스파이 짓을 했을 테니까.’
고블린 족장 우레이미야의 무지막지한 검은 마나 공격에 중상을 입은 키메라는 개선 직후 켈리도니온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주요 인원과 시설을 대상으로 보호와 관찰이 강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자칫 노출되기 쉬운 제눌트-엘레나의 접촉을 보호해주는 방패가 되어 주었다.
“다른 소린 다 참아도 내가 혼인을 빙자해서 동맹을 끌어들인다니, 그런 모욕은 두고 볼 수가 없군. 그게 지금 할 소리냐, 네가?”
“왜, 그게 누님의 최고 무기가 아닌가? 실력자에게 꼬리 쳐서 꼬여내곤 정당한 왕위의 계승자와 왕실을 작살…….”
―퍽!
“으억!”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집이 마치 자석에 붙기라도 하듯 왕자의 고운 뺨을 덮쳤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아쇼트가 분노로 나머지 다른 뺨도 붉게 물들이니 여전히 의자에 앉아 내려보는 엘레나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헛소문을 들었는진 모르겠다만, 제눌트 같은 얼간이와 나를 엮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인간은 내 제안에 모욕만 던지고 왕가의 혈통을 보존하겠다며 뒤돌았으니까.”
“……하, 역시 몇 년이 흘러도 성깔만큼은 우리 누님도 미친놈 수준이라니까.”
“나를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놈한텐 얼마든지 미친놈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그게 여자로서 최전선에 섰던 나의 일상이기도 하고.”
칼집을 거두어들인 엘레나는 이어 자신의 빈 찻잔을 두고, 동생이 채 마시지 못한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대리석 바닥에 부어 버렸다.
“이제 손님께서 차도 다 드셨으니 할 일은 없는 것 같군, 그렇지?”
“정말 마지막까지 정나미 떨어지게 하는 덴 최고라니까. 대체 뭘 보고 아버지하고 숙부들이 다 저런 걸 고른 건지.”
“왜 그런지는 다음에 전장에서 만나면 보여 주지, 동생아. 그때는 오늘처럼 안전한 검집이 아니라 날카롭게 잘 다듬은 칼날이 너를 맞겠지만 말이지.”
“크흠.”
먼지를 털어내듯 뒤늦게나마 체통을 신경 쓴 아쇼트는 잠시 뭘 캐내기라도 할 것처럼 엘레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나가.”
“후후, 알았어. 나가 드리지.”
그러나 끝내 엘레나의 눈빛으로부터 무언가를 더 얻어내진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돌아서는 아쇼트는 확신을 얻지 못한 눈치였다.
‘놈, 사실 확신을 한 건 아니고 부하들이 하도 외쳐대니 달려온 모양이로군.’
적의 주요 펜자르크파 가신들이 한결같이 판단력이 좋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만약 펜자르크파 가신들이 좀 더 머리가 좋거나 아쇼트의 감각만 좋았더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내게 대뜸 달려와서 감정 싸움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조심스럽게 제눌트가 이전과 뭐가 달라졌는지를 파악했겠지.’
오히려 지금 와서 엘레나에게 제눌트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도리어 제눌트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준이었다. 그럴 정도로 근거 없는 의심병에 불과했다.
‘가련한 녀석. 도대체 무슨 능력에도 벗어나는 짐을 지겠다고 펜자르크의 마수에 알아서 걸려든 건지.’
결국 부왕이 늙고 모후는 이미 사망한 상황에서 엘레나 자신마저 기사로 밖을 나다닌 게 문제였던 걸까. 방치되었던 왕자는 엉뚱하게도 자신에 알맞지 않은 과한 야망을 버텨야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잘못된 퍼즐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건지…….”
그나마 다행인 건 제눌트가 의심을 받지 않고 오히려 신뢰를 얻으리란 것이다. 제눌트가 실제로 처음 엘레나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남자에 의한 적통 계승을 지지한 건 또 사실이기도 했으므로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제눌트가 신뢰를 오히려 더 얻는다면 이제 저들은 파르티즈로 가지 않겠지.”
제눌트가 오히려 엘레나를 견제하는 역할을 과대평가하며 펜자르크에 합류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밀어붙인 상태였다. 그 직후 재차 합류를 요구하는 펜자르크의 요구가 왔지만, 아쇼트로서는 당연히 고민에 빠질 것이다.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겠으나 파르티즈로 합류하여 승리하면 펜자르크의 능력이 강조될 것]
[시간은 걸리더라도 엘레나와 바난드 왕실군 6할을 묶어놓는 커다란 공훈을 가져갈 수 있는 현재의 상태 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만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전자를 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아쇼트의 상황에선 정답이랄 수 없다. 왕으로서의 권위. 그것을 아직 세우지 못한 아쇼트로선 위험하더라도 두 번째 선택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국은 실제로 믿든, 그렇지 않든 우리 젊은 왕자께서는 제눌트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군.”
엘레나의 상세한 대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네마냐가 내린 해설이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 이야기에 타는 목을 축였다.
“최근 왕성에서 온 보고로는 파르티즈 외곽에서 이라크시스, 케시번, 카르시 세 영지의 병력이 공방전을 시작했대.”
“드디어 중요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군. 놈들이 버티느냐, 우리가 적의 병력을 가지고 돌아가느냐. 천한 말로는 똥줄이 탄다죠. 전하.”
“흐……. 그 말이 맞네. 똥줄 타는 일정이지. 고블린 전쟁을 고려하면 말이야.”
오랫동안 영상을 송수신하느라 무척이나 강한 열을 내놓고 있는 영상구. 네마냐는 삽입한 마정석의 에너지가 다 닳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많이 부족하진 않았다. 엘레나가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고블린이 문제지……. 지난번과 이번 승전 덕분에 이젠 기사와 병사들까지 사실상 승리가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대충 모양새만 보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물론 두 사람은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이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네마냐, 네 생각은 어떻지?”
“사람들의 희망을 고려할까, 아니면 사실만을 고려해 볼까.”
“여기서는 사실만이면 충분하죠. 내게 정치적인 이유는 공공장소에서나 쓸 일이니까.”
“놈들은 아직 꺾이지 않았어.”
네마냐의 말은 덤덤했다. 검은 마나의 힘이 꺾이긴커녕 오히려 마지막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들의 힘의 원천도 아마 그곳에 있을 터였다.
“역시나…….”
“물론 전쟁 자체는 지금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지. 놈들은 국경 밖으로 잠시 물러났고, 아마도 족장이 부상을 입은 탓이겠지. 적도 지금까지 2만 가까이 죽었을 테고.”
물론 그건 고블린에겐 별문제도 아니다. 고블린 암수 한 쌍은 1년에 여덟 마리, 열 마리까지도 자식을 낳을 수 있다. 세상을 먹어 치운다는 뜻의 오그르는 그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1년에 넷씩은 낳는다.
“지금까지 많이 죽여서 겨우 균형을 이뤘지. 그러나 아마 우리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 달 안으로도 놈들은 다시 나올 거야.”
“한 달! 그건 너무 이른걸. 제국군의 주둔과 철병조차도 겨우 확정될까 말까 한 시간인데.”
어쨌든 고블린을 몰아내면 여유가 생기리라 생각한 네마냐로서도 적잖이 힘이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그래도 10년 동안 속수무책으로 방치한 것치곤 과업이 여전히 할 만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네마냐, 그럼 네가 얘기하던 고블린 성채에 대한 공격이란…….”
“그래. 공격해야 한다면 지금 바로 공격해야 한다는 뜻이지. 한 주라도 늦으면 우린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공격을 받게 될 거야.”
무서운 예언. 실제의 고블린 전쟁은 그리 길지도, 파괴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실은 저들이 온 힘을 동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족장 우레이미야가 전장에서 아주 잠깐 노출했던 그 힘을 단순한 무기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인 ‘검은 던전’으로 열어낸다면?
“파르티즈를 적의 덫으로 풀어 두었더니 이젠 고블린이 다시 우리들의 덫이라……. 하, 정말 바람 잘 날이 없네.”
“일단 제국군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때까지 최대한 움직여 보자고. 가능하다면 고블린 본진을 바로 때리는 것을 포함해.”
결론은 간단명료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거기까지 이를 모든 순간과 고통, 갈등을 생각하면 골머리를 앓을 뿐. 이 순간 두 사람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신들에게 새로운 덫, 고블린의 도전이 다가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과 함께.
- 17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