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쥐덫, 파르티즈 (1)
―파르티즈, 2월 10일.
이 계곡에서 겨울바람은 오히려 2월 들어 더 차가워졌다. 혹독한 겨울바람에 성벽 위를 애써 돌던 초병들도 몇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금세 뜀 걸음이 되었다.
“아 씨, 겁나게 춥네.”
“안 되겠다, 빨리 들어가자고.”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삼십 년을 한결같이 영지에 군림했던 바크탕이다. 평소엔 어떤 문제도 흐지부지하는 편이었지만 전시 초병 임무에 대해서만은 철두철미했다.
물론, 지금처럼 경우 없는 계절만은 그 역시 예외일 수밖엔 없었다. 초병들이 재빨리 뛰어 인근의 경비탑으로 옮기는 장면까지, 관저의 창문으로 바크탕은 지켜보고 있었다.
“올겨울은 무척 춥습니다, 주군.”
“바스마지안.”
바크탕을 지난 18년 동안이나 따르며 왕국의 험한 남서부 국경을 지켜온 자르마이르 바스마지안(Zarmhair Bhasmazian). 기사단장 자르마이르는 호시탐탐 왕국 침공을 노리는 인근 탐욕스러운 영주를 막은 일등공신이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좀 어떻나.”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크게 세 갈래로 이라크시스, 케시번, 칼레시 세 이웃 영지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곧 우리 영지에서 나갈 수 있는 모든 출구군. 확실하게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야, 우리 펜자르크군은.”
그렇게 며칠 전부터 펜자르크군이 움직인다는 경고와 각종 첩보는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파르티즈의 병력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적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동시에 근교로 진입을 하려들 게 뻔합니다. 그편이 우리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에 적합하다고 보겠죠.”
“나름 머릴 굴렸군. 어차피 일점 공세로 우리 영지의 방어를 뚫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지.”
파르티즈는 다른 분지평원이나 계곡평야에 위치한 영지들과는 많이 달랐다. 평야란 거의 없는 험악한 절벽과 좁다란 벼랑에 면한 거주지들이 많았다. 바가반드도 어지간히 산골짜기에 끼어 있어 가난하다지만 파르티즈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펜자르크 정도라면 아마 여길 포위하는 것 자체가 제살깎아먹기식 작전이란 걸 모를 리가 없지. 아마 지금쯤이면 뼈저리게 느낄걸.”
“그러나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을 겁니다. 분명히 자신의 몫인 영지로 인정받았는데도 점령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건…….”
“맞다. 이런 바위산의 영지 따위 원래라면 관심도 없었겠지만 뜬금없게도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자신의 무력함만 드러나고 말겠지.”
평화조약 당시 엘레나가 네마냐와의 논의 끝에 아주 자연스럽게 파르티즈를 넘겨주기로 합의했다는 건 대단한 낚시질이었다. 욕심이 많은 서부 영주들이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아마 전쟁은 훨씬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국의 안전을 위해 이 영지와 영지민의 안전을 걸어야 한다니, 미묘합니다.”
“자르마이르, 자네…….”
“아니, 충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도리어 위태로운 지경에 제 발을 내디뎌야 한다니.”
자신의 인생 절반 이상을 바쳐가며 지켜낸 제2의 고향일 것이다. 그건 바크탕 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랜 옛날의 고향마저 잊어버리고 어떻게든 이 험한 산지를 옥토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었다.
“아쉽게도 이곳을 지킬 수는 있어도 부유하게 하기는 어려웠지. 그런 점에서 음, 그대에겐 내가 접했던 제안을 이제는 이야기해도 되려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바스마지안은 갑자기 상관없는 이야기로 넘어간 주군을 황당하게 보았다.
“사실 포위전 시작 직전에 바가반드로부터 비밀 통지문을 하나 받았다네.”
“바, 바가반드 말씀입니까? 그 소영주로부터?”
“음.”
고갤 끄덕이더니 바크탕은 서랍을 열고 몇 번 접어놓은 종이를 끄집어 기사단장에게 주었다. 낯선 질감의 그 종이를 받은 바스마지안.
“이건…… 양피지가 아니군요. 심지어 남쪽에서 수입해 쓰는 파피루스도 아닌데.”
“종이라고 하더군. 원래는 나샤와 북방에서 발명되었던 건데 그 피난민들이 바가반드에 정착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모양이야. 제법 쓸모 있어 보이지?”
“허…… 그렇군요.”
바가반드에서 일어나는 일은 도통 영문을 모를 일뿐이라며 혀를 내두른 바스마지안. 하지만 사실 가장 충격을 받을 부분은 그다음, 그 종이 서찰에 적힌 제안이었다.
“……잠깐, 이건 전쟁이 끝나면 영지의 재건과 부흥을 돕겠다, 이런 소립니까? 그것도 바가반드 백작이 직접 약속한?”
“그래. 자신은 일개 바가반드의 재건과 발전뿐만 아니라 장차 하야스단 전체가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던가.”
“너무 번지르르한 말이라 도리어 의심이 드는 소립니다만, 그래도 유혹이 꽤 많이 되는 건 사실이군요.”
“허허, 어찌 그리 나와 같은지 모르겠어. 아무튼. 바누라트 섭정이나 엘레나 전하의 평가로 보아도 의심할 만한 사람은 아니야.”
하야스단의 재건과 완전한 자립. 그것을 위한 시작점으로서의 바난드 자립. 그건 어지간한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은 가져볼 만한 목표였다. 다만 그 실현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서 문제일 뿐.
“뭐, 그저 듣기 좋은 얘기일 수도 있지. 얘기라도 듣고 힘내서 싸우라는 뜻일 수도 있고.”
“진짜 그런 거면 당장 저 밖의 놈들을 때려잡고 바가반드로 달려가서 혼내 줄 겁니다.”
“크하하, 아직도 기세가 살아 있군.”
창문 밖으로 문득 시선을 던지는 바크탕. 다시 성채 안과 밖으로 소담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 몇 시간 뒤면 골짜기 바깥으로부터 파르티즈로 향하는 길목은 꽁꽁 얼어붙겠지. 이 혹독한 겨울이 영지를 피폐하게 만든다만, 정작 위기 시엔 영민을 구하는 방패막이가 된다. 바크탕이 심지어 자신의 군대를 못 믿더라도 최후의 보루로 믿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가반드를 그 정도로 부강하게 키워 냈다면, 우리 파르티즈 역시 새로운 희망을 품어 볼 순 있겠지. 비록 나는 지키는 데만 간신히 성공했을 뿐, 부강하게 만드는 데는 여지없이 실패한 게 고작이지만.”
“주군…….”
“감상에 젖지는 말게. 냉정한 자기 평가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뒤처졌던 자라고 해서 영원히 뒤에만 처져 있으란 법은 없지 않나. 우리 같은 너구리 둥지 같은 피폐 지역에도 따뜻한 볕이 들 날이 오겠지.”
파르티즈의 성채와 그 성채를 사방팔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600개의 크고 작은 요새. 작게는 병사 열 명짜리 보루부터 주민 삼백 명 남짓한 작은 마을, 수도원, 큰 마을까지. 그 모든 것이 홀로 굳건히 요새화하고 적을 기다렸다.
“으음, 어찌 되었든 좋은 날이 오려면 지금의 궂은날을 잘 이겨내야지.”
“놈들이 두려우십니까?”
바스마지안이 혹시나 해서 요즘 부쩍 늙은 바스탕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요란한 코웃음과 함께 바스탕은 바스마지안의 뒷머리를 노리고 손을 날렸다.
“이크, 그냥 걱정된다는 말씀입니다.”
“놈들이 두려울 게 있나. 피해를 입을 영지의 관리자로서 당연한 태도일 뿐. 놈들이 정말 자신이 있다면 당당하게 이곳으로 오라고 하세.”
“놈들이 수백 곳의 강철 요새를 뚫고 금성철벽의 이곳까지 올 수 있다면, 말이군요.”
두 사람은 거기까지 말을 마친 뒤 무서울 정도로 눈이 쏟아지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벌써 십여 분 넘게 눈이 쏟아지는 모양이지만 눈발은 결코 약해질 기세가 아니었다.
“놈들이 단념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놈들에게 악몽의 겨울을 선사해 주어야겠지.”
“동감입니다.”
그렇게 파르티즈는 침략자들에게 처절한 패배나 격퇴가 아닌, 무한한 소모전을 강요할 ‘수렁’이 될 것을 다시 각오하고 있었다.
* * *
“예. 다음 분, 말씀하세요.”
“아, 네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타티온에서 피난민촌의 이리니폴리스 근교에 농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리니폴리스 근처, 지주의 이름이?”
“아, 타마르라는 사람입니다. 최근 상속권을 두고 둘째 아들과 소송이 있었던 곳이죠.”
“아아, 그 동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메네라는 하급서기관들이 바쁘게 민원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주의 지시로 토지관리위에 제대로 소작 계약 신고가 진행되는지 감시하는 중이었다.
‘용의주도하기도 하지. 토지관리위에까지 지주들의 인적 관계가 끼어들었을 가능성을 경계하다니, 참으로…….’
영지 공공문서고의 열람기록이 유출된 사건 이후로 네마냐와 미하일은 각별하게 감시와 통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하……. 그럼 신고를 마쳤으니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다음!”
“저는 자루아나 북쪽의 강 건너 10스타디온 지점에…….”
하메네라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지역 유지 층에서 수상한 시도를 하진 않았다. 영주가 엄포를 놓고 재무관이 타협은 없다 쐐기를 박은 이상 당분간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번에 영감들이 들고 일어선다면 그땐 토지위원회 자체를 접수하거나 무력화하는 방향이겠지.’
그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미 양측의 대결은 다음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메네라는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바짝 긴장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고블린과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은 데다 왕국의 내전도 오히려 격렬해지고 있는 상황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영지 내부의 분란마저 각오하고 네마냐는 바가반드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그리고 그 역할의 중요한 한 몫을 하메네라 본인에게 기꺼이 내어준 것이다.
“저, 하메네라 선배님?”
“응? 뭐지? 다 됐나?”
상념에 잠겼던 하메네라의 의식을 한창 접수 업무를 보고 있던 후배 녀석이 깨뜨렸다. 불편한 감정을 애써 쓸어내리며 어느덧 선배가 되어 버린 하메네라는 일어섰다.
“완료했습니다. 5천 농가 중 소작민인 2천 가구의 계약에 대한 신고가 완료되었습니다. 적어도 영지에서 파악 중인 소작농가는 거의 전부 등록한 것 같습니다.”
“무난히 잘 끝났군. 난리라도 날까 했더니.”
“이를 말이겠습니까. 저희야 딱히 지주들과 관계는 없는 이들로 선별이 되었으니 괜찮긴 해도 긴장은 하게 되더군요.”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이 녀석들은 잘 모르겠지. 그러니 사실 지금은 사건의 파장이 진정된 게 아니라 폭풍전야란 걸 모른다고 뭐라 할 건 아니었다.
“그래, 고생 많았어. 이 길로 바로 영주님께 보고드리도록 하지.”
* * *
“빨리 끝났군. 다들 기다렸나 본데.”
“적절한 개혁 정책에, 농민들에 호소할 만한 부분을 넣으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마치 내가 교묘한 이간질을 한 것 같잖아. 아니, 사실이긴 하구나.”
보고에 올라온 종이 서류 몇 장을 대충 훑어본 네마냐는 이내 접어서 서류함에 넣었다. 세세한 사항은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 미하일이 부하 서기관들에게 넘겨 처리할 일이다.
“구체적인 사정이야 어찌 됐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게 내게는 중요하니까 말이지. 수고했어. 주민들의 의견은 어떤 것 같아?”
“아침에 많이는 아니고 근처 마을 두어 곳을 조사해 봤습니다. 조사관들은 절반이 긍정적이라고 얘기하더군요. 나머지는 무관심일 뿐입니다만.”
“직군이 다양해지다 보니 흥미로운 반응이군.”
불과 1년 전처럼 영지가 대대로 살아온 농민들이 전부였다면 벌써 영지가 뒤집히고 난리가 났을 일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이든.
“우선은 좋은 일이니 다행입니다. 그럼 확인하신 서류는 미하일 경에게 넘겨 그대로 시행하라고 전할까요?”
“그래. 토지위원회에 세부 서류를 준비해서 각 계약 건을 상세 등록하고, 관리를 맡기자고. 거기서부터 다시 싸움이 시작되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뚫어낸 이상 절대 지면 안 되겠지.”
“재무관께도 요지를 잘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믿지.”
거기까지 네마냐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끝이었다. 법과 영지의 공권력이 이제 우위에 있다. 자원 독점을 바탕으로 영지의 전쟁 수행을 위한 능력은 강화될 테고 영지에서도 강자에 의한 착취를 견제할 수 있을 터.
“그럼 이제 다시 시선을 돌려야겠군.”
“파르티즈로 말입니까?”
“음, 쥐덫도 충분히 중요하지. 하지만 쥐덫의 미끼는 어디까지나 덜 급한 적의 시선을 돌리는 게 최선의 역할이니까.”
네마냐의 시선은 남서쪽이 아닌 북동쪽을 향해 돌아갔다. 차갑게 성에가 얼어붙은 창문, 저 너머로 마시스 성산과 그 주변의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너머 한참 먼 곳엔 고블린의 수수께끼가 가득할 본거지가 있으리라.
“이제 고블린과 결착을 낼 때가 온 거지. 잠깐의 휴식도 이걸로 끝이야.”
“그렇다는 건 드디어…….”
“응, 그렇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한 영주는 책상 한편에 놓아둔 영상구를 가져다 자신의 앞에 두고 덮어 둔 비단 천을 끌어내렸다. 그리곤 켈리도니온 쪽의 마나 집중석에 매개해 놓은 백색 마나를 통신구 아래 기계 장치에 삽입했다.
―지잉.
“우선은 우리의 동맹이자 이웃 영지의 영웅적인 항전을 도와주고, 북쪽으로 바로 시선을 돌려야겠지.”
“아…….”
켈리도니온에 머무는 왕녀와의 통화를 서두르는 네마냐. 그 모습을 보며 서기관은 자신이 사는 세계의 중요한 국면 하나가 자신의 눈앞에서 지나간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전신에 돋는 소름을 절절히 느끼며 하메네라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든 영주의 눈빛을 지켜보았다.
- 17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