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하야스단인의 전쟁 (2)
“철군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이제 간신히 끝날 기미를 잡았는데, 이렇게 무력하게 돌아가다니요?”
부상으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니키타스를 빼고 부장급 장교들이 중심이 된 전술 회의. 아침부터 영상구로 시작된 회의는 곧바로 난장판이 되었다. 니콜라오스 경으로부터 황제가 쓰러지고, 원로원이 머지않아 지휘권을 행사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어쨌건 상황은 돌이킬 수 없네. 이미 원로원에선 정부를 접수할 준비를 하고 있어. 내각의 원로들도 손을 반쯤 털었고.”
“그런……! 특사경 어르신께서 어떻게 손을 써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이대로 우리 전사자들조차 손써 보지 못하고 후퇴할 순 없습니다.”
잠깐의 침묵.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무슨 대답이 나올 것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저 부질없는 희망을 걸어보았을 따름이다.
“군인의 본분은 명령에 따르는 것. 그리고 폐하께서 그동안과는 달리 폐결핵이 깊게 내렸네.”
깊은 한숨과 함께 니콜라오스는 일단은 얘길 해보곤 있다며 위안을 건넸다. 어쨌든 3주 동안은 제국군의 거취는 미확정 상태로 남게는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에라도 할 수 있는 건 해보게. 증원군이나 물자 보급은 거의 불가능하니 내가 보기엔 하야스단의 제후연합에 의지해야겠지만.”
“알겠……습니다.”
제독 니키타스를 대신하는 부제독 아르미니우스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영상구까지 동원한 작전 회의는 이렇게 별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어떡하실 겁니까, 부제독. 제독 각하마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고 우리 군의 장비나 사기도 엉망입니다.”
“역시나 하야스단 제후들에게 도움을 좀 요청하는 것이……. 이대로 20일을 허송세월해 봐야 우리 군대가 전선주도권을 잃고 말 겁니다.”
장교들은 장군들만큼이나 군부의 쇠퇴에 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가 영향력을 상실한다면 그만큼 대외정책, 방위정책의 결정에 대한 입김을 낼 수도 없게 된다.
“뭣도 모르고 수도의 느긋한 저택에 앉아 지방민들의 목숨을 결정하는 이런 불의한 구조를 용납해선 안 됩니다.”
“원로원이 뭘 할 줄 알겠습니까. 지방민과 군인의 진출은 오히려 차단해 버리고.”
“거, 말조심하거라. 잘못하다가 원로원에 이상한 소리라도 들어갔다간 역모죄로 잡혀간다.”
아르미니우스의 힘없는 경고에 장교들은 이를 갈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크음,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은 오직 하나다.”
“그게 무엇입니까.”
성급한 장교 하나가 묘수라도 있느냐는 눈치로 바라보았다.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속 시원한 건 아니다. 지금 불과 20일 안에 최대한 고블린을 토벌해서 하야스단을 안정시키는 쪽이지.”
“하! 아직도 그런 말씀입니까. 태평하시군요.”
“고블린을 남은 20일 동안 어떻게 토벌할 수 있습니까. 준비를 갖춰 적의 본거지로 추격해 들어가는 데만 족히 열흘은 걸릴 겁니다.”
상황이 그러했다. 제국군의 핵심병력으로 적을 물리칠 전력이었던 중기병대 대부분이 궤멸당한 상태. 보병 전력만은 거의 2만에 달한다지만 이들로는 충분한 무장과 보급을 유지한 채로 고블린 본거지까지 다가갈 수 없었다.
“보병대는 숫자가 많은 것이 유효하거늘, 압도적인 숫자를 유지하려면 지금 우리 군의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는 보급 수요가 생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
“기병이 왜 없습니까. 날래고 정예한 병력 1천여 명에 군마도 아직 족히 2천 마리는 남아 있습니다. 한번 싸워 볼 정도는 충분히 됩니다.”
“고작 1천으로 아직 4만은 넘게 남았을 고블린을 치라는 소리냐?”
아르미니우스가 코웃음을 치며 장교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아무리 기병이 강하다곤 해도 고작 그 정도의 병력으로 고블린 본거지를 공격하기는 무리였다.
“그러면 부제독 말씀은 우리가 알메니아 놈들에게 빌붙어서 작전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놈들을 우리가 속옷부터 새로 갈아입혀 준 놈들인데 우리가 그놈들에 부속된다니! 말이 됩니까!”
아우성을 쳤다. 아르미니우스는 휘하 장교들을 설득하기도 민망하여 지레 눈까지 감아 버렸다. 기사들에 해당하는 장교 200여 명을 총동원해서 싸우자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탕!
“정도껏들 해라. 너희들 초조한 거야 알겠지만 최소한의 보급이나 보조병조차 없이 가자니. 그게 말이 되는가!”
부제독은 장교들의 허튼소리를 들으며 모종의 확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책 결정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당할 두려움에 휩싸인 장교들이 좋은 대안을 내놓을 수 없으리란 확신이었다.
“그럼 어떤 방책을 세우실 요량입니까, 장군.”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르미니우스는 고심 끝에 말문을 열었다.
“모든 것을 내게 맡겨 두어라. 내가 반드시 너희를 이끌고 이 난관을 돌파할 구멍을 찾아낼 터이니. 분명 답이 있을 것이다.”
주문이라도 외듯 중얼거리는 부제독에게 휘하 장교들의 모습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지금으로선 절실하게 중요한 두 명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일을 다르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들이라면…….”
젊은 소영웅 출신의 신생 영주, 계승 조건에서 불리하지만 꿋꿋하게 공적을 세우며 뚫고 나가는 중인 왕위계승자. 그들이라면…….
그렇게 하야스단에서의 전쟁은 점점 하야스단인을 중심으로 한 전쟁으로 뒤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 * *
“허, 이걸 성하께서 친히 반포하셨다고? 문서를 배포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영상회의까지 주재하셨다니.”
엘레나의 성화에 허겁지겁 머리는 수건으로 대충 휘감고 숙소 1층으로 뛰어 내려온 네마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욕하던 도중 가운을 급히 두르고 나온 길이라 몸에선 뜨끈뜨끈한 기운이 아직도 솟고 있었다.
“저기, 상관없으니까 가운 좀 제대로 챙겨입어 줄래? 전장에서 험한 꼴로 같이 구르긴 했지만 보기 좀 그렇네.”
“어? 아, 아! 미안! 아직 잠결이라, 하하.”
가운의 매듭을 채 짓기 전에 신국의 배포문건부터 받아 보느라 맨몸이 살짝 드러날 뻔했다. 아차 싶었던 네마냐는 다행히 일이 터지기 전에 수습할 수 있었다.
“그, 미안하게 됐으니 차라도 대접할게. 이야기 좀 하다 가자고. 정신도 차릴 겸.”
“미안할 건 아니지. 나도 서두르게 했으니 차는 내가 우리는 거로 대충 퉁치자고.”
사이프러스라고 부르는 향내 깊은 이파리로 차를 우려내는 데는 아무리 길어도 삼십 분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그래, 나도 새벽같이 부하 기사들이 가져다준 걸 보고는 놀랐다니까. 갑자기 녀석이 지케른 전체에 독전 포고를 내릴 줄이야.”
“음, 아무래도 제국 쪽에서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
네마냐는 어째선지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짓된 희망과 불안한 예감으로 가득한 전쟁에 트라야브나가 직접 끼어들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국군의 철수 같은 거? 그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대처할 만한 방법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거기다 무엇보다도 제국이 보호한다는 그 사실 자체도 강력한 일종의 보증서 역할도 되고.”
원래 하야스단을 노리는 나라나 영주는 많았다. 이유는 많았다. 마정석, 석탄 내지 보석과 같은 광물을 노리는 경제적인 침략자.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향하거나 길목을 방어하는 지정학적인 침략자들이었다.
“아마도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제국군마저 없었다면, 저지대의 부유한 왕국이나 공국들이 침공했겠지. 그럼 내전이 한창이던 바난드 같은 나라는 그대로 침몰했을 테고…….”
“생생하네. 마치 겪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네마냐의 기억에서 그 시나리오는 결코 허황된 거짓이 아니었다. 회귀하기 직전의 하야스단은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남은 재산과 목숨마저 이웃들에게 볼모로 잡힌 상태였으니까.
‘뭐, 허황된 이야기라곤 생각하겠지. 어쨌든 분명하게 제국의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충분했어.’
네마냐가 드러내길 원하는 건 제국의 내부 사정이 어쨌든, 제국은 하야스단에게 간절히 필요한 대상이라는 점이다. 네마냐의 관점에서 그들은 아무리 나쁘게 보아도 ‘필요악’이지, 제거 대상이 될 순 없었다.
“결국은 적대적인 사람들 말처럼 제국도 본인들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뿐이지. 하지만 이렇게 고원에 대한 안전 보장을 받아낼 수 있다면 누구도 쉽게 이 땅을 노리진 못해. 그건 사실이야.”
“그렇다면 제국군 철수는 그 보장마저 사라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겠군.”
“어떻게든 그 부재를 메꾸거나 대체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지금까지의 다른 상황과 달리 이번의 문제는 제국 내부의 정치도 깊이 연결되어 있어. 우리가 어떻게 하기가…….”
“걱정하지 마. 이번에도 돌파구는 알아서 생겨 줄 테니까. 우린 기다리면 돼.”
차를 다시 한 모금 후루룩 마시는 네마냐는 성녀의 문서를 엘레나에게 돌려주었다.
“응? 기다리면 된다니?”
“우리보다도 이 문제에 급하신 분들이 있으시거든. 아마도 지금쯤이면 벌써부터 몸이 달아서 찾아오실지도…….”
미처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급하게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이런 이른 시간부터.”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하게 연락을 드려야 한다고 하셔서요.”
낯선 목소리였다. 하지만 네마냐는 대충 누군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엘레나에게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 이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끼를 무네. 사실 미끼조차 뿌린 적도 없지만. 정말 편안한 낚시로군.”
“누군데 그래?”
“어디서 오신 누굽니까, 그것부터 밝히고 물어보셔야죠.”
다시 문간을 향해 외치는 네마냐의 말에 문 건너편에선 약간의 침묵 이후 대답이 돌아왔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 제국군 장교단입니다. 부제독 아르미니우스 각하께서 음, 앞으로의 전략과 관련해서 나자리안 백작 각하와 몇 마디 말씀을 나누고자 한답니다.”
“……어때, 봤지? 급해서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반드시 찾아온다니까.”
네마냐는 채비를 갖추고 직접 찾아가겠다며 전령을 돌려보냈다.
“이제야 나도 좀 알겠군, 네가 말한 뜻을.”
“역시 현명하시군, 전하.”
이제 엘레나도 네마냐가 무엇을 이야기한 건지 완전히 이해했다. 제국에서 비롯된 문제라면, 적어도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제국 내의 이해집단과 움직이면 될 것 아닐까.
“하, 그렇다면 이번엔 아예 제국의 내부 대결 구도를 이용하는 위험천만한 일이 되겠군. 어째 가면 갈수록 판이 커지는 것 같아.”
엘레나의 말대로였다. 이미 하야스단 대전쟁의 판세는 하야스단과 고블린의 문제를 넘어 주변 지역과 제국의 분열로까지 커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겨나는 걸림돌을 넘어가려면 이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적어도 네마냐는 그렇게 생각했다.
“뱃사람들이 그러더라. 거친 풍랑이 이는 파도를 피하려 해서는 파도를 넘어갈 수가 없다고. 직접 정면으로 뚫고 나갈 각오를 해야 부드럽게 타고 넘어가는 법이지.”
“타고 넘어가다 배가 뒤집힌다고 해도?”
엘레나도 이미 받아들인 모양새였지만 마지막으로 반쯤 자조가 섞인 농담을 던졌다.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네마냐는 괜찮다며 역시 반쯤 농담을 던졌다.
“괜찮아. 우리가 하야스단이란 배가 넘어가도록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 성하께서도 저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신데.”
“하하, 네마냐 네 말이 맞아.”
남은 차를 들이켠 엘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일들이 썩 유리하거나 호의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고통에 찬 앞날을 약속하는 성격들이다. 하지만 네마냐와 이야기를 마친 엘레나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어디, 고블린 혓바닥이 더 긴지, 우리 손목이 더 튼튼한지. 끝장을 보자고.”
“그럼 얼른 준비해서 제국군 나으리들과 즐거운 협상을 해 봅시다, 전하. 우리도 이제 협상의 즐거움을 좀 누려 봐야죠.”
파산상태에 다다른 제국군 원정대. 네마냐는 이제 절실하지만 가치가 한없이 저렴해진 그 원정대를 낚아 올릴 참이다. 전쟁을 하야스단인의 주도로 바꾸고 확실한 승리를 얻어낸다는 당초의 목적, 그 하나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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