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일타쌍피 (2)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은 출발선을 이유로 공짜로 남의 노력을 갈취하는 구조를 놔두지 않을 것이다.”
네마냐의 선언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단순히 누군가 하나에게 죽음을 내리는 게 아니라 낡아빠진 체제에 대한 사형선고.
“……지금 그 이야기는 우리 기존의 주민들을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소리 아닌가!”
아펠 발룬다, 그 노인은 마치 네마냐의 이야기에 트집을 잡을 수 있겠다고 여긴 듯했다. 공세를 늦추긴 오히려 영주를 탄핵할 수 있는 ‘내환죄’를 끌어왔다.
“영민의 안전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해치려 드니 이건 영주의 임무를 버린 것이다!”
“…….”
그러나 홀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작농들은 지주들의 눈치로 자리를 지키곤 있어도 호응을 보이진 않았다. 이야기가 그들로선 어려워서 반응하기 어렵기도 하고, 대충 알아들은 내용으론 소작농 자신들에게 오히려 유리했다.
‘그럼 이 지주 놈들이 설마 자기들 이익을 지키려고 우리를 선동한 건가?’
소작농들은 지주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지위였고, 아는 것도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눈치를 채기 시작하면, 그들 사이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퍼져 나간다. 속닥이는 소작농들의 눈치가 꽤 살벌해져 갔다.
‘빠르군. 확실히 도서관으로 글자를 보게 한 효과를 여기서 얻는 건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네마냐는 그렇다면 지금의 효과를 강조할 만한 수단이 뭘까 생각했다. 결국 답은 분명했다. 저들 세력의 규모를 이루는 소작농을 이탈시키는 것이 필승의 길.
“다시 한번 약속하겠다.”
네마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발짝 나아갔다. 미하일의 어깨를 짚고 수고했다고 감사하는 말을 해 주었다.
“이번에 입법된 법령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하나는 빠르게 발전되어 가는 영지의 현실에 맞추어 이젠 제법 풍부해진 화폐로 세금을 내고 받는다는 것이다. 이제 더는 곡물 가격에 따라 세금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즉, 풍년이 들어도 세금으로 내야 할 양이 폭증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또한 중간상인과 지주들의 장난을 막는단 뜻이다. 생계와 관련된 문제론 눈치가 빠른 농민들은 네마냐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다는 건 진짜…….”
“면세 철회와 보조금 취소는 어떻게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럼. 그것도 그대로입니까?”
“헛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푼돈을 아껴서 불만을 사느니 마정석 광산에 인부를 더 들여보내는 게 이익이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미 12만 인구 가운데 성인만 6만이었다. 거기서 군인 1만, 농부 5천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마정석 광업, 제조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인구 분포만 보더라도 농업은 일부러 찾아서 들어갈 이유가 없는 사양 산업이었다.
“오히려 지금 첫 번째와 두 번째 법령을 도입해서 자영농과 소작농에게 광범한 법적인 보호를 제공할 거야. 지주에게도 도움이 되는 기존 면세 혜택은 역시 제공할 거고.”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면 지주를 때려잡고 소탕해야 할 것 같은 눈치다. 하지만 역시 그런 방식도 네마냐의 맘에 들지 않긴 마찬가지다.
‘소작농들은 달리 소를 가지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지. 지주들이 소유한 방앗간, 대장간, 그리고 소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도록 지주들을 남겨 두는 게 그나마 농사 효율을 올리기에도 좋겠지.’
이미 농업으로 영지에 식량을 100% 공급한다는 건 포기했다. 적어도 획기적인 비료법이라도 공급되지 않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급자족은 안 되더라도 최대한 농업의 비효율을 줄여나가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었다.
“불만이 있는 사람은 영지를 떠나도 좋아.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지주로 행세를 하거나 밭을 갈기를 원한다면 이 법을 따라야 한다.”
“영주님의 말씀대로다. 이 법은 발표가 이루어진 오늘 아침부터 적용되니, 불만이 있는 사람은 민회에 상정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든지, 지키기 싫다면 떠나면 된다.”
미하일이 아주 단정적으로 내리눌렀다. 서슬 퍼런 엄포는 그동안 바드란 가문의 장남과 지역 유지들의 관계로 유지되던 어중간한 타협도 끝났단 뜻이다.
‘내 지위가 불안정한 동안엔 어쩔 수 없이 협조를 받아야 했지만, 지금에서야 굳이?’
어깨를 으쓱한 네마냐의 생각이었다. 아펠 발룬다는 나자리안이 조금이라도 동요하긴커녕 오히려 더 강경하게 나선 것에 아연실색했다. 반란을 일으켜도 될 법한 기세로 들어오긴 했지만 진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연이은 고블린 전쟁의 승전보로 어느 때보다 기사와 군대, 주민의 지지가 커진 상황]
이젠 농민들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단지 5천 명 남짓. 그들 중 반기를 든 지주들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자신들의 소작농 500명 정도가 고작.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버텨 내려던 자신들의 저항이 이젠 끝이란 걸까.
“그…….”
“어떡하실 겁니까, 발룬다 영감!”
“지금 영락없이 우리가 반란군으로 몰려 토벌당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있었으면 협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진, 진정하게들. 이대로 흔들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네, 기왕 모였다면 최대한 버텨서…….”
하지만 이미 사정없이 흔들리는 지주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 뿐이었다. 그들에게 발룬다의 영향력은 전혀 미치지 않고 있었다.
“뭐 하나, 다들?”
네마냐는 문득 고개를 들어 지주들에게 힐난하듯 물음을 건넸다.
“헉.”
지주들은 어느샌가 주변을 가득 메웠던 소작농들이 전부 모습을 감췄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 이 넓은 홀에 한때는 가득했던 자신들의 편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당신들의 세력은 지금 이와 같다. 소작인을 동원해서 내게 뭘 보여 주려는 생각은 삼가도록 해. 그리고 곧 재무국 토지위원회에서 소작 계약 전부를 심사하고 등록할 거니까 혹시라도 몰래 숨길 생각은 말고.”
그렇게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한 체제 개편의 조치는 발룬다의 과민반응 덕분에 사정없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주 고맙게도, 네마냐는 지주-소작 관계의 불편한 고리에 ‘영지 행정력’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새로운 바가반드의 길을 향한, 아주 사소한 듯하면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 * *
―켈리도니온.
파르티즈에서 펜자르크 백작과 그 동맹 영주들이 포위를 시작했다는 소식. 몇 주 내내 의기소침하여 군을 지휘하지도 못한 채 숨어 있던 아쇼트에게도 전해졌다.
“드디어, 펜자르크 그 양반이 움직였어!”
“축하드립니다.”
아쇼트가 오랜만에 듣는 낭보에 웃음을 터뜨리니 몇몇 가신들이 맞장구를 쳤다. 연이은 고블린 전쟁에서 도리어 망신이나 당했던 이들로선 차라리 주 전장인 파르티즈로 가길 원했다.
“이리되었으니 고블린 전쟁 따위는 엘레나에게 맡겨 두고 가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놈들 부대의 6할을 여기 묶어 두고 우리가 마저 아군에 합류하면 숫자로 적을 압도할 겁니다. 왕성 아니를 다시 한번 점령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조금 전략적인 식견이 있는 가신들이 타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귀가 얇은 아쇼트는 순식간에 그쪽으로 기울었다. 여전히 부상을 입어 상당수 인원은 곳곳의 부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 그것도 괜찮겠지? 우리가 여기서 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아닙니다. 그건 펜자르크 백작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뭐?”
사람들의 고깝다는 시선이 한구석으로 쏟아졌다. 유일하게 아쇼트 군의 사람들 중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지 않았던 사람, 제눌트 남작이었다.
“왕자께선 어째서 펜자르크 백작이 부족한 병력을 무려 왕자님께 맡겨 보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군. 자네가 날 구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 더 있어야 할 설득력이 있진 않은 것 같군. 다른 이야기가 있나?”
제눌트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의견이 있어도 거의 말로 꺼내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 아쇼트나 동행한 가신단들에겐 의아한 일이었다.
“장군, 대체 무슨…….”
“왕자께선 지금 엄청난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신 겁니다. 곧 엘레나와 적군 6할의 움직임이 켈리도니온에서 멈추도록 만드는 역할을요.”
“엄청난…… 작전?”
처음엔 얼른 귀향하려는 걸 방해하려는 것이라 내키지 않았던 아쇼트. 하지만 자신이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제눌트의 발언은 기분을 꽤 좋게 해 주었다.
‘저 완고한 고집쟁이가 웬일이지?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조금 기분이 좋아진 아쇼트는 부드럽게, 제눌트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부탁했다. 제눌트는 헛기침을 하며 평소 자신에겐 맞지 않는 친절하고 장황한 설명을 할 준비를 마쳤다.
‘침착하자, 자연스럽게. 왕자를 충분히 잘 설득만 해내면 무리도 없을 테지.’
가신단 중 몇 명인가는 벌써 수상쩍은 눈빛으로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곤 최종적으로 이쪽의 제눌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바람잡이를 할 준비를 마쳤단 뜻이었다. 멍청하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구제 불능의 젊은 놈들이야, 그날 밤에 마실 술 생각뿐이었겠지만.
‘되었군.’
제눌트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은 이것저것 섞여 있었지만 요점은 아주 단순했다.
“왕자께선 왕국의 차기 계승자. 그러니 고블린 전쟁이란 중요한 과정에 빠지셔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왕자께서 계시기에 엘레나와 6할이나 되는 적 군대가 이곳에 묶이는 겁니다.”
“오……. 내가 있어서 엘레나 누님을 묶어 둘 수 있다, 그거로군?”
“맞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싸우지 않고도 두 배나 되는 적 병력 반 이상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활약입니까.”
“오…… 하하.”
군사 방면에서 뛰어나다는 장군의 칭찬을 들은 아쇼트는 제법 자부심이 차올랐다. 헛기침 두어 번에 헛웃음을 흘린 젊은 왕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제눌트의 조언을 구했다.
“그럼, 장군은 이대로 우리가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정말 위험하다면 모르겠지만 파르티즈만 곧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제 왕국에서 왕자님의 지지파가 우위를 점하게 될 겁니다.”
제눌트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명한 거짓이다. 파르티즈를 빼앗아도, 그다음 펜자르크는 칼주안 관문에서 다시 시간을 낭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젊은 왕자의 군대는 결코 펜자르크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펜자르크가 보냈지만 왕자에게 결코 닿지 못한 연락에서도, 아직 왕자가 합류할 때는 아니라고 했다. 정확히 ‘아직 아니지만 필요할 때 합류하라’였다. 그러나 제눌트는 이제 아예 합류 가능성을 없애 버린 것이었다.
“제눌트 장군의 말씀도 옳지만, 그래도 고향을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건 아닐까 합니다.”
“맞습니다. 너무 오래 머물 게 아니라면 적당한 시점에 돌아가서 아군에 합류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만약에 아군에게 가는 길이 네마냐 등에 의해 막히기라도 하면…….”
젊은 장교 하나가 제눌트에 거스르는 말을 꺼냈다. 물론 이는 바람잡이를 위해 일부러 준비한 사람이었다. 다만 살짝 술에 취한 채 들어온 다른 장교가 동의하며 위험한 말을 꺼냈다.
“네마냐……. 하긴 우리가 서부로 돌아가려면 동부의 적 점령지를 지나가야지. 혹시 그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제눌트?”
“음, 뭐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다만…….”
잠시 말끝을 흐리며 제눌트는 왕자의 불안이 혹시라도 커지지 않을 돌파구를 찾았다. 재빨리 바람잡이들이 소곤거리며, 자연스럽게 철병보다는 장기 주둔으로 흐름을 끌어갔다.
“음, 이라크시스 강은 우리 서부를 지나 동부로 흘러갑니다. 우리 군이 지나가는 길을 놈들이 막는다면, 우리는 그 물줄기를 막겠다고 협박하면 될 겁니다. 그 고집 센 바누라트 경조차 왕도와 각 영지로 흘러가는 보급로가 몽땅 차단된다면 버티지 못할 겁니다.”
“옳아, 과연 그 말이 맞군요. 우리의 병력을 놈들이 막을라치면 우린 놈들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겁니다.”
“그렇구나! 사실 우리가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었어. 누님이 네마냐의 바람에 휘말려서 잘난 척을 하기에 나도 그만 당한 모양이야.”
드디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실히 알아버린 것에 기뻤는지, 아쇼트는 연신 책상을 두드리면서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전투 없이도 평화를 이룩하는 방법 아닌가. 제눌트 그대가 내게 정말로 중요한 걸 알려 주었네.”
“천만의 말씀을.”
끝났다. 이제 서부 반란 영지의 모든 병력 중 30%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통신, 지휘, 정보라인 모두가 제눌트 및 그와 작당한 가신단이 통제하고 있었다. 펜자르크에 충성스러운 장교들은 고블린 패퇴 이후 악몽과 나태함에 젖어 술로 나날을 보낼 뿐, 부대 업무는 아예 손을 놓아 버렸다.
‘아직 고블린 전쟁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도 바난드의 내전은 곧 끝이 날 건 확실해졌군.’
제눌트와 같은 무인에게 배신이란 어찌 보면 다시 없을 불명예였다. 하지만 연이은 전쟁에서 아쇼트의 무력함, 펜자르크의 수상한 모습, 서부 영주들의 탐욕만이 드러나고 있었다. 제눌트와 바난드에 충성스러운 장교들은 무엇이 진정 바난드를 위하는 길인가. 그것에 관해 한마음, 한뜻을 가졌다.
“이제 머지않아 바난드 왕국은 올바른 통치자 아래서 재통합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하야스단의 외로운 등대, 고원을 떠받치는 대들보가 되는 겁니다.”
제눌트의 이 소리에 섬뜩하긴커녕 그저 미소로 화답하는 아쇼트. 이 왕자는 그저 곧 자신의 잘난 누이에게 굴욕을 안길 순간만을 그리며 낮술 한 잔을 마저 홀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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