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역전 계약
제국군의 본대가 차마 패전을 겪고서도 켈리도니온에 갈 수 없어 머무르던 다르빌 근교. 아침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에 여기서 다시 한번 중요한 모임이 열렸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엘레나가 마침내 일정을 시작했다.
“아르미니우스 장군은 멀쩡하셨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제독께서도 멀쩡하신지?”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근위병들이 목숨을 걸고 안전한 덤불 뒤로 옮겨놓은지라.”
전투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는 근위병들의 사망률로도 알 수 있었다. 사령관을 지키는 근위병들은 기본적으로 후방 배치다. 어지간한 전투로는 잘 죽지 않는다.
“근위병의 피해도 무척 크다고 들었습니다. 유사시에는 핵심 전력을 대체할 만한 병력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상을 당한 놈들도 대부분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근위병 출신의 강건한 병사라고 해도 임무 수행이 어려운 부상을 입게 되면 대수로운 보상도 없이 강제 전역을 밟게 될 것이다. 사실은 전역보다도 기록 삭제에 가깝지만.
‘패배하는 병사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심보라니. 나 같으면 정예병으로 돌아갈 순 없어도 그런 경험 많은 병사들을 그렇게 쓰진 않을 텐데.’
네마냐는 이미 재무관 미하일에게 따로 연락하여 이 갈 데 없는 퇴역병들을 고용할 생각이었다. 팔 혹은 다리가 하나씩 없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잘만 하면 공짜 인력 천 명 단위는 나오겠지. 그럼 병력 고용 퀘스트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거야.’
네마냐가 속으로 셈을 헤아리기 바쁜 사이, 엘레나와 아르미니우스의 예의를 갖춘 정성스러운 대화도 끝나갔다.
“곧 바난드에서도 봄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국과 한층 더 튼튼한 협조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하하…… 좋습니다. 일단 이런저런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가실까요?”
보통 제국군 장교들은 서기관들 못지않게 술 얘기, 고향 얘기, 출세 얘기로 몇 시간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애써 웃으려 드는 굳은 얼굴로 본론을 들어가자고 재촉하다니.
‘네마냐 얘기대로 정말 똥줄이 타는 모양이구나, 이 사람들.’
확실하게 이제는 하야스단, 아니 바난드-바가반드와 제국군의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 저희는 언제나 폐하의 도우심을 기억에 남기며 제국군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길.”
“허허, 참으로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역시나 바난드는 하야스단에서도 제국의 으뜸가는 동맹제후이시지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투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부제독 각하께서는 3주 안에 지금의 전황을 이끌어 그대로 전쟁에 쐐기를 박으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레나와 아르미니우스 모두 네마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각자는 약간씩 다른 반응을 담은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도록 곧바로 쐐기를 박아 주네. 이제 부제독도 꼼짝없이, 적당한 말로 넘길 수는 없겠지.’
부제독의 표정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곤 있어도 꽤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네마냐는 활짝 웃어 보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기탄없이 말씀해 보시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제국 원로원과 정부가 합의한 출병 기한은 고작 3주 정도 더 남았을 뿐 아닙니까? 남은 기간에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하면 여러분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테고요.”
“빈손……은 아니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야 인정은 하오만. 흠, 흠!”
애써 아르미니우스는 부정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냉혹한 현실을 알고 있다. 내각과 원로원은 결코 지금 수준의 성취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네마냐는 여전히 생글생글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끌었다.
“공적이 없다고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의 주둔과 철군을 결정하고 작전의 대강을 정하는 건 현지의 군인이 아니라 책상물림인 서기관과 관료, 원로의원들 아닙니까.”
“……크흠, 그렇기야 하지만. 남의 나라 정치 사정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건 달가운 일은 아니네.”
“저도 그렇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길 꺼내겠습니까. 행정과 외교, 정치가 그렇듯이 군사를 쓰는 일도 마땅히 전문가가 중심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까지만 흘리면 충분할 것이다. 동방 군부의 고질적인 위기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환관과 원로원 늙은이들의 장기 말로 전락하여 헛되이 인생을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체 높은 부제독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 전생에서도 제국을 내전으로 뒤흔들었던 그 불안감은 여전하군. 이번에도 이걸 이용할 수 있다면…….’
아르미니우스는 한참을 못마땅한 듯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백했다.
“휴, 그래! 경의 말이 맞네. 솔직히 말해서 원로원이 정부를 움직이고 황제를 우습게 보는 이 상황을 우린 예의주시하고 있어. 지금처럼 주요 방어 정책을 망치고 있는 상황 말이지.”
“하야스단 방어책은 확실히 제국을 위해서나 이곳을 위해서나 절실하다고 저희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폐하나 군부의 노력에 대해선 언제나 동감하고 있습니다.”
엘레나는 슬쩍 원로원과 군부의 편 가르기에 발 한쪽을 얹은 듯 말을 더했다. 평소의 안정된 상태였다면 제국의 불안한 내부 정치에 발을 딛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제국이 하야스단을 버리게 할 수는 없지. 적어도 이들이 우릴 도와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잘못된 선택은 아닐 테지.’
‘바난드의 통치자까지 끌어들인 건 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아르미니우스를 끌어들일 만한 유인할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문제를 내부 정치로 확대해서 제국군을 갑의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을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네마냐의 그런 생각대로 아르미니우스는 어느샌가 그저 보급과 보조병을 요청하려던 생각은 싹 잊은 지 오래였다. 매우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하야스단을 이용해 보려던 계획은 사라지고, 그들의 도움을 받는 쪽으로 상황이 전환되고 있었다.
‘이거……. 놈들한테 호구 잡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지만, 놈들이 외교 방면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우군이 된다면? 연합해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확실한 수가 된다면……?’
아르미니우스의 뒤에 서 있는 장교들도 비슷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긴장한 누군가는 요란한 소리로 군침을 삼키면서까지 대화에 집중할 정도였다.
“그럼, 바난드의 전하께서 저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조건으론 무엇이 있겠습니까? 작전 종료까지는 불과 3주밖에 남지 않았사온데, 여전히 어려운 고블린 전쟁과 우리 군의 철병을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입니까.”
진정한 본론으로 들어왔군. 공식적으로는 양측의 대표자인 엘레나와 아르미니우스의 사이에 오가는 대화였다. 하지만 무언가 구체적으로 약속하는 건 엘레나가 아니라 네마냐 자신이 할 생각이었다. 아직까진, 바난드의 병사 통솔권밖에 지니지 못한 엘레나보단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많은 건 분명하므로.
“우선 우리가 남은 3주 조금 넘는 기간에 해야 할 일은 고블린에 대한 확실한 승리입니다. 최상은 적의 궤멸이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테죠.”
“그럼, 최상은 불가능해도 차상이 가능하단 이야기입니까?”
“물론입니다. 당분간은 고블린이 적어도 대규모 침공을 하지 못하게 꺾거나 아예 좌절시켜 버리도록 만들어야죠. 그리고 제게는 그걸 실현시킬 만한 계획이 있습니다.”
분명하게는 전생에서 전쟁이 30년 가까이 이어진 끝에 피폐한 성국 기사단과 제국 등 연합군이 내놓았던 마지막 계획을 참고한 것이었다.
[고블린 내부의 분열을 획책해서 적의 지도부를 유화적이거나 우호적인 적으로 교체한다.]
고블린과의 전쟁에서 더 이상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인간들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결정도 당시엔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10년 정도 전쟁을 했을 뿐. 여전히 인간들의 힘은 만만치 않아. 고블린의 지도부를 교체할 수 있다면……! 더군다나 우리에겐 굉장히 좋은 동맹이 있었지.’
이제는 오체시, 오크 공화국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버린 고블린의 별종. 상업과 학문의 발달로 마법도 능숙하고 덩치도 개량되었으며 인간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20년 뒤쯤에는 이미 멸망했겠지만 지금 우리가 꾸준히 고블린 어그로도 끌어주어서 피해도 없었어. 지금 그 계획을 실행한다면 충분히 판을 역전하는 것도 가능해.’
네마냐의 머릿속으론 인간과 고블린의 공존을 추구했다던 오니아스 대마법사의 글이 여전히 떠올랐다.
[생김새가 다른 이 녹색의 형제들도 언젠가는 마나와 이성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리라. 내가 참으로 걱정하는 건 그런 깨어 있는 고블린들이 자신의 동포를 설득하는 걸 방해할지도 모를, 우리 인간들의 차별과 편견의 시선이다.]
‘차별과 편견……. 어쩌면 이걸로 전쟁을 한 번에 끝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아직까진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만한 상황은 못 되었다. 타위비크 등 중북부의 변경 영지나 엘레나 등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오크 공화국이 동맹이었다. 아직도 강경 반고블린 투쟁가들에게 고블린, 오그르, 오크는 생김새와 습성이 다른 짐승들일 뿐이었다.
‘옳은 일이라고 무조건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이건 우선 내가 알아서 추진하기로 하고…….’
네마냐는 다시 이야기의 물꼬를 틀기로 했다. 잠시 네마냐를 기다렸던 엘레나는 구체적인 협상으로 아르미니우스를 이끌었다.
“자, 향후의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 중 하나는 단언컨대 귀 병력의 돌격기병이 될 겁니다. 아무리 산지가 많고 길이 좁다곤 해도 적의 파상공격을 막을 만한 부대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죠.”
“미크라야크의 슴바트는 어떻습니까? 저번 충돌 당시 도망치는 고블린 상당수가 곳곳의 산길과 삼림지대에서 척살당했다고 하던데.”
“경보병 전력의 위력도 상당하죠. 그렇지 않아도 미리 연락관을 통해 이번엔 슴바트의 병력에도 합류 요청을 보냈습니다.”
엘레나에겐 무척이나 어려운 결단이었으리라. 네마냐는 슬쩍 곁눈질로 눈치를 보았지만 엘레나는 애써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며칠 전보다도 성장한 것 같군.’
처음 슴바트와의 협력을 제안했을 때 얼굴을 붉히며 길길이 날뛰던 그때의 엘레나와는 사뭇 달랐다. 이제는 점점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무럭무럭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흠, 슴바트가 아마 하야스단에 위협이 되기론 고블린에 못지않지만, 무시할 수만은 없겠죠. 향후 그의 야심에 대해선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만.”
“물론입니다. 현재 바난드의 내부를 교란시킨 2왕자와 그 배후세력에 슴바트 공이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도 있으니까요.”
네마냐는 엘레나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르미니우스도 그 이야기는 충분히 일리 있다면서 기꺼이 네마냐의 말에 동조했다. 사실 동조하지 않으면 자기가 어쩔 것인가? 이미 엘레나와 네마냐로부터 모든 필요 보급물자를 받기로 한 마당에.
“하하, 이렇게 의견이 통일되니 저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 3주 동안 우리 영지에서 제국군의 작전에 사용되는 모든 보급물자를 제공할 것입니다. 기쁘게 써 주시길 바랍니다.”
“천만다행이로군.”
“물론 앞으론 바난드의 국왕대리인 엘레나 전하의 명목상 지휘 아래 작전에 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래도 그편이 바난드 휘하 2만여 병력과 함께 유동적인 작전을 펼치기엔 좋을 테니까요.”
결국 오늘 엘레나-네마냐 조합이 아르미니우스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인 목적지에 다다랐다. 예상은 했다지만 부제독과 장교들의 표정은 여러 차례 흔들린 탓에 복잡해 보였다.
‘제독께서 그런 실수만 하지 않으셨더라면 어찌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들에게…….’
‘하지만 지금은 군부의 입장을 지켜내고 실패를 만회하는 게 우선. 부제독 각하도 그걸 모르시지는 않겠지.’
아마도 니키타스가 부상을 입은 채로라도 면담에 들어왔다면 기어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자신만만한 총사령관과 달리 아르미니우스와 이하 장교들은 앞날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고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을의 입장에서 제후국과 계약을 하기란 무척 낯선 일이군. 좋소, 우선 작전이 종료될 시점까진 바난드 국왕 대리이자 성국 기사단장에게 총지휘권을 맡기겠소. 대신 구체적인 발표에선 언어 표현을 조금 부드럽게 했으면 싶은데.”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은 제국의 자신감이란. 그 정도는 얼마든 포용하고도 남을 네마냐였다. 그리고 이젠 정치인으로 한 계단 더 전진한 엘레나 역시 그 정도의 알량한 허위는 내어줄 준비는 되어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얼른 협상 내용을 문서화하고 공증하시죠. 앞으로 3주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장군.”
“허허……. 우리야말로 잘 부탁하지, 총사령관.”
엘레나와 네마냐는 어쨌든 결착을 냈다는 안도감에 벌떡 일어난 아르미니우스와 악수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하야스단 제후국을 호령한다는 제국군이 그 하야스단의 일개 소국 군주에게 군의 통솔권을 실제적이든 형식적으로든 이양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관계의 역전을 규정한 계약. 아무리 임시적이고 예외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야스단과 제국의 관계에 가져올 변화는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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